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스승의 발아래 엎드려

담마다사 이병욱 2017. 3. 16. 11:36

 

스승의 발아래 엎드려

 

 

먼저 보는 사람이 인사하기

 

인사는 왜 하는가? 존경심의 발로라 볼 수 있습니다. 존경하지 않는다면 인사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존경하지 않는다면 어른이 지나가도 고개 뻣뻣하게 세우고 지나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존경여부를 떠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인사하는 것이 예의일 것입니다.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치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가장 요청되는 덕목입니다. 이런 덕목을 가정에서 도입한다면, 맞벌이 부부의 경우 먼저 집에 오는 사람이 저녁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오는 사람이 밥을 준비하면 나중에 밥먹는 사람이 당연히 설거지를 해야 할 것입니다. 집안이 어지럽혀져 있으면 먼저 보는 사람이 청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치우기 운동을 하면 다툼이 일어 날 수 없습니다. 인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먼저 보는 사람이 인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지위고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상사라도 먼저 보았다면 부하에게 인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조직에 다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먼저 본 부하에게 인사하는 상사, 이런 상사야말로 진정한 권력자 또는 권위자일 것입니다.

 

권위(權威)에 대하여

 

권위라는 말이 있습니다. 권위(權威)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다른 사람을 통솔하여 이끄는 힘이라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는 authority, power, expert, dignity라 합니다. 힘과 위엄을 뜻하는 권위는 누구나 인정하는 해당분야에 있어서 가치의 우월성을 믿도록 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또 다른 말로 권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은 두 사람만 있어도 작동 됩니다. 길고 짧은 것은 대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단 둘만 있어도 우열이 드러납니다. 우열에 따라 권력관계가 형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명이 아닌 여러 사람이 있을 때 리더가 있기 마련입니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본 받을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 명 중에 내가 중간이라면 한명은 나 보다 나은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 더 낫거나 자신과 같은 자를 걷다가 만나지 못하면, 단호히 홀로 가야하리라. 어리석은 자와의 우정은 없으니.”(Dhp.61) 라 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논어에서 공자가 말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헤게모니 다툼

 

두 사람만 있어도 권력이 작동된다면 여러 명이 있는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권력이 작동될 것입니다. 그런 권력은 헤게모니 다툼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동물의 세계에서 발정기가 되면 암컷을 차지 하기 위해 수컷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헤게모니 다툼은 조폭세계에서는 전쟁이나 다름 없습니다. 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힘센자가 우두머리가 됩니다. 마치 발정기떼 수컷들이 목숨걸고 싸우는 것처럼, 도전자가 우두머리를 꺽으면 일인자가 되어 그 조직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나 라이언킹(Lion King)일 뿐입니다. 백수의 제왕 사자는 그 힘으로 인하여 우두머리가 되지만 힘이 약해지면 쫒겨 납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말이 있듯이 새로운 젊은 강자에게 그것도 비참하게 쫒겨 납니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에서든지 권력의지는 작동됩니다. 힘을 필요로 하는 집단에서는 힘이 센 자가 최고입니다. 학문분야에서는 가장 많이 아는 자가 권위자가 됩니다. 종교계라면 가장 청정한 자가 권위자가 될 것입니다. 불교라면 청정함과 함께 수행력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세계에서처럼 헤게모니 다툼하지 않습니다. 청정한 빅쿠의 권위는 청정함을 유지하는 한 계속됩니다

 

거리에서 스님을 만나면

 

불자들은 스님들에게 합장합니다. 신심 있는 불자들은 거리에서 스님을 만나면 멈추어 서서 정중하게 합장하며 반배 합니다. 그 스님의 계행이 어떤 지 알 수 없어도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다면 합장하는 것이 예의일 것입니다. 계행이 엉망인 스님은 내가 절을 받을 자격이 있나?”라며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 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스님들이 절을 받는 것은 계행 여부를 떠나서 출가 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절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오욕락이라는 감각적 욕망을 놓지 못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출가한 자의 용기는 경외의 대상일 것입니다. 머리를 깍은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권위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스님상은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청정비구승입니다.

 

존경받는 리더가 되려면

 

조직이나 단체에서 존경받는 리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회사에서 사장이 직원에게 오늘부터 나를 존경해!”라고 해서 존경할까요? 월급을 받아 먹기 위해서 고개를 숙일지 몰라도 마음으로는 존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존경심은 어떻게 나올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관용자애지혜일 것입니다.

