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의 쓰라린 고통을 잊지 말자
타오르는 불꽃은 여간 해서 잘 꺼지지 않습니다. 산불이 나면 온 산을 태워 버립니다. 초기에 불길을 잡지 않으면 모든 것을 태워 버리고 난 후에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을 때 꺼질 것입니다. 남는 것은 잿더미뿐입니다. 욕망의 불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욕망의 불꽃
법구경에 “탐욕에 비길 불은 없고(Natthi rāgasamo aggi)”(Dhp202)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왜 탐욕(rāga)에 비길 불이 없다고 했을까요? 주석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불이 붙으면, 불은 보이지 않지만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워버리기 때문이라 합니다.
마음에서 일어난 욕망의 불은 연료도 없고 불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태워 버립니다. 내부에서 스스로 일어난 욕망의 불길은 모든 것을 남김 없이 태워 버린 다음에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을 때 꺼져 버립니다. 그래서 탐욕의 불, 욕망의 불, 갈애의 불이 가장 무섭다고 합니다.
몇 달 전 바다 건너 외딴 섬 여교사 성폭행사건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것도 학부형들이 여교사를 집단폭행한 것입니다. 술이 취해서 순간적인 욕정을 이기지 못하여 발생한 사건으로 세상이 경악했습니다. 범행을 저지른 자들은 구속되어 수 년 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고 합니다. 구속자들 역시 욕망의 불, 탐욕의 불, 갈애의 불에 태워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대 마음이여(te citta)”
욕망의 불을 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을 다스릴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의 불, 욕망의 불, 갈애의 불이 일어 났을 때, 불이 일어나서 불길에 쌓였을 때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테라가타에서는 마음에 대하여 객관화 하여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Olaggessāmi te citta,
āṇidvāreva hatthinaṃ;
Na taṃ pāpe niyojessaṃ,
kāmajāla [kāmajālaṃ (syā.)] sarīraja
“마음이여, 나는 그대를 제어한다.
코끼리를 쐐기문으로 이끄는 것처럼.
몸에서 생겨난 욕망의 그물이여,
그대를 악으로 나는 이끌지 않으리.”(Thag.355)
테라가타 제9품에 있는 ‘비지따쎄나’ 존자가 읊은 시입니다. 시에서 마음을 의인화 하여 “마음이여” 라든가 “그대를”이라 했습니다. 제어 되지 않는 욕망의 마음을 객관화 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구절을 보면 제어 되지 않는 욕망의 마음에 대하여 “몸에서 생겨난 욕망의 그물이여”라 했습니다. 여기서 몸에서 생겨났다는 것은 주석에 따르면 “몸에서 생겨나는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五蘊有: pañcavokārabhava)에 의해서 마음이 물질에 묶였기 때문에 몸에서 생겨난 것이라 한다.”(ThagA.II.151)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물질에 묶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신체적인 조건에 따라 마음이 일어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신체가 자극받았을 때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 대표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몸에서 생겨난 욕망의 그물이여”라 했을 겁니다.
몸에서 생겨난 욕망의 그물을 제거 하지 못하면 그 그물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결국 악업을 짓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잘 배운 부처님 제자는 그 마음을 들여다 보게 됩니다. 욕망의 마음을 보고서는 “그대를 악으로 나는 이끌지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욕망의 마음에 대하여 “그대 마음이여(te citta)” 라든가 “그대를(tam)”라 하여 의인화한 것입니다.
만악의 근원 음주
섬마을 여교사 성폭행사건은 우발적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고 계획적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신체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가장 먼저 ‘음주’를 한 것입니다. 대부분 사건과 사고는 음주로부터 시작됩니다. 불음주계를 오계에 넣은 것도 대부분 잘못이 음주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음주를 하게 되면 이성이 마비되고 감성적, 충동적으로 됩니다. 음주를 하게 되면 수 많은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술이 깨고 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신체적으로 자극 받았을 때 욕망의 불길을 자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관사를 찾아가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한 것입니다. 단 한번의 실수로 몇 년간을 감방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폭력을 가한 자는 오계를 모두 어겼습니다. 술을 마셔서 불음주계를 어겼고, 성폭력을 해서 불사음계를 어겼습니다. 성폭행 과정에서 폭력이 있었기 때문에 불살생계를 어겼습니다. 불살생계는 살생은 물론 폭력까지 포함하여 광범위하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일을 저지르고 난 다음 거짓진술을 했기 때문에 불망어계를 어겼습니다. 음주로 시작되어 구속되기 까지 오계를 모두 어긴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음주는 만악의 근원입니다.
