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장을 인정하지 않는 테라와다 빅쿠
“해피법당에서 1600년 만에”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해피법당 해피스님이 말한 내용입니다. 해피스님은 유튜브동영상강좌에서 “해피법당에서 1600년 만에 심행의 방향을 되돌림으로써 이런 삶의 방향이야기를 설명낸거죠”(마음특강2015-5주차) 라 했습니다. 한국에 불교가 도래한지 1600년 만에 제대로 된 불교를 해피법당에서 해낸 것이라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해피법당 홈페이지라 볼 수 있는 ‘한국테라와다불교 근본경전연구회-해피법당’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카페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카페에 이런 글도 있습니다. 해피스님은 니까야로 푸는 니까야를 설명하면서 “붓다고사 스님 이래 1600년 동안 감춰졌던 가르침의 진정에 접근한 쾌거” (2016-03-28)라 했습니다. 듣기에 붓다고사를 넘어 선 것 같습니다. 삼장에 통달하고 청정도론을 편역한 5세기 스리랑카의 위대한 주석가 붓다고사의 주석에 오류가 있음을 말합니다. 해피법당을 법인화 하는 후원보시 계좌 안내 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내용입니다.
논장이 빠진 불교
해피스님은 ‘삶의 메커니즘 규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이연기를 바르게 해석한 것이라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십이연기 해석이 잘못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경전대로 수행하기라 하여 팔정도 수행지도를 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해피스님의 근본경전연구회는 2600년 전 부처님이 살아 계시던 그 때의 가르침으로 완전하게 닿기 위해 설립한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인지 1차 결집본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장과 율장을 말합니다. 여기에 논장이 보이지 않습니다. 흔히 빠알리 삼장이라 하면, 율장, 경장, 논장을 말하는데 논장을 빼 버린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법인과 선원건립
해피스님은 불교가 도래한지 1600년 만에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런 가르침을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근본경전연구회를 법인화 작업을 하고 있는 자본금을 모집한다고 공고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선원건립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원부지 제공 등 특별한 형태의 보시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살아서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공덕행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진정을 되살리고 실천하기 위한 토대가 되는 불사(佛事)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2016-04-24) 라 하여 모연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해피스님은 불사에 참여하면 큰 공덕이 있을 것이라 합니다.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해피스님이 1600년 만에 발견한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요?
1600년 만에 발견한 것은?
해피스님은 십이연기와 오온, 십이처를 다시 해석했습니다. 특히 십이연기에서 식과 관련하여 “상과 수가 심을 형성하는 작용이다. 요거 오랜세월을 ‘심의 작용이 상과 수다’라고 거꾸로 해석하는 것 때문에” (마음특강2015-5주차) 라 했습니다. 붓다고사 이래 논장에서 식과 수와 상과의 관계를 거꾸로 해석한 것이라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해피스님에 따르면 기존 십이연기 해석방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삼세양중인과방식을 말합니다. 또 식이 앞서고 마음부수가 따라 가는 형태를 비판하는 것이라 봅니다. 해피스님에 따르면 마음이 선구가 아니라 합니다. 수와 상이 심(마음)을 형성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동영상강좌를 보면 ‘내입처, 외입처, 새끼쳐진 식’으로 설명하면서, “몸통은 누적된 식이 의라는 마음의 몸통이에요”라거나 “새끼쳐진 식이 함께 하는 것으로 느낌이 온다.”라거나, “식에 바톤을 넘겨준다”라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식이 먼저 이끄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끼쳐진 식이 자기활동을 통해서 몸집을 부풀렸다.”(29분52초) 라고 설명합니다.
해피스님은 기존 논장의 십이연기 해석방식을 전면 부정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 방법을 설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논장에서]거꾸로 해석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삶의 이야기를 풀어 내지 못했었죠”라 말합니다. 십이연기가 거꾸로 해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설함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해피법당에서 1600년 만에 심행의 방향을 되돌렸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와 같은 진정한 가르침을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법인화 작업이 필요하고 선원도 만들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따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선발주자의 단점이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부정해야만 따라 잡을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가 흥기 했을 때 부파불교를 비판했습니다. 그때 당시 최대 부파인 설일체유부의 유론에 대하여 중론으로 파사현정한 이가 용수입니다. 이런 방식은 오늘날도 유효합니다.
