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철학화는 불교의 퇴보
정선 디가니까야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이 도착했습니다. 책의 이름은 ‘디가니까야’입니다. 편저자는 이중표교수입니다. 그런데 책이 매우 얄팍합니다. 420페이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일까 책의 제목이 ‘정선 디가니까야’입니다.
디가니까야는 모두 34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님역은 단권으로 1,500여 페이지에 이릅니다.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스님역은 세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중표교수의 ‘정선 디가니까야’는 12경에 지나지 않고, 각주도 거의 없어서 얄팍합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이중표 교수의 ‘정선 디가니까야’를 열어 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서문’부터 보았습니다. 서문에 가장 눈이 띄는 단어는 ‘철학적’이라는 말입니다. 서문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필자의 번역은 철학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아비달마 주석에 의존하는 번역이나 종교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번역과 차이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근본불교에 대한 철학적 연구에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정선 디가니까야 해제, 이중표교수)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철학적 관점에서 번역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중표 교수는 각종 강연에서 종교적 관점에서 말합니다.
유튜브 강좌를 통하여
이중표 교수의 강좌를 유튜브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이중표 교수의 연기법’ ‘이중표 불교란 무엇인가’ ‘이중표 중론’ ‘이중표 교수의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등 수 많은 강좌를 틈나는 대로 보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보고 느낀 점에 대하여 1)‘공부가 안되면 그곳을 떠나라, 이중표교수의 불교강좌를 듣고(2016-01-03)’ 2)‘나마루빠(Namarupa) 이름-형태인가 정신-물질인가? 이중표교수 중론(中論)강연을 듣고(2016-01-23)’ 3)‘이중표교수는 왜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할까?(2016-09-1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속지 말라고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철학적 관점에서 가르침을 해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강연에서는 아비달마 불교에 대하여 매우 거칠게 비방합니다. 아마 용수의 중론이 부파불교에 대한 파사현정을 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이중표 교수의 논문이나 저작물이 아함경과 중론에 입각하여 중도체계로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인지 모릅니다. 특히 삼세양중인과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이중표 교수는 논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근본불교라 하여 1차 결집본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논장은 후대 논사들이 만들어낸 이론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강연에서 “그래가지고 ‘부모 태를 빌어 낳겠지’ 이렇게 생각해가지고 삼세 양중인과로 그러면 12연기가 윤회설이 되. 되가지고 막 부모가, 거기는 나오지도 않은 이야기를 막 무명 때문에 부모님이 같이 잠자리를 해 가지고 식이 모태에 들어가지고 성장해가지고 나와서 삼세양중인과로 삼세가 벌어졌다고 이런 이야기를 해 버리잖아요. 불경 어디를 봐도 그런 이야기는 없어. 니까야에는. 그런 이야기는 없는데 뒤에 사람들이 설명해. 그래 가지고 또 제법 그럴 듯 하니까 여러분 들이 속아 인제.” (이중표교수의 연기법 2강(존재의 실상 01)) 라 말합니다. 삼세양중인과를 믿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십이연기에 대하여 생물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 합니다. 그래서 ‘속지 말라’고 합니다.
이중표 교수의 독설은 계속 됩니다. 유튜브 강연을 들어 보면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 하기 위해 기존 논장의 가르침을 전면 부정합니다. 논장이 부정 되어야 자신의 이론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이중표 교수는 강연에서 “제가 참고서만 읽다가 이론서만 읽다가 불경을 직접 읽으면서 느낀 것은 ‘왜 이렇게 부처님 말씀 하고 불교를 설명한 학자들이나 아비달마 이야기는 이렇게 앞뒤가 안맞냐’ 내가 의지해야 될 것은 누구겠어요? 경이잖아요, 경. 그래서 나는 경전을 더 중요시 하잖아요. 그때부터 딴 사람을 못 믿기 시작했어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해 버리니까. 경을 읽다 보니까 경전만 치중해야 겠다 생각했지요.” (이중표교수의 연기법 3강(존재와 생사 02))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논서를 읽다 보니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뿐이라 합니다. 그 이후로 오로지 경전만 읽고서 자신의 방식대로 가르침을 해석했음을 말합니다.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나
이중표 교수는 ‘정선 디가니까야’에서 분명하게 철학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중표 교수의 이론이나 주장이 종교적 관점에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이중표 교수의 이론을 추종하는 자들은 이를 종교적 영역으로 다루려고 합니다. 그 결과 ‘삶의 메커니즘’이니 ‘마음의 메커니즘’이니 하면서 오로지 현실적 삶에서만 가르침을 설명하려 합니다.