누구나 잠재적 범죄자
누구나 오계를 어길 수 있습니다. 조건만 성립되면 누구나 성범죄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살인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누구나 도둑놈이 될 수 있고, 누구나 거짓말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오계를 지키는 것처럼 사는 듯이 보이지만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부부싸움 끝에 격분하여 아내를 살해 했다는 뉴스를 보면 누구나 잠재적 살인자들입니다. 견물생심이라고 물건에 손이 간다면 누구나 잠재적 도둑놈이라 볼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는 거짓진술이 난무합니다. 법정에 서면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잠재적인 거짓말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제어 되어 있지 않다면 누구나 오계를 어길 수 있고, 누구나 잠재적인 범죄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오계를 지켜야 하는가
오계를 어긴 것과 관련하여 가장 인상적 구절이 상윳따니까야에 표현 되어 있습니다.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기나긴 윤회에서 오계를 어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는 가르침입니다.
상윳따니까야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에 도둑질과 음행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도둑으로 살면서 타인의 아내를 겁탈하다고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23)라 했습니다. 도둑질, 음행, 폭력, 살인 등 온갖 악행을 일삼는 자가 사로 잡혀 목이 잘렸을 때 흘린 피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무한히 확장 했을 때, 즉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남의 아내를 겁탈하다 목이 잘려 흘린 피가 사대양, 즉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대양 보다 더 많을 것이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오계를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의 형성조건은 오계준수여부입니다. 이는 인간답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계정도는 지키고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 합니다. 오계를 지키지 않고 산다면 짐승 같은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계를 어기는 삶을 산다면 축생으로 태어날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한량없는 윤회과정에서 언젠가 인간으로 살다가 오계를 어겨 축생으로 태어났을지 모릅니다.
축생의 세계는 목숨이 보장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언제 먹잇감이 될지 모릅니다. 비참한 축생의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소로 태어나 소가 되어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13)라 했습니다. 경에서는 소 뿐만 아니라 물소, 양, 염소, 사슴, 닭, 돼지 등을 예로 들어 표현 하고 있습니다. 모두 목이 잘려 제사에 사용되거나 먹잇감이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둑질 하다 들켜서, 남의 아내를 겁탈하다 들켜서 목이 잘린 경우도 짐승과 같은 범주에 넣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보았을 때 오계를 어기는 것은 짐승과 같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윤회의 쓰라린 경험
한량 없는 윤회과정에서 마침내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오계를 어기면 다시 축생 등 악처에 떨어집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오계를 어길 수 없습니다. 도둑질 하려 하다가도 그만 두는 것은 과거 윤회의 쓰라린 경험을 잊지 않아서 일 것입니다. 비록 알 수 없는 전생이지만 과거 생 언젠가는 도둑질 하다 붙잡혀 목이 수 도 없이 잘렸을 것입니다. 그 피가 사대양 보다 많을 것이라 했습니다. 우발적 살인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부부싸움 끝에 격분하여 살인 했을 때 지옥 같은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과거 생에 쓰라린 고통을 겪어 어 보았기 때문에 살인까지 가지 않습니다.
과거생을 알 수 없습니다. 과거생을 모두 기억한다면 즐거운 일보다 고통스런 일이 더 많을 것입니다. 도둑질 하다 목이 잘려 흘린 피가 사대양보다 많다면 괴로운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차라리 기억 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전생에 대하여 기억 나지 않기 때문에 윤회가 의미 없는 것이라 합니다. 설령 윤회가 참이라 해도 간난아기가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 합니다. 최악의 단멸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들은 이전 생에 오계를 준수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오계를 어겨 목이 잘리는 쓰라린 기억이 잠재의식에 남아 있기 때문에 살인, 도둑질, 거짓말, 음행 하는 것을 주저 합니다. 또 다시 윤회의 쓰라린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우다나에 따르면 “선한 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쉽다.”(Ud.60) 라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선한 자는 악행하기 어렵다.’가 됩니다. 선한 자는 악행을 하라도 해도 못합니다. 선한 자에게 살인을 하라고 해도 못합니다. 선한 자에게 도둑질이나 거짓말, 음행을 하라고 해도 못합니다. 윤회의 쓰라린 고통을 잊지 않아서 일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자는 악행을 밥먹듯이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Sukaraṃ sādhunā sādhu ~
sādhu pāpena dukkaraṃ,
Pāpaṃ pāpena sukaraṃ ~
pāpam-ariyehi dukkaran
“선한 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쉽다.
