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마의 기원은 부처님, 담마상가니(法集論)에서
해피법당에서는
아비담마 칠론에 ‘담마상가니’가 있습니다. 한역으로 ‘법집론(法集論)’이라 합니다. 최근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우리말로 번역된 담마상가니에 대하여 해피법당 해피스님은 자신의 카페에서 “생뚱맞게 ‘담마상가니’의 주석서에 토를 단다”고 하면서 서문을 읽은 소감을 적어 놓았습니다.
“애매합니다. 앗탓살리니는 초지일관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니까야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아비담마에 의지하지 않고도 초기불교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근본경전연구회-해피법당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지요.”
(해피스님, 2016-06-18)
한국 테라와다교단 소속 빅쿠인 해피스님은 담마상가니 출간에 대하여 한편으로 환영하면서 또 한편으로 비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비담마가 없으면 초기불교는 무너진다.”라는 말에 자극 받았을 것입니다.
해피스님은 해피법당 법문에서 근본경전만을 공부한다고 했습니다. 1차 결집본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논장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테라와다불교가 빠알리삼장이라 하여 율장, 경장, 논장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아비담마 비난하는 불선업 짓지 말기를
담마상가니를 인터넷으로 주문했습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2016년 5월 초판된 이 논서는 1권과 2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권 600페이지에 달합니다. 빠알리 논장을 구성하는 아비담마 7론 중에서 가장 첫 번째 언급되는 법집론을 말합니다.
담마상가니 서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서문을 보니 무려 133페이지에 걸친 해제가 있습니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 그리고 주석서를 중요시 여기는 초기불전연구원의 역작이라 보여집니다. 오랜 기간 번역을 한 각묵스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담마상가니 해제는 주석서 ‘앗타살리니’에서 설명된 것을 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점은 아비담마가 부처님 직설인가에 대해서입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행복을 실현할 것인가,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경장을 봐야 한다. 다른 관점과 다른 관심을 가지고 괜히 아비담마를 비난하는 불선업을 지어서서는 곤란하다.”
(각묵스님, 담마상가니 해제)
각묵스님은 아비담마를 비난하는 불선업을 짓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범주에 해피스님도 해당될 것입니다. 그리고 해피스님의 사상에 영향을 준 이중표 교수도 해당될 것입니다. 특히 이중표 교수는 아비달마 불교에 대하여 맹비난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왜곡하는 거짓논서라 하는가 하면 자신이 니까야를 읽고 새로 해석한 불교가 진정한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주장합니다.
율장에 근거가 있는데
아비담마가 부처님 직설인 이유에 대하여 담마상가니 해제에서는 율장과 논장에서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담마상가니 주석서 앗타살리니에서는 율장에 아비담마가 부처님의 직설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있다고 합니다. 각묵스님은 이를 이렇게 옮겨 놓았습니다.
“담마상가니 주석서는 “비방할 의도가 없이 ‘도반은 경이나 게송이나 아비담마를 [먼저] 배우고 나중에 율을 배우시오.’라고 하는 것은 범계가 아니다.”(Vin.ii.144) 라는 단타죄편 442절에 나타나는 항목을 인용한다.”
(각묵스님, 담마상가니 해제)
담마상가니 주석서에서는 아비담마가 부처님 직설인 것에 대하여 율장을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해제에 언급된 ‘Vin.ii.144’를 찾아 보았습니다. 찾아 보니 ‘율장비구계’에 있습니다. 최근 발행된 전재성님 번역 율장비구계 1654페이지에 있습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방하고자 의도하지 않고 ‘자, 경전이나 게송이나 논서를 배우고 나중에 계율을 배우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와 정신이 착란된 자이거나, 초범자인 경우는 무죄이다.”
(율장비구계 Vin.II.144, 5.8.2 속죄법 제72조, 1654p, 전재성님역)
이는 ‘율장을 나중에 배우겠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경계의 가르침입니다. 경장과 논장을 먼저 배우고 율장은 나중에 배우거나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비구들은 ‘속죄죄’를 짓는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속죄죄는 빠알리어로 ‘Pācittiya’라 하는데 ‘應懺悔償罪的, 波逸提, 單墮, 心堕’의 뜻입니다. 학습계율을 어기면 속죄해야 하기 때문에 속죄죄라 합니다. 속죄죄 중에서도 단순속죄죄를 ‘단타’라 합니다.