 

불교의 목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입니다. 그래서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癡)의 길로 나아 가야 합니다. 무탐, 무진, 무치가 바로 관용과 자애와 지혜입니다.

 

깨달은 자, 즉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된 자는 지혜로울 수밖에 없고 동시에 자비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 된 그 자리에 관용과 자애와 지혜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존경 받는 리더의 덕목일 것입니다.

 

자비만큼 큰 힘은 없다

 

무욕의 성자에게는 고개가 숙여집니다. 욕망을 여읜 자는 동시에 성냄도 여읜 자입니다. 이런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래서 무욕의 성자는 지혜롭고 자비로운 자입니다.

 

무욕의 성자에게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다름 아닌 권위입니다. 권위라는 것이 물리적 힘으로 통제하는 것의 의미일 수 있지만, 진정한 권위는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것입니다. 무욕의 성자를 보았을 때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관용과 자애와 지혜에서 나오는 힘이라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만 있어도 권력의지가 작동된다고 합니다. 누가 주도권을 쥐는 지는 육체적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사에 관용하고 자애롭고 지혜로운 자라면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쥐게 될 것입니다. 여러 명이 모여 있는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동창회 모임 같은 작은 조직이든지, 정부와 같은 큰 조직이든지 리더가 되려면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권위는 잘 경청하는 것에서부터 확보됩니다. 잘 경청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배려 하는 관용과 자애로운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리더가 욕심을 부린다면 그 순간부터 존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권위의 상실입니다.

 

권위 있는 리더가 되려면 잘 배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배려의 마음이 관용이고 자애입니다. 리더의 진정한 힘은 관용과 자애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사랑만큼 큰 힘이 없다고 합니다. 자비가 넘치는 자가 진정한 권력자이고 권위자입니다. 부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왜 오체투지하는가

 

초기경전을 보면 외도가 부처님을 보고서 귀의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고따마여라며 성씨를 부르다가 나중에는 세존이시여라고 호칭이 바뀝니다. 마침내 무릎을 꿇고 귀의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였다.” 등의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최상의 예를 나타낸 것입니다.

 

외도들은 단지 합장하며 반배 올리는 정도가 아니라 무릎을 꿇고 부처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는 행위를 합니다. 이런 행위는 말로서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속에 등불을 가져오듯이라며 귀의문을 낭송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권위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자입니다. 오래 전에 열반 했음에도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불상을 만들어 놓고 예배합니다. 오체 투지라 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치듯이 바닥에 자신의 몸을 최대한 낮추어 예경합니다. 이런 예는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린 빠세나디왕

 

맛지마니까야’ ‘진실에 대한 장엄의 경(Dhammacetiya sutta, M89)에 따르면 꼬살라국의 국왕 빠세나디왕이 부처님에게 예경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일국의 국왕이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최상의 예배를 올립니다.

 

 

Atha kho rājā pasenadi kosalo vihāra pavisitvā bhagavato pāde sirasā nipatitvā bhagavato pādāni mukhena ca paricumbati.

 

그러자 꼬쌀라 국왕 빠쎄나디는 처소로 들어가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세존의 두 발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이름을 대며 두 손으로 어루만졌다.”(M89, 전재성님역)

 

 

 

 

 

 

고대인도에서 국왕은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왕국의 영토가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왕국에 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소유물과도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빠세나디왕은 부처님에게 찾아가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린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예배라 볼 수 있습니다.

 

진실에 대한 장엄의 경(Dhammacetiya sutta, M89)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른을 오랜만에 만나면 큰 절을 합니다. 머리를 바닥에 댈 정도로 정중하게 예를 표하는 것입니다. 불자들이 스님을 만날 때도 삼배와 함께 머리를 바닥에 댑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존경하는 사람에게는 머리에 이마를 대는 최상의 예를 표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일국의 국왕이 부처님에게 최상의 예를 표하는 장면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빠세나디왕은 부처님에게 최상의 예를 표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대왕이여, 그대는 어떠한 이유를 보고 이 같이 이 몸에 최상의 경의를 표하고 친애를 보이십니까?”라고 물어 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맛지마니까야 진실에 대한 장엄의 경(Dhammacetiya sutta, M89)’입니다. 초불연 대림스님은 법탑 경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종교의 가장 큰 경쟁력은

 

빠세나디왕은 부처님을 찾아 뵙고 최상의 예를 표하게 된 연유를 설명합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Idhāha bhante, passāmi eke samaabrāhmae pariyantakata brahmacariya caranti. Dasapi vassāni, vīsatimpi vassāni, tisampi vassāni,cattārisampi vassāni. Te aparena samayena sunahātā suvilittā kappitakesamassu pañcahi kāmaguehi samappitā samagībhūtā paricārenti idha panāha bhante, bhikkhu passāmi yāvajīva apāakoika paripuṇṇa parisuddha brahmacariya carante, na kho panāha bhante, ito bahiddhā añña eva paripuṇṇa parisuddha brahmacariya samanupassāmi.

