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천진불(天眞佛)사상과 동자승, 잠재성향(anusaya) 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7. 3. 21. 11:31

 

천진불(天眞佛)사상과 동자승, 잠재성향(anusaya) 에 대하여

  

 

집으로 가는 길에

 

위병소 정문을 나서자 공기가 산뜻 했습니다. 그날을 기억합니다. 6 8일입니다. 28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소위 개구리복이라는 예비군복을 입은 날입니다. 대학에서 교련을 받았다고 해서 혜택을 받아 동기들 보다 4개월 먼저 나갔습니다.

 

그날 유월은 빛나는 오전이었습니다. 전역신고를 마치고 위병소 정문을 통과하자 공기부터 달랐습니다. 위병소 안쪽과 바깥쪽은 똑 같은 공기임에도 달라 보였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유의 공기였습니다.

 

생애 최고의 날에 맛 본 것은 자유이었습니다. 더 이상 보초를 서지 않고 더 이상 통제 받지 않는 삶입니다. 이런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한때 좌절하여 자포자기 한적도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앞날이 보이지 않을 때는 과연 그날이 올 수 있을까?’라며 의문 했습니다. 그러나 계절이 수도 없이 바뀌고 나자 마침내 그날이 온 것입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경이로워 보였습니다. 부대에서 큰 도로에 이르는 약 4키로의 거리를 사뿐하게 걸었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그윽한 향기를 품고새롭게 출발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일생에 있어서 최고의 날입니다. 해방된 것입니다.

 

벗어남에 대하여

 

군대용어로서 지금 이시각에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때 되면 나오게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때가 되어 해방되어 자유를 찾았을지라도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시적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습니다. 즐거움을 찾아 여기저기 찾다 보면 매이게 됩니다. 그것도 자식과 아내에게 매이면 또 다시 속박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불교는 해탈과 열반을 추구합니다.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영원한 자유, 대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테리가타에는 벗어남에 대하여 이렇게 노래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Sumuttā sādhu muttāmhi

tīhi khujjehi muttiyā,
Usukkhalena musalena

patinā khujjakena ca,
Mutt
āmhi jātimaraā

bhavanetti samūhatāti.

 

“세 가지 굽은 것으로부터

절구로부터 공이로부터

그리고 곱사등이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잘 해탈되었고 훌륭하게 해탈되었다.

생사로부터 해탈되었으니

나에게 존재의 통로는 제거되었다.”

(Thig.11, 전재성님역)

 

 

이 게송을 읊은 장로니는 뭇따(Mutta)’입니다. 뭇따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해탈(mutta)’과 관련 된 게송입니다. 뭇따장로니는 세 가지에서 벗어났다고 했습니다. , 절구, 공이, 곱사등이 남편이라 했습니다. 모두 굽은 것이 특징입니다. 일아스님은 곱사등이 남편에 대하여 마음이 비뚤어진 남편이라고 의역했습니다.

 

뭇따장로니가 말하는 세 가지 굽은 것은 힘든 재가의 생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곱사등이 남편은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뜻합니다. 부모가 맺어준 것입니다. 장로니는 출가를 함으로써 세 가지로부터 해방되었고,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라는 존재로 부터도 해방되었습니다. 뭇따장로니는 ! 자유! 정말로 나는 벗어났다.”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피츠버그 집단탈옥 사건

 

최근 감옥다큐를 즐겨 보고 있습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영했던 것을 유튜브(NGC 프리즌 브레이크 01 피츠버그 집단탈옥)에 올려 놓은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자유를 찾아 탈옥하는 다큐가 있습니다. 피츠버그 집단탈옥사건입니다. 1997년 피츠버그 웨스턴교도소에서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죄수 6명이 집단탈옥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땅굴을 파고 도주했습니다.

 

죄수들은 땅굴을 지나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그들이 본 것은 신선한 공기였습니다. 그리고 눈부신 태양이었습니다. 이제 차를 훔쳐 타고 멕시코국경만 넘으면 완전한 자유인이 됩니다. 그러나 불과 10일도 되지 않아 붙잡혔습니다.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된 것에 대한 기쁨인지 마약을 하는 등 방종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으로는 안전띠를 매지 않아 경찰의 단속에 걸렸습니다. 단속을 피하려 도주하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주동자는 그 사건 이후로 독방에 수감되어 12년 째라 합니다. 24시간 중에 23시간은 독방에서 보내야 하는데, 오로지 하루에 한번 한시간동안 운동장에서 바깥공기를 쐴 자유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천진불(天眞佛)사상과 동자승

 

중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은 처음부터 범죄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찌 하다 보니 범죄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온 배경과 주변의 환경의 영향탓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잠재성향의 발현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순수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 가고자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천진불(天眞佛)’이라 하여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것을 이상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동자승이 등장합니다. 천진무구한 어린아이를 선발해서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혀 주어 동자승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마 천진불사상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입니다.

