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무상이 아니라 오온무상
자애를 닦으면
“수행승들이여,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 그를 공허하지 않은 선정을 닦는 수행승이라고 한다.”앙굿따라니까야에서 경을 선별하여 한 권으로 만들어 놓은 ‘생활속의 명상수행(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 실려 있는 가르침입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11권짜리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손가락 튕김의 경’이라 하여 A1.53으로 분류 해 놓았습니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은 매우 짧습니다. 흔히 빨리 하라고 이야기 할 때 0.5초 이내라 하는데 그 보다 더 짧은 순간이 손가락 튕기는 순간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 자애의 마음을 내어 자애를 닦거나 자애의 마음으로 정신활동을 기울인다면 그 공덕은 무척 크다고 했습니다. 이를 공허한 선정수행과 비교했습니다. 그렇다면 공허한 선정수행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주석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추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아에 기반하여 선정을 즐기는 현법열반론자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을 보면 62가지 사견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현법열반론’이 있습니다. 이 생에서 이 몸과 마음이 느끼는 즐거움이 최상의 행복이라 합니다.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향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선정상태에서의 희열과 행복 역시 현법열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사열반 또는 가짜열반이라 볼 수 있는 현법열반론은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감각적 쾌락도 내가 느끼는 것이고, 선정에서 희열과 행복, 평온 역시 내가 느끼는 것입니다. 무아의 불교에서 자아에 기반한 현법열반론은 사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이 공허한 선정을 닦는 것 보다 더 수승하게 본 것도 무아의 가르침에 기반한 것이라 봅니다.
매우 짧은 순간에도 자애를 닦으라는 것은 한순간이라도 착하고 건전한 생각을 내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인식의 전환과도 같습니다. 악하고 불건전 생각에 지배 받을 때 착하고 건전한 생각으로 전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 화가 치밀어 오른다면 마치 폭주하는 기차처럼 오로지 앞으로만 달려 가기 쉽습니다. 이럴 때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는 심호흡 세 번 하면 된다고 합니다.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어떤 이는 ‘측은지심’을 내라고 합니다. 화가 날 때 측은한 대상을 떠 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노의 마음이 자애의 마음으로 바뀔 것이라 합니다.
한순간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내는 과보는 무척 크다고 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을 보면 엄청난 보시를 하는 것 보다 그 공덕이 더 크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부처님에게 공양 올리는 것 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다. 이는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 부처님이 최상의 공양에 대하여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아무리 승원을 지어 승가에 보시해도, 승가에 억만금을 보시해도 가르침을 실천하여 마음을 닦는 것 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무상의 지각에 대하여
그런데 벨라마의 경에 따르면 자애 보다 무상입니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을 닦으면 자애를 닦는 것과 비교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 보다,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 올 것입니다.”(A9.20)라 했습니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은 매우 짧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0.5초 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자애의 마음이나 무상을 지각하면 엄청난 공덕이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수행하는 삶입니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이 엄청난 보시를 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승하다는 말입니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애의 마음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애수행이라 하여 여러 가지 기법이 소개 되어 있지만 바탕에는 ‘무상관’이 깔려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전재성박사는 니까야 강독모임에서 수행의 순서에 대하여 부정관, 호흡과, 무상관, 자애관 순으로 말한 바 있습니다. 철저하게 무상을 지각하였을 때 자애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무상의 지각일까요?
흔히 인생무상을 이야기합니다. 계절이 바뀌면 계절무상을 이야기 하고, 도시가 건설되면 자연무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스케일이 너무 큽니다. 스케일을 한 없이 키워 나가다 보면 지구도 무상하고 우주도 무상합니다. 제행무상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 하신 무상은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한정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떠나 이야기하는 것은 관점을 벗어난 것입니다. 이는 부처님이 ‘우주는 유한한가?’ 등의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무기한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한순간이라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떠나서 가르침을 논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우주론으로 불교를 설명코져 한다면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누군가 물질을 기반한 과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논점을 벗어난 것입니다. 부처님은 철저하게 이 몸과 마음을 떠나서 가르침을 설하지 않습니다. 무상에 대한 지각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부처님은 한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 과보는 엄청날 것이라 했습니다. 무상에 대한 지각은 다름 아닌 오온에 대한 지각입니다. 오온에 대하여 느낌을 예로 든다면 “이것이 느낌의 발생이고, 이것이 느낌의 소멸이다.”(S22.102) 라 하여 생성과 소멸을 관찰하라고 했습니다. 즐거운 느낌이 발생되면 즐거운 느낌이라고 알아 차릴 뿐 끌려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물질에 대한 탐욕, 존재에 대한 탐욕, 무명, 자만을 뿌리째 뽑아 없앨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무상은 삼법인 중의 하나입니다.