 

이 세상에서 나는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십 년이나 이십 년이나 삼십 년이나 사십 년이나 일정기간 청정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도 나중에 그들은 목욕하고 향유를 바르고 머리와 수염을 가지런히 하고 다섯 가지 종류의 감각적 쾌락을 갖추고 만족하고 탐닉합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나는 여기에서 수행승들이 목숨이 다하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원만하고 청정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봅니다.”(M89, 전재성님역)

 

 

빠세나디왕이 감동한 것은 한마디로 청정한 삶(brahmacariya)’입니다. 외도들은 처음에는 청정한 삶을 살지만 나중에는 오욕락에 물든 삶을 살아 가는데,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원만하고 청정한 삶(parisuddha brahmacariya)’을 살아 간다고 했습니다.

 

어느 종교단체이든지 가장 큰 경쟁력은 청정입니다. 아무리 성전이 크고 우람해도 청정하지 않다면 당대를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승가가 오늘날 까지 전승되어 온 것은 제자들이 청정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키워드는 청정

 

부처님 당시 승가는 청정했습니다. 그리고 화합했습니다. 이는 빠세나디왕이나는 여기에서 수행승들이 화합하고 서로 감사하고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처럼 융화하며 서로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지내는 것을 봅니다.”(M89) 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이어지는 빠세나디왕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Addhā ime āyasmanto tassa bhagavato sāsane uāra pubbenāpara visesa sañjānanti, tathā ime āyasmanto haṭṭhapahaṭṭhā udaggudaggā abhiratarūpā pīitindriyā appossukkā pannalomā paradavuttā migabhūtena cetasā viharantī'ti.

 

이 존자들은 분명히 미소를 짓고, 즐거워하고, 참으로 기뻐하고, 감관이 청정하고, 평안하고, 두려움이 없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으로 살고, 사슴처럼 평화로운 마음으로 지내는 것을 보니 세존의 가르침 안에서, 차츰차츰 이루어지는 명상의 뛰어난 특징들을 깨닫고 있다.”(M89, 전재성님역)

 

 

역시 키워드는 청정입니다. 청정하게 삶에 따라 명상의 뛰어난 특징들을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두루채움명상(kasina:編處)의 명상에서부터 통찰(vipassana:)의 명상을 통해 거룩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칼과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빠세나디왕은 승가에 대하여 칭찬합니다. 더구나 세존께서 수백 명의 대중들에게 가르침을 설하면, 세존의 제자들은 소란을 피우지 않고 기침소리도내지 않습니다.”(M89) 라 하여 제자들의 경청태도에 대하여 칭찬합니다. 이에 반하여 국왕인 자신이 대신들에게 이야기하면 자신의 말을 가로 막고 방해하기 까지 한다고 비교해서 말합니다.

 

빠세나디왕의 부처님 찬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권위라는 것이 어떻게 나오는 것인지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소유물과 다름 없는 왕국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가 있는데, 부처님의 권위는 제자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빠세나디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acchariya vata bho, abbhūta vata bho. Adaṇḍena vata kira bho asatthena eva suvinītā parisā bhavissatī'ti

 

참으로 칼과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대중이 이와 같이 잘 다스려지다니 아주 놀라운 일이고,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M89, 전재성님역)

 

 

칼과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다스리는 자가 있습니다. 전륜성왕(轉輪聖王)입니다. 숫따니빠따에따르면 32가지 특징을 가진 자에게는 두 가지 운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출가하면 부처가 되고 재가에 있으면 전륜왕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륜왕이 되면 그는 대륙을 큰 바다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칼을 사용하지 않고 정법으로서 정복한다.”(Sn3.7) 라 했습니다. 빠세나디왕은 부처님에게서  전륜왕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시험하고자 몰래 잠입하여

 

빠세나디왕은 일국을 다스리는 왕입니다. 칼과 몽동이로 다스릴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나 부처님은 칼과 몽둥이 없이도 다스립니다. 더구나 자신 보다 더 존중합니다. 부처님의 권위는 빠세나디왕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다음과 같은 일화입니다.