 

순진무구함을 상징하는 동자승 캐릭터가 등장한 것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해방이전에는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근자에 동자승관련 소설이나 영화 등의 영향에 따라 현대적인 산물로 보고 있습니다.

 

천진불사상은 외도사상

 

초기경전에 따르면 천진불사상은 외도사상이라는 사실입니다. 맛지마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Kassa kho nāma tva mālukyaputta mayā eva pañcorambhāgiyāni sayojanāni desitāni dhāresi. Nanu mālukyaputt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iminā taruūpamena upārambhena upārambhissanti.

 

말룽끼야뿟따여, 내가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누구에게 이렇게 설했다고 기억하는가? 말룽끼야뿟따여, 다른 이교도의 유행자들이 어린아이의 비유로서 그대들 논박한 것이 아닌가?”(M6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pañcorambhāgiyāni sayojanāni), , 개체가 있다는 견해, 의심,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분노에 대한 잠재성향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도들에 따르면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오하분결)에 대하여 번뇌가 공격할 때만 묶여 있는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오하분결에 매여 있지 않아 천진무구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견해는 다름 아닌 천진불사상과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천진불사상은 외도의 사상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잠재성향(anusaya)에 대하여

 

부처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말룽끼야뿟따를 나무랐습니다. 이전에도 유신견 등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의 잠재성향에 대하여 어린아이 비유로서 설명했음에도 잘 이해하지 못하여 외도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라며 수행승들을 불러 스스로 설명하는 형식으로 법문을 설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잠재성향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순진무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서서히 잠재성향이 발현될 것이라 했습니다. 오하분결 중에 유신견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Nanu mālukyaputta aññatitthiyā paribbājakā iminā taruūpamena upārambhena upārambhissanti. Daharassa hi mālukyaputta kumārassa mandassa uttānaseyyakassa sakkāyotipi na hoti kuto panassa uppajjissati sakkāyadiṭṭhi. Anusetitvevassa sakkāyadiṭṭhānusayo,

 

‘말룽끼야뿟따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존재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가 생겨나겠는가? 그러나 그 아기에게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라는 견해가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경향은 있는 것이다.”(M64, 전재성님역)

 

 

 

2010년 연등축제

 

 

 

누워 있는 아기에게 자아관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아관념은 성장함에 따라 단계적으로 발달됩니다. 영아기, 유아기, 학령기, 청소년기, 성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아기의 경우 가장 자아개념의 가장 기초적 단계로서 존재적 자신을 타인과 구별하는 존재적 자아인식이 형성되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아기의 경우 3-5세로서 자신을 단지 성, 연령, 키 등으로 분류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학령기에 달해야 비로서 주체성으로서 자아가 확고해지는 단계입니다.

 

부처님은 누워 있는 아기, 즉 영아에게 개체가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영아에게는 자아개념 자체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의심,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분노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의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있다면 잠재되어 있을 뿐입니다.

 

왜 천진불사상을 동경하는가?

 

청소년기가 되어야 자아개념이 확고해집니다. 동시에 잠재되어 있던 욕망이 발현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성에 대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은 욕망의 대상을 보았을 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잠재되어 있는 욕망이 조건이 맞아 발현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외도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무구성을 이상으로 삼아 일종의 천진불사상을 동경했습니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천진불사상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MN78에 따르면, 유행자들 가운데는 ‘세상에서 몸으로 악한 행위를 하지 않고, 악한 말을 하지 않고, 악한 의도를 품지 않고, 악한 생활을 하지 않는 그러한 네 가지 원리를 갖춘 사람이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갖추고, 궁극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것들에 도달하고,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고, 정복될 수 없는 수행자이다.’라는 견해가 있었고, 그들은 어린아이의 천진무구성을 이상을 삼았다. 말룽끼야뿟따는 번뇌가 사람을 공격할 때만 묶여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어린아이처럼 장애가 내부적으로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1106번 각주, 전재성님역)

 

 

각주에서는 맛지마니까야 수행자 만디까의 아들에 대한 경(M78)’을 참고하여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유행자 욱가하마나가 말한 어린아이의 네 가지 덕목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비판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천진불이라면

 

