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고 있는 시대
만 시간의 법칙
만 시간의 법칙이 있습니다. 매일 같이 꾸준히 세 시간씩 십년을 투자하면 무슨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법칙을 말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만 시간을 투자하면 프로페셔널이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하루 세 시간씩 십년공부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십년공부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대학입시도 일종의 십년공부라 볼 수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6년과 초등학교 4년을 합하면 십년이 됩니다. 십년동안 집중하면 그 힘으로 바라는 대학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 가서 또 십년을 공부하면 피에치디(Ph.D)가 될 수 있습니다. 십년공부하면 이 세상에 못할 것이 없습니다. 소위 ‘든사람’에 해당되는 판사와 검사, 변호사도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든사람에 해당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한우물을 십년 파면 끝이 보이게끔 되어 있습니다. 만시간, 십년을 오로지 한길로 가면 끝장에 이릅니다. 그리고 강력한 힘이 생겨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무비스님의 서장강의에 ‘마음의 근육’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치 운동을 하면 ‘근력’이 생겨서 남보다 월등한 힘을 발휘할 수 있듯이, 수행을 하면 마음의 근육이 생겨서 ‘수행력’이 생겨남을 말합니다.
한가지 일을 오랫동안 하면 프로페셔널이 됩니다. 이는 다름 아닌 힘이 생겨남을 말합니다. 그 힘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 올 수 없습니다. 힘이 센 자들이기 때문에 대체로 그 힘을 인정해 줍니다. 이른바 ‘사’자 돌림의 사람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든사람이 아니더라도 ‘된사람’ 역시 힘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법상에 서는 자가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세상을 동사적으로 보라고
법문을 하거나 강연을 하는 사람들은 프로페셔널이자 동시에 힘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다고 모두 다 ‘바른 힘’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확산되고 있는 추세에서 예전 불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이중표 교수는 유튜브 강연에서 세상을 동사적으로 보아야 함을 주장합니다. 세상을 명사적으로 보면 바르게 보지 못함을 말합니다. ‘비가 온다’고 했을 때 비라는 명사는 바른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비는 내릴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명사적으로 보았을 때 ‘모순’이라 합니다. 삶도 죽음도 마찬가지라 합니다. 그래서“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세상을 명사적인 것이 아닌 동사적인 것입니다.”라 합니다. 이런 논리는 ‘중론’에 따른 것입니다.
세상을 동사적으로 보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언어와 문자가 이 세상의 원리를 잘 표현하지 못한다고 하여 그 개념을 무시한다면 가르침을 크게 왜곡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경이나 게송, 응승 등 구분교의 형태로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부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오로지 마음과 마음으로 뜻과 뜻으로 가르침을 전승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언어와 문자로 표현된 구분교의 가르침에 대하여 대기설 내지 방편설이라 하여 진실한 가르침이 아니라 합니다. 심지어 ‘분별한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생멸은 분별이다?
한사람의 교수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십년세월이 걸렸을 것입니다. 한사람의 법사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역시 십년 세월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한국불교에서 명법문으로 유명한 ‘종범스님’이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종범스님의 ‘인생공부와 마음공부’라는 법문을 보았습니다. 스님은 유명한 한문게송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이라는 게송에 대해 법문했습니다. 이 게송은 너무나 유명해서 제사할 때 빠짐 없이 독송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님은 이 게송에 대하여 매우 독특한 해석을 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분별’에 대한 것입니다. 스님에 따르면 게송에서 생멸에 대하여 “생멸은 분별이다. 이걸 가르치는게 불교에요”라 했습니다. 스님은 분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생각을 거두면 적멸인거에요”라며, 또한 “이게 마음공부거든요. 생각하는 놈이 뭔가 그걸 공부하는 거에요”라 합니다.
