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철학으로 격하시킨 이중표교수와 해피스님
과거칠불의 역관
상윳따니까야 2권에 ‘과거칠불’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빳시붓다에 대한 경을 보면 “보살 비빳씬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라고 시작되면서 “무엇이 있으면 늙음과 죽음이 있고 무엇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나는가?”(S12.4) 라는 의문이 있습니다. 노사에 부터 시작 되는 십이연기 역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위빳시붓다가 부처가 되기 이전 보살이었을 때 “왜 사람은 죽어야 하는가?”라며 의문 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위빳시붓다를 시작으로, 시킨, 벳사부, 까꾸산다, 꼬나가마나붓다에 이르기 까지 동일한 의문을 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깨달음을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과거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한결 같이 동일한 내용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고따마붓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칠불에 대한 경을 보면 공통적으로 연기의 역관으로부터 시작 됩니다. 늙음과 죽음부터 시작해서 태어남, 존재, 집착, 갈애, 느낌, 여섯 감역, 명색, 의식, 형성, 무명 순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노사가 있게 된 근본적 원인이 무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관에 대하여 전남대 박사과정을 수료한 우동필님은 부처님의 출가와 관련하여 이야기합니다.
우동필님의 논문 ‘역관의 십이연기’에 따르면 과거칠불에 표현되어 있는 역관이야말로 십이연기를 바르게 해석한 것이라 합니다. 불자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무명에서 시작되는 ‘환멸문’은 부처님의 ‘성도’시기에 대한 것이고, 노사에서 시작 되는 역관은 부처님의 ‘출가’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십이연기의 진수를 접하고
십이연기는 심오합니다.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십이연기가 심오하다고 말하면서도 그 뜻을 알겠다고 말하자 부처님은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나무라는 장면이 있습니다. 십이연기의 가르침은 너무나 심오해서 삼장에 통달했거나 법을 증득한 자가 아니면 설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 합니다.
십이연기를 처음으로 접한 것은 2009년 한국명상원에서 입니다. 그때 당시 묘원법사가 마하시사야도의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를 교재로 하여 일년 넘게 법문했습니다. 처음으로 접한 사야도의 법문집을 보고 십이연기의 진수를 접했습니다. 주로 니까야와 아비담마, 청정도론, 주석서를 근거로 하여 법문해 놓은 것을 모아서 책으로 발간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
사야도의 법문집을 보고 법문의 깊이를 느꼈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경전에 근거한 법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위빠사나 수행을 겸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은 심오하지만 잘 읽고 잘 사유하면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애는 태어남(再生)의 근본 원인을 이룹니다. 이러한 이유로 부처님께서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원인으로 갈애를 지목하셨습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내생의 삶을 말씀하신 처음 법문에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러한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고 주장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멸론(斷滅論, 웃체다 와다, uccheda-vāda)과 결부시키려 하는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아무튼 대단히 잘못된 시도라고 해야겠습니다. 사실 팔정도를 계발하지 못하거나, 했더라도 완전하지 않아서 갈애가 있는 한, 갈애는 새로운 생의 원인을 계속해서 만들 것입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제5장)
법문집을 보면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하시사야도가 미얀마에서 법문 했던 때가 50년대와 60년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육칠십년 전에도 오로지 ‘현존(現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을 겁니다. 미래에도 있을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오로지 현존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부처님도 ‘지금 여기’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지금 살아 있는 삶속에서만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현존만 주장하는 자들은 단멸론자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설령 팔정도 등을 닦더라도 완전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현실의 삶에만 집착하는 ‘갈애’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런 모습을 오늘날 한국에서 이중표교수와 그의 사상을 물려 받은 사람들에게서 봅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
우동필님은 이중표교수의 제자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중표교수가 재직중에 있는 전남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논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동필님은 논문 ‘역관의 십이연기’ 서문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역관의 방향이 은폐되면 십이연기를 이해하는 조건이 제한된다. 순관(順觀)의 방향만이 남게 될 때, 십이연기는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 해석되고, 순관과 역관이 무방향적으로 이해될 때, 십이연기는 상관·상의설(相關·相依說)로 해석된다.”
(우동필님, 역관의 십이연기)
우동필님은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중표교수가 부정하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볼 수 있습니다. 부정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서 십이연기 역관을 들고 있습니다. 역관에는 무명으로부터 시작 되는 환멸문이 있고, 노사로부터 시작 되는 역관이 있는데, 십이연기에 대하여 환멸문으로 했을 때 삼세양중인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칠불이 의문 했던 것처럼 노사에서부터 시작되는 역관으로 십이연기를 해석해야 바른 것이라 합니다.
십이연기 환멸문을 보면
불자들은 십이연기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하여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처음부터 근본가르침을 설하지 않았습니다. 차제설법이라 하여 보시이야기, 지계이야기 등 쉬운 가르침부터 차츰 심오한 가르침으로 순차적으로 법을 설했습니다.