해피스님은 테라와다에 전승된 빠알리 삼장에서 논장을 문제삼았습니다. 그것도 테라와다빅쿠인 ‘뿐냐디빠’라는 법명을 가진 해피스님이 문제삼은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더구나 붓다고사가 잘못 해석한 것이라 비판하며 논장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한국테라와다교단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해피스님은 매주 올리는 수 많은 동영상에서 ‘삶의 메커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십이연기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1600년 만에 해석한 것을 보면 “상과 수가 심을 형성하는 작용이다”라든가, “새끼쳐진 식이 자기활동을 통해서 몸집을 부풀렸다”라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논장에서 십이연기 해석방식을 전면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전 것을 부정해야 발판이 마련 되리라 봅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중표교수가 한 말입니다.
이중표교수 말하기를
이중표 교수는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중표 교수의 ‘십이연기설- 십이연기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에 따르면 “십이연기를 태생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이해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합니다. 또한 이중표 교수는 식과 관련하여 “십이연기의 식, 명색, 육입, 촉, 수의 연기 관계를 볼 때 의식이 시간적으로 먼저 존재하고, 그 의식에서 명색이 나오고, 명색에서 육입이 나오고, 육입에서 촉이 나오고, 촉에서 수가 나온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식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명색, 육입 등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해피스님도 “심의 작용이 상과 수다라고 거꾸로 해석하는 것 때문에”라 하여 이중표 교수가 말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어떤 관계이길래
이중표 교수의 글을 보면 “식의 증장을 통해 명색이 구성되고, 명색을 통해 식이 증장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말은 해피스님이 “새끼쳐진 식이 자기활동을 통해서 몸집을 부풀렸다”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지난 12월 3일 윤회의 진실 세미나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날 세미나에서 해피스님은 이중표교수를 소개했습니다. 해피스님은 “교수님 쓰신 책 몇 권을 제가 아주 열심히 공부했고 크게 도움 받았는데, 참 영광입니다. 이중표교수님 오늘 자리 해 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해피스님이 이중표 교수의 사상에 크게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이중표교수나 해피스님이나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불교’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근본불교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1차 결집본’입니다. 경장과 율장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논장이 빠진 것입니다. 논장은 아소까대왕 당시 3차 결집으로 빠알삼장형태로 갖추어집니다.
경장과 율장을 근간으로 하는 근본불교에서는 논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부파불교시대의 산물로 보는 것입니다. 용수의 중론에 의해 파사현정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에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부파불교시대가 시작 되기 이전에 3차 결집으로 빠알리삼장이 완성되어 스리랑카를 거쳐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중표 교수는 근본불교를 전공하는 학자라 합니다. 당연히 논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수 많은 이중표 교수의 동영상을 들어 보았습니다. 동영상을 보면 아비담마 논장에 대하여 ‘소설 썼다’든가 ‘거짓’이라는 식으로 폄하고 하고 있습니다. 또 십이연기의 가장 핵심이론인 ‘삼세양중인과’ 역시 ‘터무니 없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제지간인가?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십이연기는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생물학적 십이연기가 아니라 삶속의 십이연기를 말합니다. 이는 해피스님이 말하는 ‘삶의 메커니즘’과 일맥상통합니다. 이중표 교수는 대인연경(D14)를 예를 들어 식에 대하여 “식의 증장을 통해 명색이 구성되고, 명색을 통해 식이 증장한다는 오온의 연기성을 비유한 것”이라 설명합니다. 이는 식연명색과 명색연식에 대한 것입니다.
전통적인 주석에 따르면 식은 ‘재생연결식’을 설명하는 것이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문장을 읽어 보아도 주석가들의 견해가 타당합니다. 그럼에도 식에 대하여‘증장하는 식(이중표)’이라느니 ‘새끼친 식(해피스님)’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기 위함입니다.
