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여보, 왜 오늘 나의 손을 붙잡지 않습니까?” 담마딘나장로니 인연담

담마다사 이병욱 2017. 3. 20. 10:34

 

여보, 왜 오늘 나의 손을 붙잡지 않습니까?” 담마딘나장로니 인연담

 

 

부처님의 가르침은 평등합니다. 누구든지 가르침을 따르면 궁극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길에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출가자가 훨씬 더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가자도 길을 가다 보면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가자의 길은 어디까지일까요?

 

담마딘나비구니 이야기가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큰 경(M44)’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재가신자 비싸카와 교리문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라한 담마딘나가 재가신자 비싸카의 질문에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을 교리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담마딘나에 대하여 부처님은 비구니로서가르침을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dhammakathikāna agga)’이라 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담마딘나와 비싸카는 출가하기 전에 부부였다고 합니다. 남편인 비싸카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불환자가 되자 출가 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법구경 421번 게송의 인연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법구경 421번 게송의 인연담은 담마딘나가 출가하게 된 배경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똑 같은 인연담이 테리가타에서도 보입니다. 테리가타 12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이 그것입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는 5세기의 붓다고사와 6세기의 담마빨라가 편역한 것의 차이일 것입니다.

 

담마딘나장로니 게송

 

테리가타가 지난 2월에 출간 되었습니다. 주석과 함께 완역된 것은 최초의 일입니다. 15개에 달하는 쿳다까니까에서 여섯 번째로 번역된 것으로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 경전이라 볼 수 있습니다. 테리가타에서 담마딘나장로니에 대한 게송이 있습니다.

 

 

Chandajātā avasāyī

manasā ca phuhā siyā,
K
āmesu appaibaddhacittā

uddha sotāti vuccatīti. 

 

궁극을 지향하면 의욕을 일으키고

정신적으로 충만하여야 하리.

감각적 욕망에 마음이 묶이지 않는 님이

흐름을 거슬러가는 님이라 부른다.”(Thig.12,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흐름을 거슬러 가는 님(uddhasotā)’에 대한 것입니다. 가르침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진리의 길(maggasota)’을 따라 위로 올라가거나, 윤회의 흐름(sasārasota)을 거슬러 가는 것을 말합니다.

 

빠알리어 소따(sotā)는 귀(ear)의 뜻도 있지만 흐름(stream)’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흐름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의 길이고 또 하나는 윤회의 길입니다. 두 길은 정 반대입니다. 진리의 길에 들어 선자는 윤회의 길과는 반대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시고 난 다음에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S6.1)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탐, , 치로 살아 갑니다. 이것이 세상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흐름을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흐름을 거슬러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마치 연어가 회귀본능으로 인하여 하천을 거슬러 올라 가는 것처럼 힘겨운 일입니다.

 

게송에 따르면 흐름을 거슬러 가는 님(uddhasotā)’에 대하여 감각적 욕망에 마음이 묶이지 않는 님(kāmesu appaibaddhacittā)’이라 했습니다. 이는 감각적 욕망에 묶이지 않은 자를 말합니다.

 

담마딘나장로니 인연담

 

담마딘나장로니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묶이지 않은 마음에 대하여 흐름을 거슬러 가는 수행자의 길이라 했습니다. 그 길로 죽 가면 궁극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담마딘나장로니는 어떻게 궁극의 길을 가게 되었을까요? 이 게송에 대한 아름다운 인연담이 있습니다.

 

 

그녀는 빠두뭇따라 부처님 당시에 항싸바띠 시에서 다른 사람에 의존하여 삶을 살다가, 한 멸진정에서 일어난 최상의 제자에게 존경과 공경을 표하고 보시를 하고 천상계에 태어났다.

 

거기서 죽어서 천상계와 인간계를 윤회하다가 풋싸 부처님당시에 스승의 이복형제들을 위해, 일꾼의 집에 살면서 보시와 관련하여 한 사람에게 주어라.’라고 주인이 말하자 두 사람에게 주면서 많은 공덕을 쌓아서 깟싸빠 부처님 당시에 까씨 국왕의 왕 끼끼의 집안에 입태되어 일곱 자매의 하나로 태어나 이만년동안 청정한 삶을 살다가 한 부처님과 부처님 사잇시대에 천상계와 인간계를 윤회하다가 고따마 부처님께서 탄생할 무렵, 라자가하 시의 한 훌륭한 가문에 태어나 성년이 되자 비싸카라는 부호의 집에 시집을 갔다.

