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사소한 행위에서 두려움을 본다.” 인상에 남는 말 입니다. 행위의 두려움은 곧 ‘윤회의 두려움을 본다’는 말과 같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를 비구라 했습니다. 출재가를 막론하고 행위의 두려움,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에 대하여 비구라 말할 수 있습니다.
행위의 두려움을 보는 자라는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벌 수 있습니다. 특히 사만냐팔라경(D2)에서는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받아 배웁니다.” (D2) 라 해서 학습계율에 대한 항목이 나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출가자에 한한 것이긴 하지만, 모든 출가자는 재가자들로 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에서는 학습계율이라 했습니다. 왜 학습계율이라 했을까요? 학습계율을 뜻하는 빠알리어가 식카빠다(sikkhāpada)입니다. 율장에 포함된 수행승들의 의무계율을 말합니다. 수행승이 될 때에 받아 지켜야만 하는 250계의 의무계율을 말합니다. 초불연에서는 학습계목이라 번역했습니다. 영어로는 ‘steps of training’이라 합니다. 한자어로는 ‘学処, 学則’이라 합니다.
빠알리어 sikkhā는 ‘training, study; discipline’의 뜻입니다. 배운다는 뜻입니다. 계율을 받아 배운다고 하여 학습계율이라 합니다. 배우고 공부한다는 뜻입니다. 계율을 받아지니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생가는 공부라 볼 수 있습니다. 출가승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공부하듯이 학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평생 공부 하는 것입니다. 완성 될 때 까지 하는 것입니다. 금생에 못하면 내생으로 이어집니다. 마치 바라밀 행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라밀이 완성을 뜻하는 말이지만 완성을 향해 간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 생에서 못하면 다음 생에 완성할 수 있습니다.
학습계율이나 바라밀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수 많은 시행착오와 부단없는 노력에 의해 완성됩니다. 피안으로 향하는 여정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이번 생에 되지 않으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생에 발판이라도 마련 해 놓아야겠지요.
이산 혜연선사의 발원문을 보면 “아이로서 출가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다음 생에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다음 생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야 합니다. 경에서도 “그 수행승은 바로 현세에서 열반을 성취한 님이라고 할 수 있다.” (S22.116) 라 했습니다. 금생에서 열반을 성취한다고 하여 현법열반 또는 현세열반이라 합니다.
궁극적 경지를 맛본 자는 오로지 이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길을 본 사람은 그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 (Sn2.1) 라 했습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죄를 지은 자가 자신의 죄를 감출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깨끗한지, 자신에게 남아 있는 오염원이 어느 정도인지는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궁극적 진리를 맛 본 자는 자신만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이 길로 나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순탄치만은 않을 것입니다.
피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학습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 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학인’이라 합니다. 진리의 맛을 본 자들에게도 오염원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사람들과 비교 했을 때 미세한 것 입니다. 대지의 땅과 손톱끝의 먼지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 미세한 오염원 마저 남김없이 소멸해 가는 과정이 학인의 길입니다.
피안으로 가는 길은 이번 생에 끝낼 수 있고 여러 생일 수도 있습니다. 궁극적 경지를 맛 본 자에게는 최대 일곱생이면 피안에 이를 것이라 합니다. 이는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Sn2.1) 라는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궁극의 경지를 맛본 자가 저지르는 잘못은 사소한 것입니다. 악처에 떨어질 정도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수행자의 허물은 크게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사소한 잘못도 크게 보이는 법입니다. 손톱 끝에 흙먼지 정도 남아 있는 오염원이라도 소멸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최대 일곱생이라 합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라 했습니다.
업(業)대로 사는 인간의 운명은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올지 아무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만일 오늘 최후를 맞이 한다면 다음 생은 자신 있을까요? 어떤 이는 윤회에 대하여 부정합니다. 설령 윤회가 참이라 해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 합니다. 최악의 단멸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에 따라 먹혀 들어 갑니다. 그래서 법에 대해 의심합니다.
법에 대한 의심, 즉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면 결코 피안에 이를 수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열반을 설했음에도 이를 의심한다면 피안은 먼나라 이야기 일 것 입니다. 다음 생에 아기로 태어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발판을 마련해 놓으면 악처에 떨어질 염려는 없습니다.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본래 자리로 되돌아 갈 것입니다. 설령 이교도의 삶을 살아도 한순간에 깨우쳐 본래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예류자라는 발판을 마련해 놓으면 어떤 생으로 태어나도 안심입니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해도 정해진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불도의 길에 들어 선 사람들은 불도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도중에 다른 길로 갈수도 있지만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피안으로 가는 길에 수백생, 수천생, 수만생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궁극적 경지를 맛보는 것이라 합니다. 진리를 맛 보았을 때 일곱생 이내이면 피안에 이른다고 합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
2016-11-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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