악한 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어렵다.
저열한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은 쉽다.
고귀한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은 어렵다.”(Ud.60)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또 범죄를 저지릅니다. 전과자가 대부분 범죄를 저지릅니다. 악한 자가 악행을 쉽게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착한 자가 선행하기는 쉽지만 악한 자는 선행하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착한 자는 악행하기 어렵지만, 악한 자는 악행하기 쉽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 없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누구나 악행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착한 자라도 부부싸움 중에 격분했을 때 살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착한 자라도 도둑질 할 수 있고 성폭행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악행을 저지를 만한 조건이 형성되면 범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자는 어떤 경우에서라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교적 지혜입니다. 게송에서는 ‘고귀한 자(ariyehi)’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고귀한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은 어렵다”라 한 것입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것인가
탐욕의 불길이 일어나면 제어 되기 힘듭니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의 불길입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불이 붙으면, 불은 보이지 않지만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워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갈애의 화살이 세상을 꿰뚫으며 욕망의 연기가 항상 휩싸이네.”(S1.66) 라 했고, “세상은 모두 불이 붙었고 세상은 온통 연기에 휩싸였네.”(S5.7) 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세상이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다.”(S35.28)라 했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입니다. 매 순간 세상은 불타고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것은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라 했습니다.
탐욕의 불길에 휩싸이면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과 탐욕의 마음을 제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테라가타에서는 마음에 대하여 “그대 마음이여” 라든가 “그대여”라며 의인화 했습니다. 마음을 객관적으로 보고 그 마음에 끄달려 가지 않을 것임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노래 했습니다.
Yathā varahayadamakusalo,
sārathi pavaro dameti ājaññaṃ;
Evaṃ damayissaṃ taṃ,
patiṭṭhito pañcasu balesu.
“탁월한 말들을 훈련시키는데 밝은
우수한 조련사가 준마를 교련하듯,
실로 다섯 가지 힘을 확립하여
그처럼 나는 마음을 훈련시킨다.” (Thag.358)
마음을 마치 말을 훈련시키듯 한다고 했습니다. 야생마를 길들이듯이 제멋대로 날 뛰는 마음을 ‘오력’으로 제어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오력은 믿음, 정진, 새김, 집중, 지혜를 말합니다. 이외 마음 다스리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여, 정진의 멍에로 제어되니, 여기서 그대는 결코 멀리 가지 못하리라.”(Thag.359) 라 하여 노력해야 함을 말합니다.
“윤회의 쓰라린 고통을 잊지 말자!”
마음을 제어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가장 참기 힘든 것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불길입니다. 현자라면 감각적 쾌락의 재난을 알아 욕망의 불길을 꺼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 가는 자들은 쉽게 욕망의 불길에 휩싸여 버립니다. 탐진치에서 벗어난 현자들은 탐욕의 불길이 일어나지 않지만,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쉽게 욕망의 불길에 휩쓸려 갑니다.
섬마을 사건은 세상을 경악케 했습니다. 착한 듯이 보이는 평범한 이웃이 성폭행을 한 것입니다. 음주가 직접적 원인입니다. 음주행위를 원인으로 오계를 모두 어긴 것입니다. 짐승만도 못한 행위를 했습니다. 법구경에서는 “두려워하는 남자가 겁에 질린 여자에게 얻는 쾌락은 적다.”(Dhp310) 라고 했습니다. 겁에 질린 여자를 두려운 마음으로 성폭행한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이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고 게으른 자들은 욕망의 불길에 휩쓸려 잿더미가 되고 말지만, 정진하는 현자들은 마음을 제어 할 줄 알기 때문에 결코 고통을 초래하는 행위를 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래서일까 어느 법사는 강연에서 “윤회의 쓰라린 고통을 잊지 말자!”라 했습니다. 윤회의 쓰라린 고통을 잊지 않는다면 오계 어기는 행위를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Yathā kuñjaraṃ adantaṃ,
navaggahamaṅkusaggaho;
Balavā āvatteti akāmaṃ,
evaṃ āvattayissaṃ taṃ.
“갈고리를 가진 자가 힘이 세면,
새로 잡은 야생의 코끼리마저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선회시키듯,
그차럼 나는 마음을 선회시키리라.”(Thag.357)
2016-12-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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