자아개념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생활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건축사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신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움직일 뿐, 어떻게 신체로 악한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건축사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언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울어댈 뿐, 어떻게 악한 언어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건축사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의도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뾰루퉁할 뿐, 어떻게 악한 의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건축사여, 참으로 어리고 연약하여 누워있는 아기에게는 생활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어미젖을 구할 뿐, 어떻게 악한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M78, 전재성님역)

 

 

어린아이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신체적으로 악한 행위를 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할 수 있다면 단지 움직일 뿐이라 했습니다. 언어적 행위에 대해서는 단지 울어댈 뿐이라 하여 우는 것이 의사소통임을 말합니다. 정신적 의도에 대해서는 단지 뾰루퉁할 뿐이라 하여 얼굴 표정으로만 가능함을 말합니다. 생활에 대해서는 단지 어미젖을 구할 뿐이라 했습니다. 이런 어린아이에 대하여 순진무구하다 하여 이상으로 삼는 것은 잘못된 견해임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외도들이 어린아이가 천성적으로 장애가 내부적으로 없다고 보는 것에 대하여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자아개념이 생긴다면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생활적인 행위로 인하여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이 생겨날 것이라 했습니다. 단지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모습만을 보고서 내적으로 장애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상으로 삼는 것은 잠재되어 있는 성향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어린아이는 천진불이 아니다

 

어린아이는 자라면서 자아의식이 생겨날 것입니다. 자아의식의 확립과 함께 내가있다는 견해도 생겨날 것이고, 이러한 유신견은 필연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오염원을 발현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한행위를 하는데 대표적으로 감각적 욕망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범죄는 자아의식의 발현과 함께 나타납니다. 만일 자아의식이 없다면 감각적 욕망이나 분노를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에게는 감각적 욕망이나 분노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일어날 수 있다면 단지 울어댈 뿐” “단지 뾰루퉁할 뿐등으로 동물적 본능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누워 있는 어린아이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이 일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잠재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개체가 있다는 견해(유신견)에 대해서는 아기에게는 개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개체가 있다는 견해가 생겨나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회의적 의심에 대해서는 아기에게는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가르침에 대한 의혹이 생겨나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아기에게는 관습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미신과 터부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해서는 아기에게는 감각적 쾌락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생겨나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마지막으로 분노에 대해서는 아기에게는 뭇 삶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뭇 삶에 대한 분노가 생겨나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잠재성향은 어떻게 발휘되는가?

 

부처님의 지적은 타당합니다.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습니다. 단지 순진무구해 보인다고 하여 어린아이를 이상으로 삼는 천진불사상은 외도의 사상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렇다면 잠재 되어 있는 성향을 제거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오염(kilesa)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경향(anusaya: 隨眠)의 수준에서는 마음에 성향으로만 남아있다. 속박(pariyuṭṭhāna)의 수준에서는 마음을 사로잡아 노예화한다. 위범(vītikkama: 違犯)의 수준에서는 악하고 불건전한 신체적-언어적 행위를 유발한다. 부처님의 비판은 결박이 출세간적 길을 통해 제거되지 않는다면, 실제적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경향의 수준에서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1107번 각주, 전재성님)

 

 

경에서는 잠재적인 경향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라도 자라면 잠재성향이 발현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잠재성향은 빠알리어로 아누사야(anusaya)’라 합니다. 한자어로 수면(隨眠)’이라 하는데 이는 잠자고 있는 듯이 숨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잠재성향은 세 가지 단계로 발현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경향, 속박, 위범에 대한 것입니다.

 

마음에 오염원이 잠재성향으로 남아 있는 한 누구나 범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아의식이 생겨나면 동시에 감각적 욕망도 생겨납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대상에 대하여 감각적 욕망이 생겨나면 여기에 묶이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마음을 사로 잡아 노예화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속박(pariyuṭṭhāna)’입니다. 대상에 대하여 집착이 일어나면 신체적, 정신적 행위를 일으켜서 악하고 불건전한 업을 짓게 됩니다. 이것이 위범(vītikkama)’의 단계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어린아이 시절 모두 순진무구하고 천진무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진불 아닌 자 한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의식이 생겨날수록 잠재되어 있는 성향이 발휘되어 속박과 위범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중범죄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대자유인(大自由)이 되려면

 

감옥에 있는 죄수들은 자유가 박탈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 시절의 천진무구함이 그대로 유지 되어 있다면 감옥에 들어 올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중죄를 지어 감옥에서 자유를 박탈당한채 살아 간다면 외도들이 말하는 천진불사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감옥에 들어 오는 일이 없어야 할까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출세간적 길을 가야 함을 말합니다. 위범과 결박은 물론 잠재성향은 출세간적 도를 닦으면 뿌리채 뽑힐 수 있음을 말합니다.

