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어떻게 해야 기복을 극복할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6. 9. 5. 10:28

 

어떻게 해야 기복을 극복할 수 있을까?

 

 

기복을 어떻게 볼 것인가? 늘 뜨거운 주제이자자 논란거리입니다. 최근 현각스님이 기복불교 극복에 대한 글을 페이스북에 발표한 바 있습니다. 조계종 포교원장 지홍스님은 현각스님의 주장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 기복불교청산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기복이고 어디까지 기복이 아닐까요? 또한 기복불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천장사 허정스님과 허정스님과 절친 도반인 선일스님과 모임이 있었습니다. 9 4일 일요일 조계사 극락전 2층 법당에서 천장사 서울신도분들과 인연있는 법우님들이 모여서 간단한 예불의식이 끝난후 기복불교에 대하여 토론했습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기복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기복을 작복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토론입니다. 토론을 하다 보니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모든 종교는 기복으로부터 시작되고, 기복을 극복한 종교가 불교라 했습니다. 그러나 기복이 기복으로 머물렀을 때 기복불교라는 오명을 벗어날 수 없지만, 기복을 깨달음으로 승화시켰을 때 기복은 방편이 되어 기복이 어느 정도 정당화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기복불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욕망이 개입되어 있는 기복

 

불자들은 절에 가면 기도합니다. 요즘은 어느 절에 가나 기도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관음기도니, 지장기도니 하여 마치 유일신교에서 보는 것처럼 절대자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초월적 존재에게 자신의 소원을 들어 주기를 바랍니다. 주로 자신과 가족에 대한 것입니다. 이른바 사대기도라 하여 평안, 학업, 사업, 치유에 대한 것입니다.

 

절에 가면 대웅전에 플레카드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입시철이 다가 오면 예외 없이 수능백일기도라는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철마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추어 수 많은 기도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기도라는 말이 불교에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말 대신 수능백일불공으로 바꾸면 훨씬 더 불교적이라 봅니다. 또 관음기도 대신 관음법회로 바꾼다면 제자리를 찾아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자들의 눈살을 찌뿌리게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도세레모니입니다. 국가대표축구선수가 골을 넣고 나서 자신의 신에게 감사표시를 하는 세레모니를 하는 것입니다. 골을 넣게 해준 신에게 가장 먼저 감사의 예를 올리는 것입니다. 이를 지켜 보는 불자들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합니다. 골을 안넣으면 질까봐 불안하고 골을 넣으면 기도세레모니를 볼까봐 불안합니다. 그런데 상대편의 선수도 골을 넣고 난 후 기도세레모니를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과연 그들이 믿는 신은 어느 편의 손을 들어 주어야 할까요?

 

입시철이 되면 어느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기도를 합니다. 자신의 자녀가 원하는 학교에 꼭 붙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전국의 유명기도처에서는 기도하는 사람들로 넘쳐 납니다. 이럴 때 초월적 존재는 누구의 자녀를 합격시켜줄까요? 공양물을 많이 올리고 헌신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자녀를 합격하게 해줄까요?

 

초월적 존재에게 기도하는 행위는 마치 축구선수가 그들의 신에게 세레모니 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시금액에 따라 열정에 따라 합격여부가 결정되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대단히 이기적입니다. 대부분 기도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라면 기복이라는 말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대부분 종교는 기복적입니다. 대부분 종교는 기도를 합니다. 대부분 기도에는 욕망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무언가 바라고 갈구하고 성취하려는 행위의 밑바탕에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만일 열심히 기도를 했음에도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분노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는 더 열심히 지극정성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여길지 모릅니다.