율장 인연담을 보면
단타죄는 불필요한 망어나 악구, 기타 가벼운 죄를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율장을 보면 정신착란자나 초범자가 율장을 가볍게 어기는 말을 하는 경우에 대하여 무죄라 했습니다. 그러나 의도를 가지고 율장을 비방하는 경우 참회해야 하는 속죄죄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이러한 죄목이 설정되었을까요?
부처님은 여러 가지 법문으로 계율을 설하고 계율을 찬탄 했습니다. 특히 계율과 관련하여 우빨리존자를 찬탄 했습니다. 수행승들은 우빨리 존자에게 계율을 배우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여섯 무리의 비구들이 있었습니다. 한역으로 ‘육군비구(六群比丘)’라 합니다. 육군비구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율장 인연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섯 무리의 수행승들]
“벗들이여, 지금 다수의 수행승들, 장로들과 신참들과 중진들이 우빨리에게서 계율을 배우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계율에 통달하면, 그들이 원할 때, 그들이 원하는 만큼, 우리를 잡아 당기기도 하고 돌려 끌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계율을 비방합시다.”
(율장비구계 Vin.II.143 , 5.8.2 속죄법 제72조, 1651p, 전재성님역)
육군비구라 하면 못된 짓을 일삼는 스님들의 대명사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무리를 지어 다니며 악행을 일삼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꼭 여섯 명씩 무리를 지어 다닌다고 하여 ‘여섯 무리의 수행승들(육군비구)’라 합니다.
육군비구들은 수행승들이 율장을 아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율장을 알면 자신들의 행동에 제약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스님들이 율장공부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율장을 설하지도 않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또한 율장을 ‘금서’ 취급하고 있습니다. 재가자들이 보아서는 안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마치 부처님 당시 육군비구들이 율장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봅니다.
율장에 논서(아비담마)가 등장
육군비구들은 수행승들이 우빨리존자라부터 율장 배우는 것을 경계 했습니다. 심지어 방해 하기까지 했습니다. 율장을 알게 되면 자신들의 행동에 제약이 될 것이 눈에 보듯 선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율을 비방합시다.”라고 적극적으로 방해공작을 펼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부처님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육군비구들을 모아 놓고 “그대들이 계율에 대하여 비방한 것이 사실인가?”라며 묻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견책합니다.
[세존]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적절치 않고, 자연스럽지 않고, 알맞지 않고, 수행자의 삶이 아니고, 부당하고, 해서는 안될 일을 행한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어찌 그대들이 계율에 대하여 비방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것은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청정한 믿음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를 더욱더 청정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오히려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불신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 가운데 어떤 자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율장비구계 Vin.II.143 , 5.8.2 속죄법 제72조, 1651p,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육군비구들을 견책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학습계율을 만들었습니다.
[세존]
“어떠한 수행승이든 의무계율을 송출할 때에 이와 같이 ‘이러한 사소한 학습계율은 의혹과 고뇌와 혼란만을 야기시키는데, 그것들을 송출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말하여 학습계율을 비방한다면, 속죄죄를 범하는 것이다.”
(율장비구계 Vin.II.143 , 5.8.2 속죄법 제72조, 1651p,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육군비구들이 율장을 비방하는 것에 대하여 속죄죄를 범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가르침을 비방하면 악작죄, 즉 나쁜 죄를 짓는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가르침은 경장이나 율장뿐만 아니라 논장도 해당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전이나 게송이나 논서를 배우고 나중에 계율을 배우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자는 악작죄에 해당되며 이를 속죄죄로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율장에 따르면 경장과 율장과 논서가 모두 동등하게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율장에서 논서가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빠알리 삼장이 3차 결집때 완성된 것이긴 하지만 부처님 당시에도 논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강력하게 증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중표 교수나 해피스님은 근본불교라 하여 1차 결집된 것만 인정하며 논장을 배제 하고 있습니다. 논장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 후대 제자들이 경장을 해석한 것으로 후대 성립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나 율장에서는 분명하게 논서(아비담마)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경장에도 등장하는 아비담마논장
율장에 논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abhidhamma: 이것은 논장까지의 삼장이 성립하기 전에 가르침에 대한 분석을 뜻하는 것일 수 있다.”(율장비구계, 1346번각주)라고 했습니다. 또한 주석을 인용하여 “Smp.990에 따르면, 정신신체적인 과정(名色)에 대한 분별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것은 논장을 염두에 둔 해석이다.”라고 각주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율장비구니계(Vin.II.344) 에서도 나타납니다.