왜 무상, 고, 무아 순인가
흔히 삼법인을 불교의 잣대라 합니다. 불교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의 잣대를 들이 대면 불교인지 아닌지 금방 드러납니다. 누군가 항상을 이야기하거나, 누군가 즐거움을 이야기 하고, 누군가 참나를 이야기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틀림 없습니다.
법구경에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Dhp277) 라는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이는 제행무상에 대한 것입니다. 이 정형구에서 ‘무상하다’ 대신에 ‘괴롭다’와’ 실체가 없다’를 집어 넣으면 일체개고와 제법무아의 삼법인 정형구가 완성됩니다.
삼법인에서 일체는 무엇을 말할까요? 거시적 우주와 미시적 원자의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요? 부처님이 말씀 하신 일체는 여섯 감역에 대한 것입니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 하였을 때 일어나는 마음이 일체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철저하게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오온을 떠나 거시적 세계나 미시적 세계를 논하는 것은 가르침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위빠사나 수행처에 가면 가장 먼저 가르쳐 주는 것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입니다. 이는 경행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한발 한발 내딛으면서 발다닥을 통해서 일어나는 느낌과 움직이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하면 우리 몸과 마음은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것 외에 그 어떤 다른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을 지각하면 커다란 과보가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무상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무상, 고, 무아 순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항상 무상이 먼저 나올까요? 고나 무아가 먼저 나오면 안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고, 무상, 무아 라든가 무아, 고, 무상이라고 하면 안되는 것일까요? 무상이 가장 앞서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무상을 지각해야 왜 고인지 왜 무아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테라가타에서
최근 테라가타 교정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전재성박사가 세계최초로 주석을 포함하여 완역을 했습니다. 출간만 남겨 놓고 있는 상태에서 교정작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오자와 탈자를 찾아 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무엇 보다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거의 대부분 각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빠알리 주석을 우리말로 옮겨 놓았는데 주석을 보면 부처님이 어떤 의도로 말씀 하셨는지 제자들은 어떻게 이해 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무상과 관련되 테라가타 중의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그 위험을 알고
존재를 구하지 않는다.
일체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나에게 모든 번뇌는 부수어졌다.”(Thag.122)
웃따라가 읊은 게송입니다. 테라가타의 구성을 보면 시를 지은 자에 대한 인연담이 길게 소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석에 써 있는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인연담에 따르면 웃따라는 쑤메다부처님 당시 황화수 꽃을 공양한 공덕으로 천상계와 인간계를 윤회하다가 부처님 당시 바라문 아들로 태어났다고 소개 되어 있습니다. 웃따라는 출리심이 생겨 법의 장군 사리뿟따에게 출가 했습니다. 웃따라는 윤회에서 재난을 보고 이 시를 읊었다고 합니다.
시에서 ‘나는 그 위험을 알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조건지어진 것의 위험을 통찰의 지혜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의 특징에 의해서 괴롭고 실체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S22.15) 라고 했습니다.
세 가지 특징, 즉 무상, 고, 무아를 알게 되면 더 이상 존재를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 가지 특징을 이해하는 자에게 존재는 불타는 집처럼 위험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계 뿐만 아니라 천상계에서조차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삼법인에서 왜 순서가 중요할까?
삼법인을 세 가지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삼특상이라 합니다. 그런데 삼법인이나 사법인, 삼특상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무상입니다. 무상에 대한 지각이 있어야 괴로움과 실체없음이 파악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라훌라에 대하여 무상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펼치시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세존] "라훌라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각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라훌라]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라훌라]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라훌라]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M147)
이와 같은 정형구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순서가 있습니다. 무상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그 다음이 괴로움이고, 그 다음이 무아입니다. 무상이 항상 앞서고 무아가 항상 뒤에 나옵니다. 만약 누군가 무아를 앞세워 무아, 고, 무상 순으로 말한다면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없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 됩니다.
한순간만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은 커다란 인식의 전환입니다. 이에 공덕은 엄청난 보시와 비교할 바가 아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큰 보시를 해도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만 못합니다. 최상의 공양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 보다 더 수승한 것이 한순간만이라도 무상을 지각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무상을 지각했을 때 괴로움과 무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고, 무상하기 때문에 무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무상은 인생무상이나 자연무상이 아니라 오온무상입니다.
2016-09-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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