 

 

Bhūtapubbāha bhante sena abbhūyyāno samāno imeva isidattapurāā thapatayo vimasamāno aññatarasmi sambādhe āvasathe vāsa upagañchi. Atha kho bhante, ime isidattapurāā thapatayo bahudeva ratti dhammiyā kathāya vītināmetvā yato ahosi bhagavā tato sīsa katvā ma pādato karitvā nipajjisu.

 

세존이시여, 예전에 나는 군대를 이끌면서 이씨닷따와 뿌라나라고 하는 감독관들을 시험하고자 어떤 좁고 누추한 집에 숙박을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때에 그들 이씨닷따와 뿌라나라고 하는 감독관들은 밤중에 절반을 법담으로 보낸 뒤 부처님이 계신 곳을 향해 머리를 두고 내 쪽으로 발을 향하게 하고 누웠습니다.(M89, 전재성님역)

 

 

빠세나디왕은 일국의 왕으로서 고관대작들에게 잘 대우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면전에서나 고개를 숙이는 것 처럼 보이지만 진정성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를 실험하기 위해 평상복으로 갈아 입고 그들이 머무는 숙소에 잠입했습니다.

 

빠세나디왕은 하루밤을 보내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면전에서는 권위에 복종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없는 곳에서는 무시당한 것입니다. 이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자신에게 다리를 뻗고 머리를 부처님에게 향한 것입니다.

 

담마쩨띠야(Dhammacetiyā)에 대하여

 

빠세나디왕은 부처님에게 최상의 예를 표했습니다. 이는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세존의 두 발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이름을 대며 두 손으로 어루만졌다.”(M89)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를 표한 것은 부처님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권위라는 것이 칼과 몽둥이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많이 베풀어 준 것에서 나온 것도 아니라, 다만 청정한 삶을 살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빠세나디왕은 부처님에게 세존께 최상의 경의를 표하고 친애를 보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M89)라 했습니다.

 

빠세나디왕은 부처님에게 할 수 있는 한 최상의 예를 표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국왕이 부처님 발 아래 엎드려서 두 발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이런 행위는 진정성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eso bhikkhave, rājā pasenadi kosalo dhammacetiyāni bhāsitvā uṭṭhāyāsanā pakkanto. Uggahātha1 bhikkhave, dhammacetiyāni. Pariyāpuātha bhikkhave, dhammacetiyāni. Dhāretha bhikkhave, dhammacetiyāni. Atthasahitāni bhikkhave, dhammacetiyāni ādibrahmacariyakānī

 

“수행승들이여, 꼬쌀라 국왕 빠쎄나디는 진실에 대한 장엄을 설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수행승들이여, 진실에 대한 장엄을 배우라. 수행승들이여, 진실에 대한 장엄을 터득하라. 수행승들이여, 진실에 대한 장엄을 새겨라. 수행승들이여, 진실에 대한 장엄은 유익하고 청정한 삶의 근본이다.(M8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빠세나디의 행위를 보고 제자들에게 진실에 대한 장엄을 배우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진실에 대한 장엄이라는 말은 ‘dhammacetiyāni’를 말합니다. 초불연 대림스님은 법의 탑들[法塔]’이라 하여 한자어를 곁들여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초불연 번역을 보면 법의 탑들을 배우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진실의 장엄 또는 법의 탑이라 불리우는 ‘dhammacetiyāni’‘dhamma+cetiyā’의 형태입니다. 직역하면 법(dhamma)과 탑(cetiyā)입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법을 존중하는 명언들을 뜻한다.”라고 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삼보 가운데서 어떤 것을 존중하면 모든 것에 존경을 표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세존에게 존중을 표하면 법에 대해서도 존중을 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법의 탑들이라고 하셨다.”(MA.iii.355)라 하여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빅쿠보디는 ‘dhammacetiyāni’와 관련하여 “Learn the monuments to the Dhamma”라 했습니다. ‘담마로 향한 탑들을 배워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직역은 설명문을 보지 않으면 쉽게 이해 되지 않습니다.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monuments to the Dhamma’에 대하여 “MA: “Monuments to the Dhamma” means words expressing reverence to the Dhamma. Whenever reverence is shown towards any of the Three jewels, it is also shown to the others.” (MDB 844번 각주, 빅쿠보디) 라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초불연 각주와 내용이 같습니다.