율장에는 아비담마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담마상가니 주석서에 따르면 “이정도만으로도 이설을 말하는 자는 논박되었다.”(DhsA.29) 라고 강조 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비담마논장은 이미 율장의 계목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후대 제자들에 의해 해석되거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라 합니다.
담마상가니에 따르면 아비담마 논장은 부처님의 ‘직설’이라 합니다. 경장과 율장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것이듯이, 똑같이 아비담마도 부처님이 직접설한 가르침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증거는 율장에 이미 계목으로도 언급되어 있고 또한 경장에서도 증거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경장의 경우 맛지마니까야 ‘고씽가 법문의 큰 경(Mahāgosiṅgasuttaṃ, M32)가 대표적이라 합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Idhāvuso sāriputta dve bhikkhū abhidhammakathaṃ kathenti. Te aññamaññaṃ pañhaṃ pucchanti. Aññamaññassa pañhaṃ puṭṭhā vissajjenti no ca saṃsādenti. Dhammī ca nesaṃ kathā pavattanī hoti. Evarūpena kho āvuso sāriputta bhikkhunā gosiṅgasālavanaṃ sobheyyā
“도반 사리뿟따여, 여기 두 비구가 있어 아비담마에 대한 논의를 하는데, 그들은 서로에게 질문을 하고 각자 받은 질문에 대답하여 그칠 줄을 모르고 그들의 대화는 법에 근거하여 계속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이런 비구가 고싱가살라 숲을 빛나게 합니다.”(초불연, M32, 대림스님역)
경을 보면 “아비담마에 대한 논의를 하는데(abhidhammakathaṃ kathenti)”라는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빠알리어 ‘아비담마(abhidhamma)’라는 말이 보입니다. 초불연에서는 원어그대로 ‘아비담마’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 그리고 주석서를 중시하는 초불연에서는 당연한 번역이라 봅니다.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더 높은 법에 대한 논의를 옮긴 것이다.”(40번각주) 라 했습니다. 이는 abhidhamma라는 말의 어원적 풀이에 대한 것입니다.
왜 아비담마(abhidhamma)인가
빠알리어 abhidhamma는 ‘abhi+dhamma’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접두어 ‘abhi’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향하여, 대하여(towards, against)” 뜻이고, 또 하나는 “위에(oner, don top of)”이라는 뜻입니다. 전자로 사용하면 아비담마는 “법에 대하여(對法)”가 되고, 후자를 사용하면 “더 높은 법(勝法)”이 됩니다. 경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비담마는 최상승법이라 하여 ‘더 높은 법’이라고 주석되어 있습니다.
전재성님은 경의 문구에 언급된 “abhidhammakathaṃ kathenti”에 대하여 “더욱 높은 가르침에 대하여 논의하고”라 번역했습니다. 초불연에서 아비담마라 한한 것 대조됩니다. 아비담마에 대하여 ‘더욱 높은 가르침’이라 번역한 것은 최상승법을 우리말로 풀어 번역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했습니다.