해피스님은 이중표식 십이연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비담마 논장에서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중표식 십이연기에 감명 받은 해피스님은 ‘삶의 메커니즘’이라는 명칭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중표교수와 해피스님은 스승과 제지 사이 같아 보입니다.
해피스님이 이중표교수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근본불교라 하여, 논장을 배격하고, 십이연기를 기존방식과 달리 설명하고 이습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에 출가한 테라와다빅쿠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담마상가니가 발간에 대하여
해피스님은 삼세양중인과, 아비담마, 재생연결식과 같은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좋은 예가 있습니다. 금년 봄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담마상가니가 발간되었습니다. 서문에 “아비담마가 없으면 초기불교는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 ‘앗타살리니’의 초지일관한 태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해피스님은 “애매합니다. 앗타살리니는 초지일관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니까야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아비담마에 의지하지 않고도 초기불교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근본경전연구회-해피법당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지요.”라 했습니다. 아비담마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일체 논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해피스님이 논장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해피스님은 카페 글에서 “저는 아비담마에 의지하지 않고도 초기불교를 부처님에게 되돌리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진행중에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상당히 자신감 넘치는 말입니다. 아비담마는 부처님이 아니면 설할 수 없는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라 하는데 이를 깡그리 무시하는 말입니다. 더구나 붓다고사 등의 기라성 같은 주석가들의 견해를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비담마가 없으면 초기불교는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 ‘앗타살리니’의 초지일관한 태도”라는 말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해피스님은 “앗타살리니는 초지일관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니까야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논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테라와다 빅쿠라 말하면서도 아비담마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해피스님은 카페글에서 “저는 아비담마에 의지하지 않고도 초기불교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아비담마 논장에 의지 하지 않고 경장에 있는 쓰여 있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밝혀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알고 보니 이중표교수의 사상 그대로입니다.
재생연결식에 대한 입장은?
논장을 인정하지 않는 해피스님의 재생연결식에 대한 입장은 어떤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카페 검색창에 키워드 검색결과 “재생연결식이나 몸 없는 존재 등 우리 법회의 공부 기준 밖의 주장들에 대해서는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 했습니다. 논장을 고려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재생연결식이나 몸 없는 존재 등 우리 법회의 공부 기준 밖의 주장들에 대해서는 제가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라 했습니다. 이는 어느 테라와다빅쿠가 재생연결식과 색계, 무색계 존재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한 것입니다.
해피스님의 답변에서 주목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몸 없는 존재에 대한 것입니다. 몸 없는 존재란 ‘무색계’의 존재를 말합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욕계, 색계, 무색계 이렇게 삼계에 대하여 설하였습니다. 여기서 무색계는 몸이 없는 존재, 즉 정신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해피스님은 몸 없는 존제, 즉 무색계 존재는 다루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초기경전 모두를 수용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필요한 것만 수용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태도는 이중표 교수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이중표교수는 디가니까야, 맛지마니까야를 출간 했습니다. 그러나 정선한 것입니다. 필요한 경들만 뽑아 놓은 것입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는데 도움이 되는 경 위주라 볼 수 있습니다. 이중표 교수나 해피스님에게 있어서 논장은 없습니다. 색계나 무색계의 존재는 재생연결식으로만 설명이 가능한데, 몸 없는 존재를 다루지 않는다 하니 재생연결식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로지 오온만을 대상으로
해피스님은 재생연결식, 몸 없는 존재 등을 다루지 않습니다. 오로지 몸 가진 존재에 대해서만 이야기 합니다. 이는 이중표 교수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십이연기에서 식과 명색의 관계를 오온을 가진 존재로 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몸 없는 존재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당연히 재생연결식도 없고 바왕가도 없습니다. 아비담마 논장의 백미라 볼 수 있는 인식과정 17단계도 없습니다.