 

출세간적 도를 이루었을 때 이를 해탈(vimuttī)’이라 합니다. 해탈은 자유라는 말과도 동의어입니다. 그것도 대자유(大自由)’입니다.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이기 때문에 오온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된 것이나 같습니다.

 

부처님은 우리들을 존재라는 감옥, 오온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마음의 해탈(ceto-vimutti: 心解脫)’지혜에 의한 해탈((paññā-vimutti: 慧解脫)’입니다. 심해탈은 멈춤(samatha)으로 혜해탈은 통찰(vipassana)로 성취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심해탈과 혜해탈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멈춤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마음이 닦여진다. 마음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탐욕이 있다면, 그것이 끊어져 버린다.

 

수행승들이여, 통찰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지혜가 닦여진다. 지혜가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무명이 있다면, 그것이 끊어져 버린다.”(A2.3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탐욕은 사마타로, 무명은 위빠사나로 끊어 버릴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심해탈과 혜해탈도 각자 경향에 따라 선호도가 다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아난다가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이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을 버리기 위한 방도가 있고 길이 있는데, 왜 어떤 수행승은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룬 사람이 되고 어떤 수행승은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룬 사람이 됩니까?”(M64) 라며 묻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여기 그들의 성향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M64) 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성향을 인정했습니다. 누구나 타고난 성향이 있음을 말합니다. 심해탈을 이룬자는 마음을 닦았기 때문에 선정을 강조합니다. 반면 혜해탈을 이룬자는 통찰의 길을 닦았기 때문에 지혜를 강조합니다. 부처님 제자들은 두 가지 길에 의해 아라한이 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목갈라는 마음에 의한 해탈자로 불리우고, 사리뿟따는 지혜에 의한 해탈자로 불리웁니다. 해탈하는데 있어서도 성향이 다름을 말합니다.

 

비록 얻어 먹어도

 

누구나 자유를 갈구합니다. 지난 1월과 2월 두 달 동안 매주 일요일 저녁 8시 반에 을지로굴다리에 있었습니다. 봉사단체 작은손길회원들과 함께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봉사였습니다. 봉사자에게 들은 말이 있습니다. 노숙자들이 재워주고 먹여주는 편리한 시설이 있음에도 들어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매일 옆에서 자는 사람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무섭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옆에서 자는 사람이 왜 공포스러울 정도로 무서울까요? 처음에는 매일 파트너가바뀌기 때문이라 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공포를 느낄 정도라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유튜브에서 감옥다큐를 보면서 어느 정도 알게 됐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폭력입니다. 특히 약한 자에게 있어서 폭력 행위는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폭력은 신체적 폭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폭력도 있습니다.

 

노숙자들은 편리한 시설이 있음에도 차가운 겨울에 밖에서 삽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자유때문이라 봅니다. 비록 얻어 먹어도 자유 그거 하나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노숙자들에게 있어서 자유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해탈도(解脫道)

 

위병소 정문을 통과 했을 때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마치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계절이 수 없이 바뀐 군대생활을 마치자 해방된 듯 했습니다. 4키로에 달하는 거리를 구름에 날 듯 걸었습니다. 한적한 도로에는 속성수라 불리우는 현사시나무잎이 유월의 따스한 햇살에 빛이 났습니다. 바람은 부드럽고 공기는 싱그럽고 상쾌했습니다.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장기수형자가 감옥문을 나섰을 때 자유를 만끽할 것입니다. 힘겨운 재가의 삶에서 출가했을 때 역시 자유를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대자유는 요원합니다. 잠재되어 있는 성향이 조건만 맞으면 발현 되었을 때 속박됩니다. 더구나 악행을 저질렀을 때 범죄자가 됩니다. 아무리 착하고 살며 남에게 폐끼지 산다고 할지라도 지헤가 없다면 모두 잠재적인 범죄자들입니다.

 

부처님은 대자유인이 되는 방법을 일러 주었습니다. 그것은 해탈의 길, ‘해탈도(解脫道)’입니다. 멈춤(samatha)과 통찰(vipassana)이라는 길을 통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을 때 대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묘사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았을 때, 그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의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존재에 의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무명에 의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한다. 해탈하면 그에게 ‘나는 해탈했다.’는 앎이 생겨난다. 그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는 일이 없다.’고 분명히 안다.”(M65, 전재성님역)

 

 

2017-03-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