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나와 싸운다
저주의 기도
갈수록 점입가경입니다. 이번에는 박원순서울시장의 산문출입을 금했습니다. 교구본사주지회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현대자동차가 105층짜리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건립추진을 강행하자 이에 맞서 조계종에서 내린 조치입니다. 이전에는 ‘망소나타’ ‘망그랜저’ 등 망자를 붙여 위패를 모시고 천도재를 올린 바 있습니다. 현대그룹이 망하기를 바라는 ‘저주의 기도’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천도재나 저주의 기도는 효과가 없다고 했습니다. 한평생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른 자에 대하여 천도의 기도를 올려 준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위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바위는 무게가 있어서 물속에 가라 앉습니다. 그런 바위에 대하여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떠 오를까요? 무거운 악업을 지은 자에게 천도의 기도를 한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태어날까요?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커다란 큰돌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합장하고 찬탄하고 순례한 까닭에 물 속에서 떠오르거나 땅위로 올라올 것입니까?” (S42.6) 라며 반문했습니다.
저주의 기도가 있습니다. 한평생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선행을 지은 자에게 저주의 기도를 올린다고 해서 지옥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마치 물에 떠 있는 버터나 기름에 대하여 “버터여, 기름이여, 잠겨라. 버터여, 기름이여, 잠겨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업을 지은 자에게 저주의 기도를 올린다고 해서 지옥에 떨어질까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버터나 기름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저주하고 합장하고 순례한 까닭에 잠기거나 물 밑으로 가라앉거나 바닥으로 가라앉을 수 있습니까?” (S42.6) 라며 반문했습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저주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현대자동차가 망하기를 바라는 저주의 기도입니다. 사실상 한국경제가 망하기를 바라는 저주의 기도와 다름 없습니다. 내용을 보니 과거의 일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 하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유력한 야당대선후보에 대하여 산문출입금지까지 결의 했습니다. 이와 같은 저주의 기도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저주의 기도를 한다고 하여 매각 되었던 부지를 찾아 올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간의 비웃음을 사며 저주의 기도를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님과 신도들을 동원하여 야당시장을 겁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연 조계종은 무엇을 얻어내고자 하는 것일까요?
쫒겨난 허정스님
조계종의 행태를 보면 조폭과 다름 없습니다. 조폭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합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것입니다. 조계종의 행태가 그렇습니다.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스님들이 종단을 장악했습니다. 총무원과 종회 등 종무기관과 돈이 되는 목 좋은 사찰을 독차지 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공생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가 망하든 흥하든 관심사가 아닙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고나 쓴소리를 하면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적광스님 폭행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최근 작은 시골절 주지가 종단에 쓴소리 했다고 하여 쫒겨났습니다. 서산 천장자 주지 허정스님입니다.
허정스님과의 인연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블로그와의 인연이 최초입니다.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 주어 소통하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천장사 주지로 임명되고 나서 처음 만나 보았습니다. 본격적으로는 천장사 일요법회에 참석하고 나서 부터입니다. 거리가 멀어 자주 참석하지는 못했습니다. 종종 참석 했는데 초기경전을 독송하고 토론 하는 모습이 매우 신선했습니다. 대부분 사찰에서 일요법회가 없는 현실에서 그것도 부처님 원음에 대하여 토론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색달랐습니다.
허정스님이 종단에 쓴소리 하지 않았다면 재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라며 각종 매체에 기고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일종의 ‘필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한 것이 괘씸죄로 작용했는지 총림에서 압력이 들어 온 것입니다. 근원적으로는 더 상층부에 있을 것입니다.
허정스님은 결국 쫒겨났습니다. 들어 올 때 아무것도 없었듯이 나갈 때 역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에 일요법회팀원들과 신도들은 매우 슬프게 생각합니다. 특히 일요법회회원들이 그렇습니다. 지난 3년 동안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에 법회를 하고, 점심공양을 함께 하고, 차를 마시고, 오후에는 지역에 있는 사찰순례를 갔었는데 그런 즐거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한국불교에서 쓴소리나 바른소리하면 쫒겨납니다. 잘못하면 얻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두 다 침묵합니다. 작은 기득권 하나 지켜 내기 위하여 할 말이 있어도 꾹꾹 참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서 주기를 바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켜 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더 멀리 하는 듯 합니다. 아마 불이익 받을 것을 두려워서 그러겠지요. 쓴소리하다 쫒겨난 자는 마치 불가촉천민과도 같습니다.
모든 것이 비정상적입니다. ‘망소나타’라는 저주의 기도가 대표적입니다. 비상식이 상식이 된 듯 합니다. 비정상적, 비상식적 사회에서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찍어냅니다.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은 가르침은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쓴소리, 바른소리 하는 자들은 끊임 없이 나올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 (S22.94)
부처님은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중생계를 말합니다. 부처님은 세상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가르침을 설하자 세상이 싸움을 걸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결코 세상과 싸운바 없습니다. 다만 진리만 설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과 다투거나 싸우는 것으로 비칠까요? 이는 부처님이 “세상에서 현자들이 ‘아니다’라고 여기는 것은 나도 그것을 ‘아니다’라고 한다.”(S22.94)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 현명한 자들이 바라 본 세상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오온에 대한 것입니다.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정반대로 항상하고, 즐거운 것이고 실체가 있는 것이라 말합니다. 바로 이런 점이 세상과 다투고 싸우는 것으로 내비추어진 것입니다.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싸움을 걸어 올 뿐입니다. 종단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종단에 대하여 쓴소리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싸움을 걸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길을 가는 자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습니다. 세상이 싸움을 걸어 올 뿐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설하는 자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사문을 좋아하는 이유
허정스님은 쫒겨 났습니다. 총림의 어른 스님들도 보호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권력승들과 한편인지 모릅니다. 정처없이 유랑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출가자는 본래 유행하는 것이 맞습니다. 정처가 정해져 있다면 집착이 일어날 것입니다.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애착이 일어나기 때문에 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해탈과 열반을 지향하는 본래출가의 목적과도 맞지 않습니다. 탁발에 의존하며 유행하는 삶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테리가타에 로히니경이 있습니다. 테리가타는 장로니게라 하며 제자들의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것을 모아 놓은 경전입니다. 소녀 로히니는 사문을 좋아 했습니다. 출가하기 전에 아버지와 나눈 대화에서 출가사문에 대하여 이렇게 노래 했습니다.
“그들은 먼 길을 행각하고, 마음챙김에 머물고
지혜롭고 산란하지 않으며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 (Thig.281)
“어떤 마을이든지 떠날 때는
어떤 것에라도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무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 (Thig.282)
2016-10-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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