 

그런데 어느 날 부호 비싸카는 스승에게 가르침을 듣고 돌아 오지 않는 님이 되어 집으로 가서 누각에 오르면서, 층계 위에 서 있는 담마딘나가 손을 내밀었으나 붙잡지 않고 누각에 올라 식사를 하면서도 침묵을 했다.

 

담마딘나는 그의 의중을 살피고 여보, 왜 오늘 나의 손을 붙잡지 않습니까? 식사하면서도 아무 말이 없습니까? 나에게 어떤 잘못이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비싸카는 담마딘나여, 그대에게 잘못은 없습니다. 나는 그러한 원리를 꿰뚫었습니다. 만약에 그대가 원한다면, 이 집에 사십시오.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재물을 가지고 당신의 집으로 가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녀는 여보, 나는 당신이 뱉어낸 것을 삼키지 않겠습니다. 저에게도 출가를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비싸카는 좋습니다.’라고 담마딘나에게 말하고 그녀를 황금으로 만든 가마에 태워서 수행녀의 처소로 보냈다.

 

그녀는 출가해서 명상주제를 붙잡고 며칠간 그곳에서 지내다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기위해 궤범사와 친교사에게 가서 존귀한 여인들이여, 저는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는 마을에 사는 자의 처소에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수행녀들은 그녀를 마을에 사는 자에게 인도했다. 그녀는 거기에 살면서 과거의 형성들을 부수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분석적인 앎과 더불어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그녀는 거룩한 경지를 성취하고 나서 나의 마음은 최상의 상태에 이르렀다. 내가 여기서 지내면 무엇을 할 것인가? 라자가하 시로 가서 스승께 예경하고 많은 나의 친지들을 위하여 공덕을 짓겠다.’라고 수행녀들과 함께 라자가하 시로 돌아 갔다.

 

비싸카는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가 얻은 바를 시험하면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五蘊: pancakhanda) 등으로 질문했다. 담마딘나는 아주 날카로운 칼로 연꽃줄기를 잘라내듯, 질문할 때마다 그 질문에 대답했다. 비싸카는 모든 질문과 대답하는 과정을 스승께 보고했다.

 

스승께서는 비싸카여, 수행녀 담마딘나는 슬기롭다.’라는 등으로 그녀를 칭찬하고 일체지자의 궁극적인 앎과 결합시켜서 대답한 것을 알리고 그녀를 또한 교리문답의 작은 경(M44)’의 경우를 들어서 그녀를 가르침을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dhammakathikāna agga)’의 자리에 세웠다.

 

그녀는 마을의 거처에 살면서 낮은 단계의 길에 도달하고 나서 최상의 길(aggamagga)을 위해 통찰수행을 확립하고 나서 이 시(Thig.12)를 읊었다.

 

(테리가타 12번 게송 인연담, 전재성님역)

 

 

Visākha and Dhammadinnā

 

 

인연담을 보면 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작은 경(M44)’의 배경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에서는 단순하게 재가신자 비싸카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담마딘나 비구니의 대화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이전에 부부사이였습니다.

 

아나함의 부부관계

 

인연담에서 두 가지에 주목합니다. 하나는 아나함이 되면 부부관계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아나함이 되는 조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낮은 단계의 결박(pañcorambhāgiyāni sayojanāni)’이 모두 풀렸기 때문입니다. , 개체가 있다는 견해, 회의적 의심,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분노의 결박이 풀린 것입니다. 특히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kāmacchanda)가 소멸된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부부관계를 지속할 수 없어서 담마딘나가 손을 내밀었으나 붙잡지 않은 것입니다.

 

아나함이 되면 더 이상 부부관계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감각적 욕망이 사라져 버린 자에게 있어서 부부관계는 형식적에 지나지 않습니다. 젊은 부인을 가졌다면 시집을 가게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함이 된 비싸카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다 가져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라고 했습니다.

 

아나함이 된자에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재가에 살면서 수행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승단에 들어 가서 출가자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인연담에 따르면 비싸카는 출가하지 않고 재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마딘나가 나는 당신이 뱉어낸 것을 삼키지 않겠습니다.”라며 출가를 요청하자 황금가마에 태워서 출가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모든 감각적 욕망이 소멸된 아나함을 불환자라 합니다. 죽으면 색계 4선천에 있는 정거천에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수명대로 살다가 죽으면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이릅니다. 그런 정거천은 남녀 성의 구별이 없는 곳입니다. 일종의 중성이 사는 세계라 볼 수 있습니다.

