삼세양중인과 부정은 윤회부정
“실제로 부처님은 불경속에서 우리들이 윤회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이말은 이중표 교수가 금강경강좌에서 한말이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이중표교수의니까야로 읽는 금강경7강, 4:30) 있는 말이다. 부처님은 정말 윤회가 없다고 말했을까? 이중표교수는 이 말을 하기 전에 “불교는 윤회설이 있는데 부처님은 왜 이런 문제에 대하여 대답을 안하셨을까? 궁금하시죠?”라며 부처님의 무기에 대하여 말했다.
부처님은 윤회에 대하여 정말 말하지 않았을까? 이중표교수에 따르면 “그런 생각은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이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라 했다. 윤회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왜 맞지 않는 것일까? 이어지는 이교수의 말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윤회에 대하여 이야기 하십니다. 그런데 ‘윤회가 정당하다’라고 말씀 하시는게 아니라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때 ‘우리에게 없던 괴로움이 생긴다’ ‘있던 괴로움은 커간다’ 즉, 윤회한다는 식으로 우리 자신을 이해할 때 우리의 삶 속에 고통이 일아나고 있으니까 거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부릅니다.”
(이중표교수, 이중표교수의니까야로읽는금강경7강
이중표교수는 해탈에 대해 이야기 해도 열반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또 윤회는 이치에 맞는다고 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을 떠 올리게 한다. 모든 번뇌의 경에 따르면 일곱 가지 번뇌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즉, ①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②수호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③수용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④인내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⑤피함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⑥제거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 ⑦수행에 의해서 사라지는 번뇌를 말한다.
모든 번뇌의 경에 따르면 일곱 가지 번뇌는 정신을 제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들은 정신을 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므로,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고, 정신을 써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지 않는다.”(M2) 라 했다.
이중표교수가 언급한 것은 ‘모든 번뇌의 경’ 일곱가지 번뇌에서 ‘관찰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에 대한 것이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을 쓴다.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 또는 현세에 이것에 대해 의심한다 - 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M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은 이야기를 했을까? 주석에 따르면 육사외도에 대한 것이다. 외도의 사상 중에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라는 말은 영원주의에 대한 것이고,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는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외도의 윤회시상에 대한 것도 있다. 기본적으로 외도사상은 자아가 있다는 견해에 기초한다. 그럼에도 이중표 교수는 이 문구를 인용하여 부처님이 윤회를 설하지 않았고 윤회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중표교수는 수행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하면서 지금 생사를 겪고 있는 이 몸을 수행해가지고 생사를 떠난 자리로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런데 거기에 간 사람 누군지 아십니까?”라고 묻는다. 두 눈으로 확인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천당에 가 본적이 없듯이 우리들이 생각으로만 보는 자리입니다.”라 했다.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고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을 부정하는 말이다.
이중표 교수의 강연을 들어 보면 기존의 모든 교학체계를 부정한다. 특히 아비담마논장을 부정한다. 그러다 보니 십이연기에서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한다. 삼세양중인과의 부정은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는 다름 아닌 업과 업보를 부정이다. 그가 비록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라고 주장하지만 삼세양중인과의 부정은 사실상 내세와 윤회가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 대신 자신이 새롭게 해석한 불교가 바른 것이라 한다.
이중표 교수의 강연을 듣다 보면 망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용수위 중론과 세친의 유식으로 해석한 자신만의 독특한 불교관을 대승불교의 공사상과 접목하여 설명하는 이중표교수의 불교관을 들어 보면 마음속으로 “망어 하고 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부처님 가르침과는 명백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심지어 부정하기 까지 한다. 불자들이 들으면 큰 혼란을 야기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런 이중표 교수의 주장은 단멸론적 허무주의에 가깝다.
오로지 자신의 입만 바라보라는 식의 강연을 들으면 교리도 필요 없고 수행도 필요 없다.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이중표 교수가 말한 것을 이해하면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표교수의 망어(妄語)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2016-10-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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