종범스님은 대한민국에서 법문잘하기로 잘 알려져 있는 스님입니다. 수행과 교학을 겸비한 존경받는 스님입니다. 그러나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 스님의 한계를 봅니다. 유튜브를 통하여 스님의 수 많은 법문을 모두 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범주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 많은 경전을 읽고 수 많은 법문을 하고 수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스님이지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법문을 들으면 한국불교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이중표교수의 강연과 종범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분별’에 대한 것입니다. 언어와 문자를 떠나 어떤 분별도 하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라 합니다.
이중표 교수는 근본불교를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일체 논장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1차 결집본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런데 강연을 들어 보면 ‘분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종범스님이 말하는 분별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 말씀 하셨는데, 부처님 말씀을 잘못 해석 해 왔으니까 문제가 생긴거에여. 제가 여러분에게 불경을 바로 읽는 법을 가르쳐 주는 거에요.” (이중표교수의 연기법 10강) 라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입니다. 부처님이 분별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나 자신 속에 있는 자기생각을 우리가 남김 없이 소멸할 때 우리게 고통이 소멸됩니다.”합니다.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부처님이 괴로움과 관련하여 사성제의 진리를 설하였음에도 부처님이 분별하지 말라는 식으로 가르침을 설했다고 합니다. 또 분별하지 않았을 때 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이라 합니다. 이런 개념에 대하여 자신이 처음 발견한 것이라 합니다.
십년공부를 하여 누구도 당해 낼 수 없는 힘이 생긴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으면 ‘사도’가 되어 버립니다. 부처님이 설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설한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엉뚱하게 남이 설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주석서에는 “가르침을 논의할 수 없는 자는 가르침을 논의하면서 이것이 자신의 말이고 이것이 타인의 말인 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말을 설한다고 하고서는 남의 말을 하고 남의 말을 설할 것이다.” (Pps.II.256)라 했습니다.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가르침에 대하여 분석적이고 체계적으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논장을 무시해서 생긴 결과라 봅니다. 이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했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설하는 법문이 되어 버리고, 또한 남의 이야기를 설한 법문이 되어 버립니다. 법문 중에 “분별하지 말라”가 좋은 예입니다.
이제 금강경에서 벗어나야
불교TV사이트를 보면 수 많은 불교강좌가 올려져 있습니다. 종영 된 것 까지 합하면 그 숫자가 백강좌가 넘습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 대한 강좌는 극히 드믑니다. 거의 대부분 대승불교 강좌에 대한 것입니다. 그중에 ‘금강경’에 대한 강좌가 가장 많습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이제 금강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스님들이 법문할 때 늘 인용하는 경전이 금강경입니다. 또한 반야심경, 화엄경, 법화경 등과 같은 대승경전입니다. 한국불교에서 ‘내노라’ 하는 스님들은 이제 초기경전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논장도 접하고 율장도 접해야 합니다. 빠알리 삼장을 접하지 않고서는 부처님 그분이 누구인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경지송 추모경송 게송을 보면
종범스님은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게송을 법문하면서, 이 게송이 제사할 때 필수적이라 했습니다. 테라와다에서도 역시 가신 님에 대한 추모를 할 때 필수적입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최근 발간한 예경지송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의 경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를 송출하오니
1.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견고하고
나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나의 삶은 죽음을 끝으로 하고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느니라.
2.
뭇삶은 행위의 소유자이고
행위의 상속자이고
행위를 모태로 삼는 자이고
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상속자이니라.
3.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하나니
‘내가 선을 지었다’라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하느니라.
4.
아! 머지않아 이 몸은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실로 땅 위에 눕혀질 것이니라.
5.
형성된 것들은 실로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지멸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이니라.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 예경지송, 전재성님역)
이 테라와다 추모게송을 보면 다섯 번째에 한문게송과 똑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입니다. 이 게송은 제사할 때 또는 장례식장에서 사용되는 필수게송이라 합니다.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이라는 한문게송은 사실 니까야에서 유래 된 것입니다. 니까야 도처에서 이 게송이 발견되는데 특히 상윳따니까야 ‘베뿔라산의 경(S15.20)’에 실려 있는 것이 유명합니다.