오로지 현실의 삶만 강조하는 불교에서는 ‘드러난 것만 본다’든가, ‘와서 보라’라 하여 눈으로 확인 가능한 것만 말하는 듯합니다. 따라서 내생과 윤회를 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세존께서는 현실의 가르침만 설하였지 내생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생, 윤회, 재생연결식, 삼세양중인과와 같은 논장의 가르침은 황당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듯이, 초기경전도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는 것 같습니다.
코끼리 뒷다리 만지기
가르침에 대하여 오로지 철학적 관점으로 본다면 일부만 보는 것과 같습니다. 코끼리의 부분만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만 보고서 전체를 다 본 것처럼 판단 하는 것입니다. 마치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가 길을 인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다나에 코끼리 비유가 있습니다. 외도들이 논쟁하는 것에 대하여 선천적 봉사인 자들이 꼬끼리 만지기 식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교의 유행자들은 눈이 멀었고 눈이 없어서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므로 ‘이러한 것이 진리이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이 진리이다.’라고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면서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 (Ud6.4) 라 했습니다.
일부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이는 것만 보고 “이것이 불교다”라 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한족 관점만 보고서 서로 말다툼 한다면, 진리를 아는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눈먼 자들이 코끼리 만지기식 일 것입니다. 그래서 “봉사들이 줄을 선 것과 같이 앞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합니다.”(M95) 라 했습니다. 아마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를 따라는 장님들의 행렬과 같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중표 교수가 보는 철학적 관점의 불교는 어떤 것일까요?
번역했다고 하지만
정선 디가니까야는 이중표교수가 편역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중표 교수가 빠알리원문을 직역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는 해제에서 “니까야 번역을 위해 애쓰신 전재성 박사와 각묵스님의 노고의 결실인 이 책들의 거치를 필자는 누구보다 높이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새로운 번역을 하게 된 것은 기존의 번역에 필자의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에서이다.”라 했습니다. 기존 두 종류의 번역서를 기반으로 하여 개작(改作)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기존 번역물에 대하여 “내용이 쉽게 이해되지 않음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가르침에 대하여 철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수용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보다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개작을 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하여 “필자의 힘을 보태고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루빠(rūpa)에 대하여
이중표 교수는 개작을 하면서 대체 무엇을 주장하고자 했을까? 그 단초를 제공하는 단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문과경(D2) 각주에서 ‘루빠(rūpa)’에 대하여 ‘형태’라고 번역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 했습니다.
“색으로 한역되는 ‘rūpa’를 우리말로 ‘물질’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는 아비달마불교에서 색과 심을 구분하여, 색을 물질적인 것, 심을 정신적으로 규정한 데서 기인한다. 근본불교에서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분법적 구별이 없다. 색은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형태적 요소를 의미할 뿐, 물질적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정선 디가니까야 53번 각주, 이중표교수)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루빠에 대하여 물질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했습니다. 사실 이중표 교수의 철학적 해석인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는 대인연경(D15)에서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규정하는 것으로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나마-루빠의 정의를 보면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근본불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차 결집된 4부 니까야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근본불교에서는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상윳따니까야에 ‘분별의 경(Vibhaṅgasutta, S12.2)’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나마-루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해 놓았습니다.
Katamañca bhikkhave nāmarūpaṃ? 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 idaṃ vuccati nāmaṃ. Cattāro ca mahābhūtā, catunnaṃ ca mahābhūtānaṃ upādāyarūpaṃ, idaṃ vuccati rūpaṃ. Iti idañca nāmaṃ, idañca rūpaṃ, idaṃ vuccati bhikkhave, nāmarūpaṃ.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명색이란 무엇인가? 그것에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 있으니 이것을 명이라고 부르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고 한다.”