해피스님은 논장을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오로지 니까야로만 풀어 가겠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이중표교수의 박사논문에 큰 영향을 받은 듯 합니다. 아함경과 중론으로 중도의 가르침을 설명해 놓은 것을 말하니다. 어떻게 보면 해피스님은 이중표교수의 사상을 전파하는 충실한 제자라 볼 수 있습니다.
나마-루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해피스님은 일체 논장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해피스님은 십이연기의 식에 대하여 “재생연결식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끼워놓은 불필요한 설명에 의한 오류”라 합니다. 이는 삼세양중인과의 부정입니다. 그 대신 이중표식 해석방식을 도입합니다. 식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대인연경은 윈냐나와 루빠의 서로 조건 되는 관계를 정의하고, 이 관계에 의해 윤회[지속적으로 존재]하게 되고, 금생이 존재하게 된다고 합니다. 마음[식-윈냐나]과 몸[명색-나마루빠]이 서로 조건 지어진 가운데 윤회하는 삶의 현실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재생연결식으로서의 윈냐나와 금생의 자기존재로서의 나마루빠로 십이연기를 이해하는 것은 가르침의 진정에서 벗어나는 왜곡된 이해라는 점은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해피스님, 201-02-07)
해피스님은 재생연결식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고 왜곡된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중표식 십이연기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글에서 해피스님은 식과 명색의 서로 조건지어져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nāma 즉 [작의 → 촉 → 수-상-사]는 '식(識)의 머묾[bhava-유(有)]'으로 이어집니다”라 합니다. 또한 “nāma 즉 의미 부여의 결과 의미 부여된 대로의 대상[nāmarūpa]을 아는 앎[viññāṇa]이 중생세간인 삼계(三界)에 머무는 것”이라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요? 이중표교수의 유튜브동영상을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그것은 명색에 대하여 정신-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으로 보는 것입니다. 나마-루빠라는 것이 ‘이름 지어진 것(나마:名)’이고 ‘형태를 갖춘 것(루빠:色)’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보는 논장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우파니샤드의 해석에 따른 것이라 합니다.
한국최초라고
십이연기에서 명색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보는 것은 획기적인 방식입니다. 이중표교수가 자신의 저작물은 물론 강연할 때 마다 주장하는 것입니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보는 것이 진정한 부처님 가르침이라 합니다.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연기법이 심오하다고 했을 때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런 것을 자신이 한국최초로 알아낸 것처럼 말하고 다닙니다. 여기에 해피스님도 한몫 거들어 1600년만의 진실한 가르침이라 하는가 하면 붓다고사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이중표교수가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려면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이 아닌 이름-형태로 바꿀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야 삶속에서 십이연기에 대해 설명이 가능하고 또한 해피스님의 ‘삶의 메커니즘’이라는 설명도 성립됩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이중표 교수와 해피스님 모두 한국에서 처음으로 알아낸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말하고 다닙니다. 그 결과 논장은 모두 부정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불교는 모두 잘못된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삼세양중인과로 설명되는 아비달마불교의 폐해를 이야기 합니다.
“12연기는 중생의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이중표교수가 새롭게 해석한 십이연기는 절대 삼세양중인과가 될 수 없습니다. 식과 명색의 관계를 현존하는 오온으로만 파악하고, 특히 명색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파악했을 때 이중표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12연기는 중생의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지 삼세에 걸쳐서 윤회하는 모습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이중표교수, 십이연기설- 십이연기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
이중표 교수의 십이연기는 명쾌합니다. 십이연기에 대하여 중생의 망상에 일어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망상’이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망상은 ‘빠빤짜’를 말합니다. 희론이라고도 합니다.
이중표교수는 왜 망상이라 했을까요? 그것은 명백합니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해석 했기 때문입니다. 우파니샤드 철학에 따르면 만물은 브라흐마의 분신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이름이 붙여져 있고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개념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을 용수는 중론으로 부수었습니다. 따라서 이중표교수가 해석하는 십이연기는 용수의 중론으로 부순 것입니다.