오리지널 버전은 빠알리니까야에
‘베풀라산의 경’에 따르면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윤회의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윤회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에 대하여 “일겁의 세월만 윤회하더라도 한 사람이 남겨 놓는 유골의 양은 그 더미가 큰 산과 같이 되리라고 위대한 선인께서는 말씀 하셨네.”(S15.10) 라 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윤회하면서 무덤만 증대시킨 것입니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이끌리면 윤회하게 됩니다. 윤회하고 유전하는 삶을 종식하려면 이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S12.20) 라 했습니다. 한문게송에서 말하는 제행무상입니다.
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모든 형성된 것은 견고하지 않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모든 형성된 것은 불안정하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S12.20) 라 했습니다.
그리고 게송으로 “띠바라 사람에게는 빠찌나방싸, 로히땃싸 사람에게는 방까까, 쑵삐야 사람에게는 쑤빳싸, 마가다 사람에게는 베뿔라라 불렀네.”(S12.20) 라며 게송을 읊습니다. 이 게송에 이어 부처님은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 생겨나고 또한 소멸하는 것, 그것을 그치는 것이 행복이네.(Aniccā vata saṅ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ṃ vūpasamo sukho ti)”(S12.20) 라는 그 유명한 게송을 읊습니다. 이 게송은 후대 동아시아에서 한문게송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라고 번역됩니다.
동아시아에서 애송되는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의 오리지널 버전은 빠알리니까야에 있습니다. 가공할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 나게 하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또한 이 빠알리 게송은 대승불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제사나 추모할 때 독송되는 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게송입니다.
예경지송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를 보면 모두 다섯 개의 게송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니까야 이곳 저곳에서 뽑아서 구성한 것입니다. 테라와다에서는 죽은 자를 추모할 때 이 다섯 편의 게송을 읊는다고 합니다. 그 중에 가장 핵심게송이 한문게송으로도 유명한 “형성된 것들은 실로 무상하여(諸行無常)”으로 시작 되는 다섯 번째 게송 입니다.
앞생멸과 뒷생멸은 어떻게 다른가?
종범스님은 이 시대의 대강백입니다. 수행의 힘과 교학으로 법문하는 동영상을 보면 인품이 느껴집니다. 아마 한국불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님중의 하나라 봅니다. 그러나 한계도 보입니다. 그것은 부처님 원음을 접하지 않은 것입니다. 한문게송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에 대하여 ‘분별하지 말자’라는 취지로 해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문게송에서는 생멸이 두 번 나옵니다. 그러나 앞생멸이 무엇을 뜻하고, 뒷생멸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똑같이 ‘生滅’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리지널 버전에서는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앞 생멸에 대한 것은 ‘uppādavaya’이고, 뒷생멸은 ‘Uppajjitvā nirujjhanti’ 에 대한 것입니다.
생멸에 대한 두 빠알리어는 뜻이 다릅니다. 앞생멸에 해당되는 ‘uppādavaya’는 ‘uppāda(rising)+vaya(loss)’의 뜻입니다. 게송에서는 ‘uppādavayadhamma’라 하여 한역으로 ‘생멸법’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자연의 법칙으로서의 생멸’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제행무상으로서의 생멸을 의미합니다.