(분별의 경-Vibhaṅgasutta, 상윳따니까야 S1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임을 명백히 정의해 놓았습니다. 아마 후대 사람들이 이름-형태로 오해할 것 같아 미리 못박아 둔 듯한 느낌입니다. 부처님은 나마에 대하여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라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또 루빠에 대하여 지수화풍사대와 그와 파생된 물질이라고 하여 물질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중표 교수가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형태라 칭하는 것은 가르침을 용수의 중론의 논리를 적용하여 중도로 해석하기 위함으로 보여집니다. 나마-루빠가 단지 언어적으로 표현되고 개념화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이름-형태로 의도적으로 번역한 것으로 봅니다.
기존 이론을 부정하고 부수어야
이중표 교수는 해제에서 기존의 두 번역서에 대하여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을 해야 겠다는 생각에서 두 분이 이룩한 성과에 필자의 힘을 보태고자 감히 나섰다.”라고 했습니다. 개작한 이유에 대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번역’을 했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한마디로 ‘기존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역을 바로 잡겠다’는 뜻으로 완곡하게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부위가 잘못 되었을까요? 이에 대하여 대인연경을 들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은 연기법입니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니다나상윳따(S12)’라 해서 9품 93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밖에 연기의 가르침은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디가니까야에도 연기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대인연경(D15)’이라 합니다.
이중표교수는 각종 저작물과 각종강좌에서 대인연경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특히 십이연기와 관련하여 ‘명색’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십이연기를 재해석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명색이라 불리우는 나마-루빠에 대하여 어떻게 개념 짓느냐에 따르면 십이연기해석이 180도 달라집니다.
이중표교수는 강연에서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이 나마-루빠입니다. 나마-루빠는 물질-정신이 아니라 이름-형태임을 가장 먼저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언하지 않으면 십이연기를 중도체계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시에 기존 해석방식인 물질-정신에 대하여 아비달마 불교라 하여 맹비난합니다. 자신의 세운 이론이 정당화 되기 위해서는 기존 이론을 부정하고 부수어야 하는 논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강연할 때 마다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고 윤회를 부정합니다.
명색에 대한 번역을 보면
이중표 교수는 대인연경에서 명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 했습니다.
“Nāmarūpapaccayā phass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nāmarūpapaccayā phasso: yehi ānanda ākārehi yehi liṅgehi yehi nimittehi yehi uddesehi nāmakāyassa paññatti hoti, tesu ākāresu tesu liṅgesu tesu nimittesu tesu uddesesu asati api nu kho rūpakāye adhivacanasamphasso paññāyethāti”
“아난다여,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명색(名色)이라는 조건(緣) 때문에 촉(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기호(記號)들에 의해서, 특징(特徵)들에 의해서, 모습들에 의해서, 지시들에 의해서 개념체계가 성립된다. 그 기호들이, 그 특징들이, 그 모습(相)들이, 그 지시(指示)들이 없을 때, 개념체계(槪念體系)속에서 명칭(名稱)의 접촉(接觸)이 있을 수 있겠느냐?”