용수는 중론으로 모든 개념 지어진 것을 부수었습니다. 이중표 교수는 용수의 중론을 근본불교 경전과 결합하여 중도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십이연기에서 나마-루빠는 논장에서 말하는 정신-물질이 아니라, ‘명칭-형태’가 되었습니다. 이름 붙여지고 개념화 된 것입니다. 이렇게 개념화 되면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중표 교수는 자신이 해석한 십이연기에 대하여 “중생의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에 삼세양중인과가 있을 수 없고, 재생연결식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윤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을 해피스님이 고스란히 이어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식(識)이 윤회한다고
해피스님은 윤회에 대하여 인정합니다. 다만 식이 윤회한다고 합니다. 이는 ‘자양분의 경(S12.11)’을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체 문장의 구조를 보면, 위 경전은 오히려 식이 윤회한다는 결정적인 증거'식'이 윤회한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경이기도 하다.”라 했습니다. 그런데 자양분의 경에서 네 가지 자양분에 대한 것은 이중표교수가 이중표식 십이연기와 오온을 설명하기 위하여 즐겨 사용하는 경이라는 사실입니다.
논장을 수용하면, 삼세양중인과를 받아 들이면 재생연결식과 바왕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중표식 십이연기를 받아 들임에 따라 식이 윤회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아뜨만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삶의 과정에서 쌓이고 쌓은 오염원에 오염된 식이 윤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윤회에 반드시 몸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온이 있어야 윤회함을 말합니다.
해피스님은 식의 윤회를 주장합니다.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식작용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삼계이니, 재생연결식, 바왕가, 삼세양중인과, 인식과정 17단계 등 논장의 가르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단순하게 삶의 과정에서 조건발생하는 식이 윤회한다는 주장이 과연 테라와다의 가르침일까요? 몸이 없는 무색계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논장의 반의 반도 안되는 설명입니다. 온전히 설명하려면 아미담마 논장에 따른 재생연결식, 바왕가, 삼세양중인과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어떤 견해차이길래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필명 호잔님과 해피스님에 대한 것입니다. 인터넷논객 호잔님은 ‘해피법당에 대한 참회’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러나 경전에 대한 해석 또는 이해의 일부에 대해서는 단지 해피스님과 그 해석 또는 이해가 서로 다른 것이며, 저의 경전에 대한 이해 또는 해석에 대한 것은 저의 견해로 그대로 유지하고자 합니다.”라 했습니다.
호잔님과 해피스님 사이에 견해차가 있었던 같습니다. 해피스님의 글이나 강연을 들어 보면 당연히 나올수 있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호잔님은 해피스님의 지적을 받아 올린 글을 모두 삭제 하고 참회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경전에 대한 이해 또는 해석에 대한 것은 저의 견해로 그대로 유지하고자 합니다.”라 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해피스님의 경전에 대한 해석이 테라와다불교의 범주를 넘어선 것으로 봅니다.
해피스님은 테라와다 빅쿠 맞나요?
해피스님과 일면식도 없습니다. 다만 오래 전에 언론 매체에 소개된 스님의 딱한 소식을 듣고 보시금을 정기적으로 낸 바 있습니다. 최근 해피스님의 활동을 보면 보기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버려야겠다는 마음 까지 버리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빅쿠가 세상사에 너무 깊숙히 개입하는 것 같습니다. 결혼식 주례를 서고 선원건립 보시금을 모연하는 것등이 테라와다빅쿠로서 가능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늦은 나이에 출가한 스님은 출가한지 2년 만에 해피법당을 만들어 인터넷에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테라와다 불교와 어긋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가장 큰 것으로 논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빠알리 삼장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데 논장을 부정하다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런 행위가 테라와다 교단에서 용인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해피스님은 테라와다 불교국가에 가서 좀 더 수행하며 나중에 수행이 무르익었을 때 법을 펼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국내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논장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빠알리 삼장에 근거하여 수행하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에 갈 수 없는 처지라 봅니다. 이는 이중표식 불교에 매몰 됐기 때문이라 봅니다. 해피스님이 테라와다 빅쿠라면 당연히 빠알리 삼장에 근거한 수행과 법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논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테라와다 빅쿠라 볼 수 있을까요?
201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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