 

라이언킹 빠세나디왕

 

맛지마니까야 진실에 대한 장엄의 경(M89)’에서 빠세나디 왕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빠세나디왕이 라이언킹(Lion King)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빠세나디왕이 부처님을 뵈러 갈 때 칼과 터어번을 디가 까라야나에게 주었다.”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습니다.

 

빠세나디 왕은 부처님을 뵈러 갈 때 총사령관 디가 까라야나에게 왕의 상징을 건네 주었습니다. 이런 행동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예의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너무나도 존경하는 정등각자를 뵈로 가면서 들뜬 마음으로 가는 것은 적당하지 않고, 또 혼자 다가가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대화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MA.iii.351)라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칼과 터번을 건네 받는 총사령관은 지금 대왕께서는 밀행을 하신다. 나는 이곳에서 기다려야 겠다.”(전재성님역) 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림스님역을 보면 이제 대왕은 독대를 하시려나 보다. 내가 지금 오직 여기서 서 있어야만 하는가?”라 되어 있습니다. 이는 대신 디가 까라야나의 복잡한 심경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디가 까라야나는 이와 같이 예전에 수행자 고따마와 사적인 대화를  가진 후에 왕은 나의 삼촌과 서른 두 명의 아들을 체포했다. 그러니 아마도 지금은 나를 체포할 것이다.’고 생각했다. 디가 까라야나에게 맡겨진 왕의 표장은 부채와 우산과 샌달을 포함 하고 있었다. 디가 까라야나는 빠세나디 왕의 표장을 가지고 서둘러 수도로 돌아와 비두디바를 왕위에 올렸다.”(Pps.III.351, 전재성님역)

 

 

주석에 따르면 총사령관 디가 까라야나는 자신에게 임시로 맡긴 왕의 상징물을 들고 일종의 모반을 일으킵니다. 이전에 왕이 부처님을 만났을 때 좋지 않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자신에게 화가 닥칠 것을 염려하여 왕을 상징하는 칼, 터어번, 부채, 일상, 샌달을 가지고 수도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돌아가서 왕의 아들 비두디바왕자를 왕위에 앉히고 빠세나디를 폐위했습니다.

 

왕은 부처님을 만나 뵈었으나 왕위를 잃었습니다. 빠세나디왕은 일국을 모든 것을 가진 절대권력자이었으나 방심한 사이에 사령관의 모반으로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마치 라이언킹을 보는 것 같습니다.

 

 

 

 

 

 

백수의 제왕 사자가 사자후를 토하면 모든 짐승들이 두려워하고 전율합니다. 그러나 이빨 빠졌을 때 어떻게 될까요? 사자는 제왕의 권위를 누리지만 노쇠 하였을 때 젊은 도전자에게 자리를 빼앗길 것입니다. 이것이 라이언킹의 운명입니다. 빠세나디 왕도 같은 운명이었습니다.

 

일국의 절대권력자 빠세나디왕은 총사령관의 배신으로 폐위당했습니다. 그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습니다. 아들에게 왕권이 넘어 가자 조카인 마가다국 아자따삿뚜왕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게 도착하여 성문이 닫혀 있는 바람에 성문 밖 한 강당에 쓰러져 밤사이에 죽었다고 합니다. 빠세나디 왕의 말년은 마치 라이언킹의 운명을 보는 것 같습니다.

 

 

스승의 발아래 엎드려

 

인사는 존경심의 발로입니다. 만약 존경하지 않는다면 인사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학생들이 권위에 눌려 고개를 숙이지만 마음속으로 존경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사라 볼 수 없습니다.

 

존경받는 자가 되려면 존경받는 행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단지 사회적 지위나 재산에 따른 권위로 존중받고자 한다면 가식적입니다.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행동하는 것 다르다면, 겉으로는 고개를 숙이는 척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욕할 것입니다. 진정한 권위는 청정한 삶에서 나옵니다. 청정한 삶은 무탐, 무진, 무치의 삶입니다.

 

탐욕이 관용으로, 성냄이 자애로,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뀌었을 때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자입니다. 진정한 권위자는 깨달은 자입니다. 부처님이 지금까지 오체투지의 대상이 된 것은 우리들에게 불사의 진리를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빠세나디 국왕이 아무리 힘이 있어도 부처님만 못했습니다. 빠세나디 왕의 권력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부처님의 자비의 권위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일국의 왕도 부처님에게 무릎 꿇었습니다. 스승의 발아래 엎드린 것입니다.

 

 

2017-03-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