abhidhammakathaṃ kathenti: 여기서 ‘더욱 높은 가르침’은 아비담마(abhidhamma)를 번역한 것인데, 니까야보다 후대에 성립된 교리에 대한 아비달마 즉 논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르침에 대하여’란 뜻이므로 가르침에 대한 구조적이고 분석적인 이해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성전협 604번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에 따르면 아비달마와 아비담마는 서로 다른 말이라 합니다. 아비달마는후대 부파불교의 논서를 일컫는 말이고, 아비담마는 부처님 당시부터 있는 논서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아비담마논장은 부처님 당시에도 제자들 사이에서 법에 대한 분석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법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작업이 있었다
빅쿠보디는 ‘abhidhamma’에 대하여 “on the higher Dhamma”라 번역했습니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bhidhamma. Though the word cannot refer here to the Pitaka of that name - obviously the product of a phase of Buddhist thought later than the Nikayas - it may well indicate a systematic and analytical approach to the doctrine that served as the original nucleus of the Abhidhamma Pitaka. In a careful study of the contexts in which the word “Abhidhamma” occurs in the Sutta Pitakas of several early recensions, the Japanese Pali scholar Fumimaro Watanabe concludes that the Buddha’s own disciples formed the conception of Abhidhamma as an elementary philosophical study that attempted to define, analyse, and classify dhammas and to explore their mutual relations. See his Philosophy and its Development in the Nikayas and Abhidhamma, pp. 34-36.
(MDB 362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에 따르면 아비담마에 대하여 니까야 보다 후대 성립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 문구가 경장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부처님 당시에도 법에 대하여 체계적인 분석작업이 있었던 것이라 합니다. 특히 일본불교학자 와타나베의 주장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여러 부파의 아비담마/아비달마 체계를 비교 연구한 후니마로 와타나베 교수도 아비담마는 니까야에 나타난 토론형식이 직접적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결론 내는 것처럼 아비담마 혹은 논장의 가르침은 튼튼한 뿌리를 두고 있다 하겠다. (Philosophy and its Development in the Nikayas and Abhidhamma, pp. 34-36 참조)”(초불연 40번 각주, 대림스님)라 했습니다. 빅쿠보디의 각주와 내용이 동일합니다.
법을 잘 이해 하지 못했을 때
아비담마가 부처님 당시에 제자들에게 알려져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부처님들만이 설할 수 있는 심오한 가르침에 대하여 서로 토론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Pps.II.256에 따르면, ‘가르침을 논의할 수 없는 자는 가르침을 논의하면서 이것이 자신의 말이고 이것이 타인의 말인 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말을 설한다고 하고서는 남의 말을 하고 남의 말을 설할 것이다’고 하고는 자신의 말을 설하며, 가르침 안에서 거짓을 행한다. 가르침을 논의할 수 있는 자는 자신의 말을 자신의 이론을 통해서, 남의 말을 남의 이론을 통해서 설하며, 가르침 안에서 거짓을 행하지 않는다.”(성전협 604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서 핵심적인 가르침은 “가르침 안에서 거짓을 행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법을 체계적이고 분석적으로 모르는 자는 거짓을 행할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법을 잘 이해 하지 못했을 때 거짓말을 하기 쉬움을 말합니다. 법에 대하여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앎이 있어야만 제대로 가르침을 이해 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고, 전승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가르침을 멋대로 해석하는 자들
오늘날 가르침에 대하여 멋대로 해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자신의 ‘깜냥(感量)’으로 재단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은 부처님 경지에서만 설할 수 있는 것이어서 이를 체계적이고 분석적 방법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잘못 이해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사띠 비구가 식이 윤회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르침에 대하여 ‘일체유심조’로 보거나 “부처님은 현실적인 삶에 대한 가르침만 펼치셨지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말씀 하지 않으셨다”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습니다.
법에 대하여 알면 가르침 안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비담마에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가르침에 대하여 자신이 경험한 것과 자신의 지식으로만 판단 했을 때 결국 자신의 말이 되어 버립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자신의 말을 설하며, 가르침 안에서 거짓을 행한다”라 했습니다. 오늘날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수 많은 법문들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법의 사령관 사리뿟따
부처님 제자 중에 사리뿟따에 대하여 법의 장군 또는 법의 사령관이라 합니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 바라문 셀라가 “그렇다면 누가 당신의 장군입니까?”(stn556)라고 물어 보는 것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위 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싸리뿟따가 따라서 굴립니다.”(stn557)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나다.