(대인연경, 디가니까야 D15, 이중표님역)
참고로 전재성님의 번역과 각묵스님의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난다여, ‘명색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명색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어떠한 형태에 의해서 특징에 의해서 인상에 의해서 표시에 의해서 명[정신]의 몸(정신적인 몸)이 시설되는데, 그러한 형태나 특징이나 인상이나 표시가 없이도 색[물질]의 몸(물질적인 몸)에 명칭과의 접촉이 시설될 수 있는가?”(D15, 전재성님역)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名色緣觸]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정신-물질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는 이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여기 [느낌, 인식, 상카라들, 알음알이]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에 의해서 정신의 무리[名身]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러나 만약 이런 각각의 성질들이나 특징들이나 표상들이나 개요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물질의 무리[色身]에서 이름붙이기를 통해 생기는 정신의 감각접촉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D15, 각묵스님역)
전재성님은 나마-루빠에 대하여 ‘명색’이라 번역했고, 각묵스님은 ‘정신-물질’이라 번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나마는 수-상-행과 같은 정신을 지칭한 것이고, 루빠는 사대로 이루어진 물질을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이중표교수는 한자용어와 한자어를 병기하여 현학적으로 번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요?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중표님역에서 중요한 단어가 ‘개념체계(槪念體系)’입니다. 이는 빠알리어 ‘nāma-kāya’에 대한 것입니다. 이중표식의 매우 독특한 번역입니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nāma-kāya’의 번역. 중아함경의 대인연경에서는 명신(名身)으로 번역함. 아비달마 논서에서 명신(nāma- kāya)을 정신으로, 색신(rūpa- kaya)를 몸으로 이해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정선 디가니까야 63번 각주, 이중표님)
이중표 교수는 명색에 대하여 정신-물질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잘못’이라 합니다. 이렇게 잘못된 것이라고 먼저 선언해 놓아야 자신의 이론이 정당화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마-루빠를 정신-물질로 보면 왜 잘못일까요? 이어지는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래 명(nāma)은 이름이나 개념을 의미하고, 색(rūpa)은 형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개념과 형태로 인식하게 되는데 이것을 명색이라 하는 것이다.”
(정선 디가니까야 63번 각주, 이중표님)
이중표 교수는 나마와 루빠에 대하여 새롭게 개념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본래”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대체 본래는 어떤 의미일까요?
이중표 교수는 명색에 대하여 고대 인도 우파시냐드 철학을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세상만물은 브라만이 현현한 것으로 모두 ‘이름’과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마-루빠라 합니다. 이것이 “본래”의 의미입니다. 더욱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책상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책상을 인식할 때, 책상이라는 개념과 형태로 인식한다. 다시 말해서 책상의 형태로 지각되는 것을 책상의 개념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책상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책상을 인식할 수 없다.”
(정선 디가니까야 63번 각주, 이중표님)
이중표 교수가 보는 나마-루빠는 인식론적 개념입니다. 이름이 부여 되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름 지어지지 않았다면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책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책상의 형태가 지각되지 않으면 책상을 인식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식은 개념과 형태라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의식에 개념들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의식 속에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개념들이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들의 체계가 ‘nāma-kāya’이다.”
(정선 디가니까야 63번 각주, 이중표님)
이중표 교수는 기존 논장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마-루빠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물질-정신이 아닌 ‘개념(이름 또는 명칭)-형태’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론적 방식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대상은 실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만들어낸 ‘분별의 작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본래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이중표 교수는 참으로 놀라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전통적인십이연기해석 방식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대상은 실제가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낸 개념이라 합니다. 이는 께왓다경(D11)’해제에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대는 외계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을 기반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본래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께왓다경 해제, 이중표님)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본래 ‘일체유심조’라 합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유식론’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의 핵심이라 합니다.
이중표 교수의 강좌를 들어 보면 아비달마불교, 부파불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용수가 중론으로 파사현정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비달마불교는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고 불자들은 그런 가르침에 속고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 대승의 가르침이야말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잘 드러난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 등의 강좌를 통해서 근본불교로 대승불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중표교수의 삼세양중인과 비판
이중표 교수는 두 번역서를 ‘개작’했습니다. ‘알기 쉽게 보탠다’라 했는데 이는 개작을 의미하고, 또 한편으로 오역을 바로 잡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나마-루빠’에 대하여 전통적 해석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개념(이름)-형태’라고 바꾸었습니다. 그 결과 십이연기를 전혀 다른 각도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십이연기를 태생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이해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합니다. 삼세양중인과에 대하여 사람이 육체를 중심으로 해서 태어나서 죽는 과정으로 간주하고, 이를 태생학적 연기관이라 비판한 것입니다.
