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축생의 차이는
인간과 축생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유하는 능력이다. 생각하기 때문에 차별화 된다. 생각은 언어에 기반한다. 말을 할 줄 알기 때문에 사유할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화에 따른다.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산을 산이라고 보는 것이다. 대상에 대하여 이름과 형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개념화 했을 때 언어체계는 완성되고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인간만이 말 할 수 있다. 물론 축생들도 울부짖음 등을 통하여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명칭을 부여하는 개념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사유 할 수 있다. 사유능력으로 인하여 축생과 차별화 된다. 똑같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유능력에 따라 구분 된다.
갓 태어난 아기는 축생과 별반 다름없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특히 언어구사 능력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자람에 따라 엄마가 몇 가지를 가르쳐 주면 그것만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속담에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안다.’라는 말이 있다. 어린 아기에게 몇 가지 말을 알려 주면 그 이상을 알게 된다. 나중에는 알려 주지 않은 말을 하기도 한다. 아기들의 언어습득능력은 참으로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에 대하여 도올 김용옥교수는 “어머니는 아이에게 발성의 체계를 반복해서 그 발성의 체계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가르키죠. 그 발성의 체계를 의미의 체계와 결합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막지하게 어린 영아가 서너살 때 이걸 다 해냅니다.” (도올 김용옥, 생각이란 무엇인가)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언어능력은 ‘타고 났다.’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현실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인간과 축생뿐이다. 천신, 아수라, 아귀 등이 있다고 하지만 눈으로 확인 되는 것은 축생뿐이다. 생명 있는 것으로 하나 더 추가한다면 식물이다. 인간도 동물에 속하므로 이 세상에서 생명 있는 것은 동물과 식물 뿐이다. 그런데 모든 살아 있는 것에는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식물에는 의식이 없다. 그러나 식물이 꽃을 피우고 향내를 발산 했을 때 의식이 있는 듯 하다.
지금 사무실에 행운목 꽃대가 나왔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특유의 행운목꽃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행운목꽃이 필 때 늘 느끼는 것이지만 식물도 낮은 차원에 불과할지라도 의식이 있음을 실감한다.
의식 있는 것을 유정중생이라 한다. 식물을 제외한 태생, 난생, 습생, 화생을 일컫는다. 여기서 화생은 눈으로 볼 수 없다. 천신, 아수라, 아귀와 같은 존재를 말한다. 그런데 유정중생 중에서도 의식 없는 존재도 있다는 것이다. ‘무상유정천’을 말한다. 의식을 혐오하는 수행의 결과 그 과보로서 태어난 존재이다. 그래서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듯하다. 살았을 때는 나무토막처럼 몸은 있지만 전혀 사유할 능력이 없어서 죽은 듯이 사는 존재이다. 마치 목각인형 같고 청동상 같다. 그런데 죽음과 동시에 의식이 되돌아 온다는 것이다. 죽어야 사는 존재이다. 색계 4선천의 이 존재가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우연론자가 되기 쉽다. 전생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연히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색계천상에는 남녀 구별이 없다고 한다. 욕계를 떠나는 수행의 과보로서 색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욕계를 혐오하는 수행의 과보로 본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진다.”(Nibbindaṃ virajjati, virago)”라는 정형구로 표현된다. 이는 남녀로 구분 되어 욕망의 삶을 살아 가는 것에 대한 혐오가 밑바탕이다. 그래서 욕망을 떠나는 수행을 하는데 경에서는 ‘염오이욕’이라는 용어로 정형화 되어 있다.
욕망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하루라도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자야 한다. 그 과정에서 오욕락을 추구한다. 세속의 오욕락은 식욕, 성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이다. 누구도 이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누구도 보는 것, 듣는 것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을 즐기는 삶이다. 이른바 오감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본능대로 살아간다. 대표적으로 식탐을 들 수 있다. 맛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음식은 오감으로 즐기는 것이다. 단지 먹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고기를 보고, 귀로고기가 지글거리며 익는 소리를 듣고, 코로 고기냄새를 맡고, 혀로 고기를 맛보고, 마침내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행복을 만끽한다. 오감으로 즐기는 것에는 성적교섭도 해당된다.
식욕과 성욕은 모두 욕망에 기반한다. 오욕을 즐기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오욕으로 살아 간다. 그런데 오욕으로 살아가는 것은 축생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축생은 끊임 없이 먹는다. 늘 먹을 것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또 하나 축생의 특징은 번식이다. 자손을 남기는 것이 최대의 의무이다. 마치 프로그램 된 것처럼 본능적이다. 자연다큐 프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생존하기 위해 먹고 자손을 번식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과 축생의 차이는 사유하는 능력이라 했다. 식욕과 번식욕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인간은 동물에 속하지만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동물과 차별화 된다. 만일 인간으로 태어나서 먹기 위해서만 산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번식하기 위해 산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마 축생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오로지 먹는 것에만 관심 보이고 오로지 자손만을 생각할 때 축생들과 똑같다.
인간이 사유능력이 있어서 축생과 차별화 된다면 축생의 세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 그것은 욕망의 세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욕계를 탈출하여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욕망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가르침이다.
“계행을 어기고 삼매가 없이
백년을 사는 것보다
계행을 지키고 선정에 들어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지혜가 없고 삼매가 없이
백년을 사는 것보다
지혜를 갖추고 선정에 들어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게으르고 정진 없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정진하고 견고하게 노력하며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
최상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 110~115)
2016-11-12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로지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는 (0) | 2016.11.14 |
---|---|
바쁘다는 핑계로 (0) | 2016.11.14 |
헛되지 않은 삶 헛되지 않은 인생, 치악산 정상에서 (0) | 2016.11.07 |
쌍투스(sanctus) 공연을 보고 (0) | 2016.11.04 |
‘늙은 좀비’ 소리 듣지 않으려면 (0) | 2016.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