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법당에서는 왜 논장을 배제하는가
윤회를 부정하면
지난 11월 테라가타 출간 기자단담회가 있었습니다. 법보신문 L기자가 전재성님에게 “이중표 교수는 윤회가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전재성님은 한마디로 윤회를 부정하는 자는 불교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윤회부정은 다름 아닌 불교부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인과관계를 알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어제는 오늘의 연속이고, 오늘이 있으면 내일이 있듯이, 인과관계를 무한히 확장하면 금방 드러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런 윤회는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이며 진실이라 했습니다.
윤회를 부정하는 자는 불교를 부정하는 자와 같습니다. 초기경전에서도 수 없이 부처님은 윤회에 대해 말씀 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문집에 실려 있는 말입니다. 삼장에 통달하고 세계적인 위빠사나 수행센터를 건립한 사야도의 법문집입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오로지 현존만을 주장하며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미래에도 그와 같이 주장하는 자들이 있을 겁니다. 이중표교수의 주장 역시 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은 금생 뿐만 아니라 내생에 대한 이야기도 가득합니다. 부처님은 삼세에 걸쳐서 법을 설한 것입니다. 만일 부처님이 오로지 현세의 삶에 대해서만 가르침을 펼쳤다면 단멸론자로 낙인 찍혀 법이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로지 현실론, 또는 현실에서의 삶에 대한 메커니즘만 이야기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왜곡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심오합니다. 어느 날 아난다는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는 얼마나 깊고, 얼마나 심오하게 출현하는지 세존이시여,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예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저에게게는 아주 명백한 것으로 보입니다.”(D15) 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는 깊고, 심오하게 출현한다. 아난다여,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꿰뚫어 보지 못하면, 이와 같이 이 뭇삶들은 실타래에 묶인 것과 같이, 마름병에 덮인 것과 같이, 문자풀에 엉킨 것같이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지옥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D15, 전재성님역)
아난다는 연기의 법칙이 아주 명백히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렇게 말하지 말라”라며 두 번씩이나 말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 했을까요?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부처님 영역에 속하는 원리를 아난다의 수준에서 명백하기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아난다는 부처님의 경계에 속한 일이 그에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손을 뻗어 존재의 가장 최상영역을 붙잡으려는 것과 같고, 배없이 바다를 건너려는 것과 같고, 땅을 구르면서 자양을 얻으려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경계에 속한 것을 스스로 명백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Smv.486)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중표교수가 파악한 십이연기
아난다는 연기법이 심오하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자신에게는 명백히 드러나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연기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부처의 영역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연기법에 대하여 부처님도 심오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심오한 연기법에 대하여 이중표 교수는 그 원리를 파악했다고 합니다.
이중표교수에 따르면 현존 하는 삶에서 십이연기와 오온, 십이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순간도 삶의 현실에서 떠나서는 연기법을 설명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이중표교수가 파악한 신개념 십이연기입니다. 부처님의 심오한 연기법을 최초로 파악한 듯이 강연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론과 관련하여 십이연기를 설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개념타파라 합니다. 언어에 속박된 개념을 타파 하면 진실이 드러나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에 부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중표교수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심오한 연기법을 파악했다고 했습니다. 근본불교를 중론과 연계하여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 실었고 요즘에는 대중강연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중표교수는 논장을 배격하면서 특히 삼세양중인과를 강하게 부정합니다. 삼세양중인과가 아비달마 불교의 산물로서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크게 왜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중표교수가 파악한 십이연기에 따르면 현존하는 삶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합니다. 인과를 무한히 확장하면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할 수 있음에도 굳이 현존에 한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중론과 유식 등으로 근본불교를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윤회를 부정합니다. 윤회를 부정해야만 삼세양중인과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중표교수가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기 위하여 윤회를 부정해야만 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이중표 교수의 견해에 동의 하는 스님이 있습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해피스님이 바로 그 분입니다. 물론 해피스님은 윤회를 인정합니다. 문제는 논장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식이 윤회한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제시합니다.
해피스님 강의에서
초기불교에 관심 있는 불자라면 해피스님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인터넷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2007년에 출가하여, 출가한지 2년만인 2009년에 해피법당을 만들고, 2011년 해피설법회를 만들어 설법한 것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고 있습니다. 유튜브에는 수 많은 스님의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윤회의 진실’이라는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해피스님은 근본불교를 설법하고 있습니다. 근본불교와 초기불교는 어떻게 다를까요? 해피스님이 말하는 근본불교는 1차 결집에 따른 경장과 율장을 말합니다. 초기불교는 근본불교를 포함하여 논장까지 확대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중표 교수 역시 근본불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논장을 배격한 불교입니다. 아비담마논장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입니다.