이중표 교수가 생각하는 십이연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12연기는 중생의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지 삼세에 걸쳐서 윤회하는 모습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 “사후에 다음에 태어나는 윤회가 아니라 명칭, 언어, 개념상의 생사이며 윤회이다.”라거나, “중생들이 자아를 언어와 명칭으로 개념화해 일정 시간 동일 하게 존재하는 것, 즉 유로 생각함으로써 생사에 빠져 든다는 것을 12연기로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이와 같은 바탕에는 용수의 중론에 기반한 것입니다. 모든 개념 지어진 것을 타파 하는 중론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해석한 것입니다. 그 결과 논장의 가르침은 모두 부정됩니다. 다만 ‘일체유심조’ 등과 같은 대승불교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라 주장합니다.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분을 보고서 전체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가 코끼리 뒷다리 만지기식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이론을 합리화 하기 위해 개작한 것은 가르침을 크게 왜곡하는 것이라 봅니다. 나마-루빠가 ‘분별의 경(S12.2)’에서 분명히 정신-물질로 정의 되어 있음에도 근거도 없이 개념(이름)-형태로 개작 한 것은 가르침을 훼손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수 많은 개작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식이라는 조건 때문에 명색이 있다라고 이야기 했는데, 아난다여, 다음과 같은 식이라는 조건 때문에 명색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식이라는 모태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명색이 모태에서 강화될 수 있겠느냐?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Tadānanda iminā 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Viññāṇaṃ 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ṃ na 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ṃ mātukucchismiṃ samuccissathāti"?)”(D15, 이중표님역) 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각주 했습니다.
“‘viññāṇaṃ mātukucchismiṃ na okkamissatha’를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viññāṇaṃ’을 주어로 보면 ‘식이 모태에 들어 가지 않으면’으로 번역되고, ‘mātukucchismiṃ’과 동격인 목적격으로 보면 ‘식이라는 모태에 들어 가지 않으면’으로 번역된다. 지금까지 대부분 주격으로 보고 식이 입태하여 명색이 형성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식이 입태하여 몸(色)과 정신(名)이 형성된다고 태생학적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
(정선 디가니까야 73번 각주, 이중표님)
이중표 교수는 해석방법을 달리 했습니다. 그것은 십이연기가 삼세양중인과로 전개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봅니다. 전통적인 해석방법은 “만약 의식이 모태에 들지 않더라도 명색이 모태에 응결될 수 있겠는가”(D15, 전재성님역) 라든가, “알음알이가 모태에 들지 않았는데도 정신-물질이 모태에서 발전하겠는가?”(D15, 각묵스님역) 입니다. 식을 주어로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재생연결식에 따른 명색이 형성되는 과정을 말한 것입니다. 더구나 경에서는 모두 세 두 번 더 확인 합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난다여, 의식이 모태에 들었으나 빗나갔다면, 그래도 명색이 이러한 상태로 태어날 수 있겠는가?”(D15, 전재성님역)
“아난다여, 식이라는 모태에 들어가서 타락한다면, 명색은 이와 같은 상태로 될 수 있겠느냐?”(D15, 이중표님역)
(2)
“아닌다여, 의식이 갓난아이나 어린 남아나 어린 여아일 때에 단절되었다면, 명색이 성장하고 증장하고 성숙할 수 있겠는가?” (D15, 전재성님역)
“아난다여, 소년이나 소녀의 어린 식이 절단된다면, 명색이 자라나고 성장하여 완전해 질 수 있겠느냐?” (D15, 이중표님역)
부처님은 경에서 세 번에 걸쳐 의식과 모태와 명색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이는 의식이 ‘재생연결식’임을 말하는 명백한 증거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중표 교수는 식을 주어로 내세우지 않고 “식이라는 모태에 들어가서”라는 식으로 번역합니다. 이는 식이 재생연결식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개작으로 봅니다.