십이연기를 처음 대했을 때 무명으로 시작 되어 노사로 끝나는 이른바 십이연기 순관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접하다 보니 노사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라는 내용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무노사’라 하여 노사라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는 단어가 줄이어 나오는 것입니다. 더구나 조건 발생적 연기에 대하여 각 단계별로 그 의미를 분명히 설해 놓아서 부처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십이연기에서 순관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역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사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에서부터 시작되는 환멸문입니다. 이런 구조에 대하여 매우 놀라웠습니다. 무명으로부터 시작 되는 순관에서 노사까지 끝나면, 역관은 당연히 노사에서부터 거꾸로 올라가야 하나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참고로 십이연기 유전문과 환멸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십이연기 유전문)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
(십이연기 환멸문)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고,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 모든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한다.”(Vin.I.2)
율장대품에는 부처님이 깨달은 순간이 잘 표현 되어 있습니다. 그 절정이 십이연기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유전문과 환멸문에서 시작 되는 순서가 무명으로부터 시적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병렬구조라 합니다.
병렬구조의 환멸문 비판
유전문과 병렬구조로 된 환멸문은 율장대품뿐만 아니라 정형구로서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역관이 아니라 환멸문으로 된 것은 깨달은 순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 했을 때, 즉 보살이었을 때는 노사에서부터 역관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동필님은 병렬구조의 환멸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환멸문이란 “무명멸(無明滅)부터 노사멸”까지를 관찰하는 흐름인데, 역관이 환멸문처럼 이해되면 노사에서 출발하는 방향은 은폐되는 것이다. 하지만 환멸문은 붓다의 성도(聖道) 시기이고, 노사에서 출발한 역관은 붓다의 출가(出嫁) 시기인데, 역사적 시각에서 어떻게 붓다의 성도와 붓다의 출가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가?”
(우동필님, 역관의 십이연기)
우동필님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유전문과 환멸문이 병행구조일 때 성도와 출가가 동일한 것이 되어 모순이라는 지적입니다. 이런 주장이 어느 정도 일리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삼세양중인과를 무력화고 현존하는 삶에서 십이연기를 해석하려는 시도라면 분명 의도가 개입된 ‘갈애’라 볼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무명에서부터 시작 되는 환멸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율장대품에서의 깨달음의 순간도 환멸문이고, 니까야 십이연기 정형구도 환멸문입니다. 다만 부처님이 보살이었을 때, 과거칠불에 대한 경을 보면 노사에서부터 시작되는 역관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살이었을 때 역관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보살이 깨닫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생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이 “왜 사는가?”라며 의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성도 순간에는 “무명이 남김 없이 사라져~”로 시작 되는 환멸문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허동필님은 ‘역관의 방향이 은폐되면 십이연기를 이해하는 조건이 제한된다’고 말하면서, 마치 태클 걸듯이 “순관(順觀)의 방향만이 남게 될 때, 십이연기는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로 해석되고”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기 위하여 십이연기 역관을 거론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중도체계로 설명하는 십이연기
이중표교수의 제자라 볼 수 있는 우동필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목적은 ‘삼세양중인과 부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현존하는 삶의 과정으로 보는 십이연기 재해석입니다. 이에 대하여 서문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 과정은 역관(←노사)의 방향에서 ‘유(有), 생(生), 노사’와 유·무중도, ‘갈애(渴愛), 취(取)’와 일·이중도. ‘수(受)’와 고·락중도, ‘식(識), 명색(名色), 육처(六處), 촉(觸)’과 자작·타작중도, ‘무명, 행(行)’과 단·상중도의 관련성을 해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중도와 십이연기가 통합적인 체계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십이연기가 존재, 심신, 가치, 인식의 문제에 관한 철학적 해명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줄 것이다.”
(우동필님, 역관의 십이연기)
우동필님이 말하고 싶은 것은 십이연기에 대하여 중도체계로 설명해야 함을 말합니다. 이는 논장에서 말하는 삼세양중인과라는 전통적인 해석방식에 대한 비판입니다.
허우필님의 서문에서 참으로 놀라운 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철학적 해명’이라는 말입니다. 십이연기를 중도체계로서 이해 했을 때 그것은 철학이라 합니다. 이는 종교로서 불교가 아니라 철학으로서 불교를 말합니다. 이중표교수와 그의 제자들은 불교를 종교가 아니라 철학으로 격하시킨 것입니다.
불교가 으뜸 가르침(宗敎)임에도
불자들은 불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수승한 종교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불교보다 더 나은 종교가 있다면 거기로 옮겨 가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현존하는 삶에서 삶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불교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용수의 중론사상에 맞추어 새롭게 해석한 불교를 말합니다. 이중표교수가 대표적입니다.