 

색계의 존재는 빛과 같은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서 하늘을 날아 다닐 수 있고, 인간과 같은 소화기관이 없어서 그 대신 기쁨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아나함이 되면 색계존재와 같은 상태라 볼 수 있기 때문에 욕계존재와는 함께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여인오장설(女人五障說)

 

인연담에서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여성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남성 보다 더 빨리 될 수 있음을 인연담에서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담마딘나는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성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앙굿따라니까야 고따미의 경(A8.51)’에 실려 있습니다. 경에서는 아난다여, 여인들이 여래께서 설한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해서, 흐름에 든 경지나, 한번 돌아오는 경지나, 돌아오지 않는 경지나, 거룩한 경지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A8.51)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거룩한 님은 아라한을 뜻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아라한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여자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여자가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이 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고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A1.287)라 되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에서는 여성아라한에 대하여 두 가지 상반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여성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하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모순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처럼 동일한 경전 내에서 여성성불 가능성에 대한 모순된 진술이 전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아마도 앙굿따라니까야가 니까야 가운데 남성중심적 사상이 팽배했던 비교적 후기에 성립되었고, 그 결과 사회적인 성차별적 이데올로기가 편입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불교와 섹슈얼리티 120, 전재성박사)

 

 

여인오장설이 있습니다. 여성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가로막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음을 말합니다. 놀랍게도 앙굿따라니까야 여자의 경(A.287-291)’에 따르면 여자는 아라한 정등각자가 되지 못하고, 전륜성왕이 되지 못하고, 제석천이 되지 못하고, 악마가 되지 못하고, 하느님(梵天: Brahma)이 되지 못함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여인오장설에 대하여 시대적 산물이라 보고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가 후대에 편집되는 과정에서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dhammakathikāna agga)

 

재가신자 비싸카와 아라한 담마딘나 비구니의 질의응답은 교리문답의 작은 경(M44)’에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재가의 신도 비싸카가 수행녀 담마딘나가 있는 곳을 찾아 갔다.”로 시작됩니다. 비싸카는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을 물어 봅니다. 이에 담마딘나는 막힘 없이 답변합니다. 아나함과 아라한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해 주는 것 같아 보입니다.

 

경에서 전남편 비싸카는 담마딘나에게 존귀한 여인이여(ayye)”라며 극존칭을 사용합니다. 초불연 대림스님은 스님이라 번역했습니다. 이는 부적절한 번역이라 봅니다. 빠알리어 ayya는 어근이 산스크리트어‘arya’와 같아서 성스럽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ayya‘lord; master’의 뜻으로 남자에게는 ‘gentleman’ 여자에게는 ‘mistress; lady’의 뜻입니다. 전남편 비싸카는 담마딘나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ayye(존귀한 여인이여)’라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스님이라 번역했는데 이는 빠알리원문의 뜻과도 맞지 않아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빅쿠보디는 “Lady”라 번역했습니다.

 

교리문답의 작은 경에서는 개체, 개체의 발생, 개체의 소멸, 오온과 오취온의 차이점, 유신견, 팔정도, 삼매, 형성, 호흡, 상수멸, 선정, 열반 등의 주제에 대하여 토론합니다. 특히 열반과 관련하여 비싸카가 열반에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며 묻자, 담마딘나는 그대의 질문의 범주를 벗어난 것입니다.”라 하여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합니다. 복주석서에 따르면 열반은 그 반대개념으로 조건 지어진 상태, 즉 유위라는 표현이 대응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으나 엄밀히 고찰하면, 무조건적인 열반에 어떤 조건적인 것이 대응하거나 보충될 수 있다면 무조건적인 것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성전협 맛지마, 810번 각주)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재가자 비싸카는 담마딘나비구니와 토론한 것을 모두 부처님에게 설명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담마딘나가 현명한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임을 설명하고 비싸카여, 그대가 나에게 그 의미를 묻는다면, 나도 역시 수행녀 담마딘나가 설한 것과 같이 그와 같이 설명할 것입니다.”(M44) 라고 말씀 했습니다. 이와 같은 담마딘나에 대하여 가르침을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dhammakathikāna agga)’이라 했습니다.

 

 

2017-03-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