아뢰야식이 명색의 모태라고
이중표 교수는 나마-루빠에 대하여 개념(이름)-형태로 개작하여 큰 물줄기를 형성했습니다. 십이연기가 삼세양중인과가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번뇌망상에 대한 것이라는 큰 물꼬를 튼 것입니다. 그럼에도 모태라는 말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각주에서 식이 입태하여 몸과 정신이 형성된다고 태생학적으로 해석한 것은 잘못이라 하며 자신이 주장하는 개념(이름)-형태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여기에서는 식이 명색의 모태가 되고, 식은 명색에 의지하는 상호의존관계에서 모든 개념이 형성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유식학의 아뢰야식은 식을 명색의 모태로 보는 이러한 관점이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선 디가니까야 73번 각주, 이중표님)
식과 명색이 상호의존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종 니까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도시의 경(S12.65)’을 들 수 있습니다. 경에서는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S12.65)라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식과 명색이 상호 번갈아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ññāṇa)’이라 합니다. 그럼에도 이중표 교수는 식과 명색의 관계에 대하여 대승불교 유식학의 아뢰야식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는 ‘식의 성장’이라는 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봅니다.
상윳따니까야 ‘의도의 경(S12.39)에 따르면 “그 의식이 지속되고 성장하면 명색이 전개된다.”(S12.39)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식의 성장을 아롸야식 개념으로 보는 것 것 같습니다. 이런 개념은 께왓다경 해제에서 “사대는 외계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을 기반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본래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불교를 철학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불교는 한낱 세속적 철학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교의 근간이라 볼 수 있는 윤회가 빠진 불교는 사실상 불교라 볼 수 없습니다. 삼세양중인과에 대하여 생물학적 윤회라 하여 배척하고, 초기경전에 등장하지 않는 우파니샤드철학을 이용하여 나마-루빠에 대하여 개념-형태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후대 이런 상황을 우려 해서인지 부처님은 ‘분별의 경(S12.2)’에서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이라고 분명히 사전적 정의를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인연의 큰 경(D15)’에서는 식과 명색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모태’라는 말을 세 번이나 언급했습니다. 후대 개작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로 보여집니다.
이중표 교수가 해석하는 철학적 불교는 중론과 유식학에 기반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큰 물줄기는 일체유심조와 아뢰야식입니다. 여기에 가장 첫 번째 물꼬가 바로 나마-루빠를 ‘개념(이름)-형태’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전혀 다른 불교가 되었습니다. 이중표 교수가 정선 디가니까야 해제에서 “철학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라 한 것처럼 불교를 철학의 수준으로 격하시켜 버린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불교를 철학으로 만들어버렸다.”라고.
불교의 퇴보
부처님은 괴로움의 소멸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소멸 뿐만 아니라 윤회의 종식에 대해서도 설했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은 일상적 삶에서 끊임 없이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 됩니다. 느낌이 갈애로 전개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출발점입니다. 거시적으로는 무명의 타파입니다. 사성제와 십이연기를 이해하고 팔정도를 실천해야 가능합니다.
이중표 교수는 오로지 ‘드러난 것’이라든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대상으로 하여 중론의 논리를 적용하여 중도체계로 불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로지 현세에서 고소멸에 대해서만 말할 뿐 삼세에 걸친 윤회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불교를 철학의 수준으로 격하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중표교수는 중론의 논리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하여 중도체계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위험성도 있습니다. 한국불교에서 중관학의 권위자 김성철 교수는 용수의 중론을 사상체계로 삼았을 때 그 위험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 했습니다.
“중관논리, 공의 논리는 사상이 아니고 테크닉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게 구사나 유식 같은 이런 교리는 다 사상이죠. 내용이 있죠. 세계관이 있고, 체계가 있는데 중관사상은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부수어 버리는 방법만 알려줄 뿐이지 테크닉이기 때문에 테크닉에서 나온 결론들을 인생관으로 삼고 세계관으로 삼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냐하면 결론은 퇴보를 하게 됩니다.”
(김성철교수, 중론11강, 3:23)
중관학의 권위자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중론은 사상이 아니라 테크닉에 불과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상체계 또는 신념체계로 삼아 가르침을 재단하려 했을 때 그 폐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철학화 입니다. 종교로서 불교가 아니라 철학으로서 불교로 격하 시켜 버린 것입니다. 테크닉에 불과한 중론으로 가르침을 해석했을 때 그것은 한마디로 ‘불교의 퇴보’라 보는 것입니다.
2016-12-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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