이중표 교수의 유튜브강연을 거의 다 보았습니다. 거의 일년에 걸쳐서 틈나는 대로 들었습니다. 한결 같이 주장하는 것은 ‘삼세양중인과의 부정’입니다. 동시에 ‘논장을 부정’합니다. 또 ‘윤회를 부정’합니다.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논장을 부정해야 자신의 중도체계가 성립되고, 윤회를 부정해야 삼세양중인과가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이중표교수를 따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로 제자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승불교의 범일스님, 테라와다의 해피스님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범일스님은 윤회를 인정합니다. 다만 부분적으로 이론을 채용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테라와다 교단의 해피스님은 전폭적으로 받아 들입니다. 해피스님이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을 보면 이중표교수의 주장과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불교가 ‘으뜸 가르침(宗敎)’임에도 이중표 교수의 이론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불교를 한낱 철학으로 격하하는 것 같습니다.
해피스님의 ‘삶의 메커니즘’
해피스님이 올린 동영상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리고 카페에 올린 글도 유심히 살펴 보았습니다. 해피스님은 가르침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이 있듯이, 필요한 경만 인용하여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해피스님은 “삶의 중심을 꿰는 것으로의 십이연기”라 합니다. 이를 ‘삶의 메커니즘’이라 하여 ‘삶속에서 십이연기’로 해석합니다.
해피스님은 테라와다교단 소속의 빅쿠이면서도 논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1차 결집의 경장과 논장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다 보니 니까야만 읽고서 나름대로 가르침을 해석합니다. 여기에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이 이중표교수의 중도체계에 대한 이론 입니다.
해피스님은 드러난 현상만 이야기합니다. 그러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대상이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욕계로 구성되어 윤회하는 사람에게 중생의 삶 즉 고가 생겨나는 삶의 과정[사성제의 고집성제]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중이고 곧 십이연기라는 해석입니다.” (해피스님) 라고 말합니다. 윤회의 진실 세미나에서 한 말입니다.
해피스님은 욕계가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를 설하였음에도 색계와 무색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초기경에서 무수하게 등장하는 육도윤회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는 가르침을 부분적으로 적용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더구나 십이연기를 ‘삶의 과정’이라 설명했는데 이는 삼세에 걸친 양중인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로지 현세에 대한 것만 말합니다.
순간윤회는 인정하지만
마하시사야도는 초전법륜전 법문집에서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고 주장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고소멸’만 이야기하는 것이 좋은 예일 것입니다.
만일 부처님이 고소멸에 따른 현세의 가르침만 이야기 했다면 단멸론으로 귀결 될 것입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소멸은 물론 윤회의 종식에 대한 가르침도 펼쳤습니다. 그럼에도 드러난 것이 아니라 하여 고소멸에 대한 것만 이야기 한다면 가르침을 제데로 전달한 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이중표교수는 윤회를 부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습니다. 중론에 따른 중도체계에서는 모든 개념이 부정됩니다. 그래서 이중표교수는 십이연기에 대하여 ‘중생의 망상구조를 깨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중론에서 말하는 ‘개념 타파’입니다. 이는 대승불교와 맥을 같이 합니다. 그래서일까 이중표교수는 대승불교에 대하여 근본불교를 계승한 것이라 말합니다. 그대신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장은 가르침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폐기의 대상이라 합니다. 이런 주장에 해피스님도 동조한 듯 합니다. 이는 윤회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윤회에 대하여 매순간 변화 하는 것으로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순간윤회’를 말합니다. 그러나 일생윤회는 말하지 않습니다. 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오로지 지금 여기서 이 몸과 마음이 살아 있을 때 삶의 과정에서 전개 되는 것이 윤회라 합니다. 이처럼 순간 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마하시사야도의 지적대로 오로지 현세적 삶에 대한 것만 집착 했을 때 이는 갈애가 강화된 것이기 때문에 결코 해탈할 수도 윤회에서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라 합니다.
불교를 철학으로 격하시킨 이중표교수와 해피스님
불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수승한 종교입니다. 과거에 위빳시붓다를 비롯하여 과거불이 출현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그것은 정법이 오래 지속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과거 불이 출현한 것은 정법이 변질되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만일 정법이 계속 유지 되었다면 과거불이 출현하지 않았을 겁니다.
고따마붓다의 정법도 언젠가 사라질 것입니다. 가르침이 변질 되어 전혀 다른 불교가 되었을 때 정법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중표교수의 중론에 따른 십이연기 해석도 정법도 변질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를 테라와다 빅쿠는 열심히 따르고 있습니다.
이중표교수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해피스님의 설법을 보면 공통적으로 불교를 철학으로 격하시켰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으뜸 가르침인 불교를 세속적인 철학으로 격하시킨 것과 같습니다. 마하시 사야도 말한대로 “세존께서는 오직 금생만을 가르치셨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2016-12-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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