한문게송 뒷생멸에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Uppajjitvā nirujjhanti’ 입니다. 여기서 Uppajjitvā는 uppajja의 형태로 ‘having been born’의 의미이기 때문에 ‘태어남’의 뜻입니다. 또 nirujjhanti는 nirujjhana 형태로 ‘ceasing’의 의미로 생명의 꺼짐, 즉 죽음을 의미합니다. 두 빠알리에 공통적으로 생명을 뜻하는 어근 ‘jīva’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뒷생멸에 해당되는 빠알리어는 ‘Uppajjitvā nirujjhanti’는 ‘오온에 대한 생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문게송 전송 ‘諸行無常 是生滅法’에서 생멸은 제행무상으로서의 생멸이고, 후송인 ‘生滅滅已 寂滅爲樂’에서 생멸은 오온으로서의 생멸입니다. 이는 오리지널 빠알리 게송을 분석하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이 무상함을 말씀 하시고 오온도 무상함을 말씀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무상하니(諸行無常),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네(是生滅法). 생겨나고 또한 소멸하는 것(生滅滅已), 그것을 그치는 것이 행복이네(寂滅爲樂)”라 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오온의 소멸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오온에 대한 집착에 있다고 하여 이를 ‘오취온(pañcupādānakkhandhā)’ 이라 했습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라 했습니다. 결국 ‘윤회의 종식’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이 상윳따니까야 베뿔라산의 경에서 무시무종의 가공할 윤회의 고통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궁극적으로 윤회의 종식에 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문게송에 대하여 오로지 “분별하지 말라”라는 식으로 법문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 봅니다. 이는 용수의 중론으로 해석한 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공부할 것도 닦을 것도
중론에 따르면 모든 언어와 문자를 개념화 된 것이라 하여 분별하는 것에서 벗어나자고 합니다. 이중표 교수는 이 중론의 이론을 근본경전에 접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뿌리는 ‘중론’에 있습니다. 모든 개념을 부수고 허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할 것도 닦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중관학의 권위자 김성철 교수는 테크닉에 불과한 중론을 사상체계나 믿음체계로 삼는다면 불교가 크게 후퇴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용수의 중론에 따른 이론으로 가르침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법문할 때 마다 “분별하지 말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분별론자(vibhajjavadin)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시스터메틱(Syatematic)하다고 합니다. 이는 가르침이 분석적이고 체계적임을 말합니다. 논장을 접하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분별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논장을 무시합니다. 언어와 문자로 전승된 가르침은 진실한 가르침이 아니라 합니다. 진실한 가르침은 마음과 마음으로, 뜻과 뜻으로 전승된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분별하지 말라”라는 말로 요약된 듯합니다.
종종 한국스님들 법문을 들어 보면 마음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분별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철저하게 분별하자고 했습니다. 오온에 대하여 분석적이고 체계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비담마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나 스님들은 아비담마에 대하여 부파불교시대의 산물로 보아 법을 실체화 했다고 비난하면서 “분별하지 말자”라고 강조합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에 대하여 분석적이고 체계적으로 설했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가르침에 대하여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분류하여 설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부처님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가르침 역시 체계적으로 설했습니다.
부처님은 분석적이고도 체계적인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바라문 청년이여, 그것에 대해 나는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 (Vibhajjavādo kho ahamettha māṇava)” (M99)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분별론자(vibhajjavadin)’임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이는 오온에 대한 분석입니다. 오온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세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如實知見)’위함입니다.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고 있는 시대
요즘 한국에는 갖가지 불교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 중에는 테라와다불교도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빠알리삼장에 의거하여 법문합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 테라와다 빜쿠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빠알리어와 함께 법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빤냐와로 삼장법사와 상가락끼따빅쿠가 대표적입니다. 반면 회색승복을 입은 법사스님들의 경우 한문을 읽고 이를 해석하는 식으로 법문합니다. 그러다 보니 유튜브에서는 두 가지 불교전통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한문게송을 운율에 맞게 읊고 또 한편에서는 독특한 빠알리게송 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불자들은 유튜브라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회색승복입은 스님의 한문법문과 검붉은 가사를 입은 빅쿠의 빠알리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자신에게 적합한지는 들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금강경을 넘어 또 다른 가르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입니다. 그토록 “분별하지 말라”하지만 부처님은 스스로 분별론자라 자처하며 가르침을 분석적이고 체계적으로 설했습니다.
2016-12-2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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