 

욕망이 개입되어 있는 기도는 기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내 가족의 안위와 성취만을 위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법당 연등에 달려 있는 꼬리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복을 어떻게 구복 또는 작복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기적인 기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을 벗어나 주변으로 확산시켰을 때 더 이상 이기적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방편설법

 

부처님은 이기적 기도를 말씀 하신 적이 없습니다. 탐진치를 소멸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욕망이 개입된 기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는 행위에 대하여 대단히 어리석은 짓이라 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촌장상윳따에 따르면 서쪽지방 사제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하늘나라에 태어 나게 하는 기도행위에 대하여 물속의 바위야 떠 올라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평생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업을 지은 자에게 하늘나라에게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행위는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저주의 기도도 통하지 않습니다. 평생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한 자가 죽었을 때 어느 사제가 저주의 기도를 하여 악처에 태어나게 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기도라는 말을 한적이 없습니다. 그대신 착하고 건전한 삶에 대하여 얘기 했습니다. 보시하고 지계하는 삶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입니다. 이렇게 보시하고 지계하는 삶을 살다보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이런 가르침부터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차제설법입니다. 또한 부처님은 사람들의 성향과 기질이 각자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설법했습니다. 이를 방편설법이라 합니다. 이는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 다른 방편으로 설해진 것이므로”(M59)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방편설법을 대기설법이라고도 합니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적합한 설법입니다. 두려움에 처한 상황에 처한 자에게는 그에 걸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자에게는 그 상황에 걸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 아난다에게 여인에 대하여 쳐다보지 말라라고 충고를 주었지만, 부처님의 사촌동생인 난다에게는 하늘나라 천신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면서 더욱 더 열심히 정진할 것을 당부하는 것 역시 방편설법입니다. 이렇게 사람에 따라서 달리 설법하는 것은 각자 처한 상황과 기질과 성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다면

 

한국불교가 기복불교라는 오명을 벗어나려면 기복을 깨달음의 불교로 바꾸면 됩니다. 처음에는 기복으로 시작했을지 몰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본래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기복은 일종의 방편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불문에 처음 들어 온 자에게 처음부터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부처님 근본가르침부터 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나중에는 주변에 대한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 생겨 날 것입니다. 이런 단계로 발전되었을 때 비로서 작복이 됩니다.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하지 않고 가르침에 의지하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방대합니다.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무려 팔만사천가지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그렇다고 절대적 존재나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하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오로지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또 법귀의와 자귀의를 말씀 하시면서 다른 것에 의지하지말라”(S22.43) 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그럼에도 기복에만 머물러 있다면 이는 기복행위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기복행위를 조장하여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승려가 있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기복행위 그 자체는 종교입문 과정에서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단계입니다. 그러나 기복행위에 머물러 있다면 진정한 불자로 볼 수 없습니다. 절에 10, 20, 30, 평생을 다녀도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학업, 사업,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한다면 타종교의 기복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차제설법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모두 남김 없이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신도들에게 열심히 기도하십시오라는 말만 한 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직무유기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오래 유지될 수 있도록

 

한국불교가 기복불교에서 벗어나려면 가르침으로 되돌아 와야 합니다. 기도라는 말 대신 법회나 공양이라는 말로 바꾸어야 합니다. 부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 공양드리는 것입니다. 불공입니다. 이를 빠알리어로 붓다뿌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최상의 공양은 어떤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그러나 아난다여, 이러한 것으로 여래가 존경받고 존중받고 경배받고 예경받고 숭배받는 것이 아니다. 아난다여, 수행자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으로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경배하고 예경하고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그대들은 ‘우리는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하리라.’라고 배워야 한다.” (D16)

 

 

 

 

 

 

 

 

부처님이 말씀하신 최상의 공양은 공양물을 많이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 공양이 아니라 정신적 공양입니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했을 때 최상의 공양이 됩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서에서는 그 자양을 여읜 공양(nirāmisapūjā)이 나의 가르침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사부대중이 그 공양으로 나를 공양하는 한, 나의 가르침으로 천공에 있는 보름달처럼 빛나기 때문이다.”(Smv.579) 라 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 했을 때 부처님 가르침은 오래 유지됩니다. 만일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고 욕망의 기도만 한다면 가르침은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해탈과 열반에 이르렀을 때 부처님에 대한 최상의 공양이 됩니다.

 

어느 종교이든지 기복을 합니다. 모든 종교는 기도와 기복을 근본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기복을 넘어서 있습니다. 어떤 초월적 존재에게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에 의지하여 해탈하는 것입니다. 이는 가르침의 실천으로 완성됩니다. 처음에는 기복으로 시작될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으로 귀결 되었을 때 기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2016-09-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