해피스님은 이중표 교수의 저작물에 감동을 받은 바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윤회의 진실 세미나 모두 발언에서 근본불교를 시작할 때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전남대 이중표 교수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해피스님은 “교수님 쓰신 책 몇 권을 제가 아주 열심히 공부했고 크게 도움 받았는데, 참 영광입니다. 이중표교수님 오늘 자리 해 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해피스님은 이중표 교수가 세미나 참석한 것에 대하여 ‘영광’이라 했습니다.
해피스님은 이중표 교수의 책으로 열심히 공부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해피스님은 ‘삶의 메커니즘’, ‘마음의 메커니즘’, ‘가르침의 진정성 찾기’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대중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삶의 메커니즘’에 대한 것을 보면 이중표 교수가 새롭게 해석한 십이연기에 강하게 영향 받은 듯 합니다.
해피스님은 테라와다 빅쿠이면서 논장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해피설법회는 오로지 1차 결집된 경장과 율장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석서와 아비담마,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선배스님들의 견해가 잘못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견해는 이중표교수가 논장을 배격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합니다.
허망한 열정
주석이나 논장을 배격하는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전개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대승불교가 흥기할 때 아미달마 불교를 비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설일체유부의 유론에 대하여 중론으로 파사현정했다는 용수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선발 주자를 따라 잡으려면 기존 것이 잘못되었음을 말해야 먹혀 들어가는 이치와 같습니다. 특허에서도 기존품과 다른 점, 기존 것 보다 더 뛰어난 점, 기존것 보다 더 독특한 점을 주장해야만 특허로서 인정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중표 교수의 강연을 들어 보면 논장에 대하여 강하게 부정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주장하는 이론이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윤회를 부정해야만 삼세양중인과가 성립하지 않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해피스님이 1차 결집본인 경장과 율장만을 대상으로 하고 논장을 배격하는 것 역시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 하기 위한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일까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이라 볼 수 있는 ‘삶의 메커니즘’이니 ‘마음의 메커니즘’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중표교수나 해피스님은 논장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논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 오로지 경장과 율장만 보고서 자신의 견해를 주장합니다. 설령 그런 주장이 타당하다고 할지라도 코끼리 뒷다리 만지기 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윤회를 인정하지 않으니 자동적으로 삼세양중인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무리에 무리를 범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해피스님이 말하는 ‘삶의 메커니즘’은 이중표교수의 불교관에 많은 영향을 받은 듯 합니다. 십이연기에 대하여 현존하는 삶에 적용하는 방식이 특히 그렇습니다. 해피스님이 말하는 ‘마음의 메커니즘’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비담마 논장에 이미 나와 있는 것입니다. 해피스님이 조건발생하는 식이 윤회한다고 했을 때, 이는 아비담마 논장에서 말하는 바왕가 또는 재생연결식과 같은 개념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온 논장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자신만의 이론을 전개하는 것은 ‘허망한 열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주석서와 논장의 가르침을 모두 무시한다면 이는 부처님 제자들의 노고를 깡그리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 논장을 배제하는가?
부처님은 아난다를 꾸짖으며 연기법이 매우 심오함을 말 했습니다. 단지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연기의 법칙만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인과를 무한히 확장하면 삼세가 됩니다. 시작도 알 수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윤회하는 세상입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동시에 윤회에서 벗어나는가르침도 설했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심오한 연기의 법칙에 대해 말씀 하시면서 만약 연기법을 모른다면 실타래 처럼 엉킨 삶을 살기 때문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지옥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D15) 라고 분명히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인과 관계가 삼세로 확장된 것으로 십이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하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보기 힘든 법이 네 가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진리, 중생, 재생연결, 조건입니다. 삼장에 통달한 자이거나 법을 증득한 자가 아니면 함부로 법을 설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부처님은 오로지 현세의 삶만 설하였지 내세에 대해 말씀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면 단멸론적 견해를 가진 자라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는 자는 윤회를 부정합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빠알리삼장에 근거합니다. 띠삐따까라 불리는 율장(Vinaya), 경장(Nikaya), 논장(Abhidhamma)이 있습니다.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동등하고 동급입니다. 특히 아비담마 논장의 경우 부처님이 아니면 설할 수 없는 심오한 가르침이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은 빠알리 삼장을 목숨걸고 지켜왔습니다. 부파불교가 시작 되기 이전 아소까대왕 당시 3차 결집본이 스리랑카에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빠알리삼장은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소중하게 간진해야 할 위대한 인류유산입니다. 특히 테라와다 교단은 빠알리삼장을 근본으로 성립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논장을 빼 버리고 오로지 경장과 율장을 통해서만 가르침의 진정성 찾기를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더구나 스승들의 가르침을 배제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내린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2016-12-1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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