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공업론과 자격론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0. 21. 09:23

 

공업론과 자격론에 대하여

 

 

 

 

스님과 신도들이 서울대에 쳐들어 갔습니다. ‘변태불교조폭불교를 말하는 우희종교수를 파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울대총장에게 공개사과를 요청했습니다. 요즘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스님과 승가에 대하여 쓴소리하면 스님모독내지 승가모독이라 하여 가만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보수적 교계신문도 한 몫 합니다. 한사람을 타켓으로 하여 전지면에서 융단폭격을 퍼 붓습니다. 그런 기사 중 하나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불교신문에 특별기고된 경희대 교수의 칼럼입니다.

 

경희대 교수 칼럼에 따르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공업론이고 또하나는 자격론입니다. 공업론은 무엇일까요? 오늘날 불교가 이렇게 망가진 원인 중에 재가불자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재가자가 스님들을 잘못 외호에서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는 일련의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스님 주변에 이익을 탐하는 재가자의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스님을 사주하여 잘못된 길로 하게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 책임은 스님에게 있습니다. 마치 장관이 모든 책임을 지는 것과 같습니다. 장관도 모르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임하는 것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스님 주변에 이익을 탐하는 재가자가 있어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재가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입니다. 더구나 공업이라 하여 출가와 재가의 공동책임으로 몰고 가려 합니다. 그러나 어불성설입니다.

 

한국불교는 사실상 비구에 의한일부승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구니스님이나 재가불자는 다만 따라갈 뿐입니다. 종단의 권력구조가 일부승 위주로 되어 있고, 시시콜콜한 것 까지 일부승의 권한입니다. 이런 구조에서 사회적으로 지탄 받는 문제가 터졌을 때 재가자도 책임이 있다하여 공업론으로 몰고 가는 것은 대단히 비겁한 행위입니다.

 

공업론을 말하는 자들 중에는 한국불교가 침체된 원인을 재가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재가자들이 너무 설쳐 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박, 음주, 폭력, 은처 등 있어서는 안될 사건이 발생됐을 때 교계언론, 재가단체와 일부재가자는 격렬하게 비판합니다. 그런데 이런 비판이 불교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이제 갓 입문한 불자들이 돌아 설 수 있고, 기존 불자들은 신심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되는 인터넷시대에 한번 올려진 글은 인터넷바다를 떠 다닙니다. 누군가는 접하게 될 것입니다. 신심 있는 불자들에게는 신심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타종교인이나 일반인이 보았을 때는 불교는 형편 없는 종교라고 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종단에서는 비판적 두 매체에 대하여 해종언론이라 하여 언론탄압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입니다. 조폭불교, 변태불교라고 말하는 이의 직장까지 찾아가는 것도 어떤 비판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재가자들이 비판하면 불교가 퇴보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경희대교수는 자격론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비판할려면 비판할 자격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특히 재가자에게 말합니다. 오계도 지키지 않은 자들이 스님과 승가를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스님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자가 비판하는 것은 수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큰 조직의 장이나 명망가들을 말합니다. 오계를 지키는 명망가가 쓴소리 하는 것은 받아 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명망가가 오계를 지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명망가들이 쓴소리 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명망가가 말한다고 하여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망가가 조폭불교나 변태불교라 했다 하여 직장에 쳐들어 가는 것을 보면 들어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경희대교수의 자격론을 보면 재가자도 스님의 위치에 올라가야 할 듯 합니다. 오계를 지키며 청정한 삶을 사는 자가 비판하면 수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법구경에서도 남의 잘못은 보기 쉬워도 자신의 잘못은 보기 어렵다.” (Dhp252) 라 했습니다. 남을 비판하려거든 자신부터 돌아 보아야 한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스님과 재가자는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스님은 구족계를 받은 자이고 재가자는 오계를 받은 자입니다. 스님은 청정한 삶을 살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백 수 십 가지에 해당되는 계를 어겼을 때 당연히 비난 받습니다. 수행자의 허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크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S9:14) 라 했습니다.

 

재가자는 스님들의 허물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스님들의 허물에 대해 이야기 해도 스님비방이나 승가모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스님이나 승가를 비방하려거든 자격을 갖추라든가 자신이 청정한 지 스스로 되돌아 보라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습니다.

 

 

 

2016-10-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