법의 사령관 사리뿟따는 목갈라나 존자 보다 더 늦게 깨달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의 분석적 앎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온에 대한 분석하고 사유함에 따라 신통제일 목갈라나 존자 보다 더 늦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리뿟따에 대하여 아비담마의 시초라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비담마의 가르침은 매우 심오해서 부처님들의 경지가 아니면 설할 수 없는 가장 수승한 경지라 합니다.
아비담마의 기원은 부처님
아비담마는 대기설법에 따른 경장과 달리 ‘직설’이라 합니다. 이는 듣는 사람의 근기에 대한 고려 없이 부처님들이 있는 그대로 법을 설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는 ‘비방편설’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담마상가니에 따르면 “이 아비담마는 일체지를 갖추신 부처님들의 영역이지 다른 자들의 영역이 아니다.”(DhsA.230) 라 합니다.
삼십삼천에서 아비담마를 설하는 부처님
사람들은 아비담마에 대하여 의문 내지 의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한계 내에서 가르침을 재단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식이 되어 버리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담마상가니에 따르면 아비담마는 부처님이 설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정한다면 가르침의 기원이 아난다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아난다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로 시작 되는 가르침을 설했을 때 아난다가 가르침을 설했다고 믿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비담마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법의 사령관 사리뿟따가 법을 분석하고 체계화 시켰다고 해서 아비담마가 사리뿟따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경장과 율장의 기원이 부처님이듯이, 마찬가지로 아비담마의 기원도 부처님입니다.
아비담마를 부정하는 자들
아비담마는 ‘제법실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는 근기 또는 방편설로 설한 경장과는 다른 것입니다. 듣는 자들의 근기의 고려 없이 비방편설로 있는 그대로 설한 것이 아비담마입니다. 그래서 아비담마는 부처님의 영역, 부처님의 일체지가 아니면 설할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이런 이유로 빠알리 삼장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습니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는 모두 동등합니다. 모두 부처님과 관련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율장과 경장과 논장은 모두 동등합니다.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과 관련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아비담마를 부정합니다.
담마상가니 서문에서 “만일 아비담마가 없으면 초기불교의 이러한 체계가 무너지고 만다.”라는 말에 대하여 해피스님은 “저는 아비담마에 의지하지 않고도 초기불교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일이 가능하다고”라 했습니다. 또 이중표교수는 유튜브 강좌에서 “니까야에는. 그런 이야기는 없는데 뒤에 사람들이 설명해. 그래 가지고 또 제법 그럴 듯 하니까 여러분 들이 속아 인제”라고 아비담마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담마상가니에서는 “아비담마를 비난하는 불선업을 지어서는 곤란하다.”라 했습니다. 그리고 “아비담마를 따돌리는 것은 이 승자의 [법의] 바퀴에 주먹을 날리는 것이고”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일체지자 부처님에게 주먹을 날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비담마 논장을 안다면
아비담마를 비난하고 아비담마에 의혹하는 자들은 불선업을 짓는 것과 같고 부처님을 욕보이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아미담마가 부처님의 직설이라는 여러 증거는 율장이나 경장에서 발견됩니다. 그럼에도 의문을 갖거나 부정하는 자들은 증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한계일 것입니다. 단지 자신들의 깜냥에 따른 개인적인 견해에 지날 뿐입니다.
빠알리 삼장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모두 동등합니다. 불법승 삼보가 동등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부처님, 가르침, 스님이라 하여 스님을 부처님과 동등한 위치로 올려 놓았습니다. 만일 빠알리 삼장에서 율장과 경장만을 인정하고 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개별적인 견해가 올라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즉, 빠알리 삼장에서 율장, 경장, 개인적인 견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아비담마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비담마 논장을 안다면 함부로 개인적인 견해를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아비담마 논장을 안다면 자신의 말을 설하거나 가르침 안에서 거짓을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르침을 논의할 수 없는 자는
가르침을 논의하면서
이것이 자신의 말이고
이것이 타인의 말인 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말을 설한다고 하고서는
남의 말을 하고 남의 말을 설할 것이다.” (Pps.II.256)
201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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