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어떻게 일심동체가 되는가? 육화(六和)와 이상적 공동체

담마다사 이병욱 2017. 3. 15. 14:24

 

어떻게 일심동체가 되는가? 육화(六和)와 이상적 공동체

 

 

철학공부에 대하여

 

EBS교육방송을 즐겨 보고 있습니다. EBS는 다른 방송과 달리 다큐와 교양위주로 되어 있습니다. TV를 시청하면 거의 채널고정입니다. 다큐중에서는 세계테마기행을 빠짐 없이 봅니다. 교양의 경우 인문학강좌를 주로 봅니다.

 

최근 이진우 교수가 진행하는 니체철학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방송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명강사가 진행하는 명강의는 언제 들어도 새롭고 질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철학하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이진우 교수는 방청석에서 어떻게 해야 철학을 잘 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에 이진우 교수는 헤겔철학을 공부한다고 하여 헤겔철학책을 첫 페이페부터 읽어 보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마치 소설 읽듯이 첫 페이지부터 읽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철학에 대하여 싫증날 것이라 합니다. 그 대신 삶의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보라고 했습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철학책을 열어 보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강하게 공감했습니다. 이는 초기불교경전을 대하는 태도와 같기 때문입니다.

 

인내력테스트?

 

어떤 이는 맛지마니까야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고 합니다. 이런 열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경전을 소설 읽듯이 첫 페이지부터 다 읽으려 한다면 대단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래 전에 화엄경과 법화경 읽기에 도전 한 적이 있습니다. 한역을 우리말로 번역한 경전으로 첫 페이지부터 읽어 나가기로 했습니다. 대단한 인내를 필요로 했습니다. 진도는 나가지 않고 의미는 모르겠고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것 끝을 보자는 심정으로 억지로 읽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남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인내력테스트한 것 같았습니다.

 

초기경전을 접할 때

 

초기경전은 방대합니다. 사부니까야와 쿳다까니까야 중의 6개 경전, 그리고 율장 네 권, 여기에다 논장까지 합하면 30여권에 달합니다. 이 많은 책을 다 읽어 볼 수 없습니다. 소설 읽듯이 읽어서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 읽어 보고 싶은 것부터 읽어야 합니다. 논장을 제외하고 경전이라는 것은 아무 곳이나 열어 보아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서로 연결 되어 있고 서로 연계 되어 있어서 소설 읽듯이 첫 페이지부터 읽을 필요는 없음을 말합니다.

 

초기경전을 접하는 태도는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과 연계하면 좋을 듯합니다. 삶의 과정에서 문제에 봉착했을 때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며 관련 경전을 열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희한하게도 거기에는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법이 경전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본다면 문제의식을 가지고 경전을 열어 본다는 것은 이진우 교수가 철학하는 방법에 대하여 알려 주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다툼입니다.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분노

 

세상 살면서 다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툼이 일어난 것을 알고 보면 놀랍게도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것입니다. 남 모르는 사람과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습니다. 늘 가까이 하는 사람, 시모와 며느리, 부모와 자식, 형제나 자매 간의 다툼입니다. 직장에서는 상사와 부하의 다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다툼이 일어날 때는 피튀길 정도로 격렬하다는 사실입니다.

 

다툼은 승속을 가리지 않습니다. 피튀기는 다툼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다툼이 일어 났을 때 이를 지혜롭게 극복하지 못하면 파탄에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증오와 분노, 적개심으로 가득하여 다투었을 때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툼이 일어나면 인간관계가 파괴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초토화 되듯이 다투고 나면 남아 나는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다툼으로 인한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요즘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화합하며 살 수 있을까요?

 

육화요(六和寮)

 

언젠가 비구니도량으로 순례법회간 적이 있었습니다. 비구니 교육기관이기도 한 그 절에는 숙소로 사용되는 전각이 있습니다. 큰 방에서 학인스님들이 함께 머무는 공간입니다. 그 전각을 육화요(六和

)’이라 했습니다. 처음 들어 보는 말입니다.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순례단을 안내한 비구니 스님은 신(), (), (), (), (), ()의 화합을 통한 승가의 여섯 가지 화합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청암사 불상이야기 (2013-04-08)’ 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육화란 무엇인가?

 

육화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여섯 가지 덕목이라 합니다. 생소한 용어이고 생소한 개념입니다. 그런 육화에 대하여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습니다.

 

 

육화(六和)

 

부처님은 공동생활에서 모든 사람이 염두에 두어야 할 여섯 가지의 중요한 윤리덕목(倫理德目)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육화(六和)라 한다.

 

첫째는 같은 계율을 가짐으로써 서로 화동(和同)하고 애경(愛敬)하라(戒和). 둘째는 의견을 같이 하라(見和). 오직 정법(正法)에 의한 정견(正見)만을 같이 해야 한다. 셋째는 이익을 균등하게 나누어 가지라(利和). 넷째는 부드럽게 행동하라(身和) 다섯째는 자비롭게 말하라(口和) 여섯째는 남의 뜻을 존중하라(意和) 육화(六和) 여섯 가지로 화합함을 말함이니 육화경(六和敬)의 간략한 말이다.

 

육화경(六和敬) : 또는 육합념법(六合念法)·육화합(六和合)·육화(六和)등이라고도 함. 수행자(修行者)가 서로에게 행위·견해를 같게 하여 화합하고, 서로 경애하는 여섯가지 방법.

 

대승(大乘)에 있어서의 중생의 화경법(和敬法)으로 하여 설명됨. ① 신화경(身和敬)-예배등을 같이 함. ② 구화경(口和敬)-찬영(讚詠)등을 같이 함. ③ 의화경(意和敬)-신심(信心)등을 같이 함. ④ 계화경(戒和敬)-맑고 정한 훈계를 같이 함. ⑤ 견화경(見和敬)-()등의 견해를 같이 함. ⑥ 이화경(利和敬:行和敬)-야식(夜食)등의 이로움을 같이 함. 이 여섯가지가 모두 남에게 선행을 일깨워주는 것이므로 화()라 하고, 안으로 겸손하여 남의 명예와 이익을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이라고 한 것이다.

 

이 육화경은 그 실천성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달리 표현하기도 한다. ① 신화공주(身和共住)-몸으로 화합함이니 같이 살라. } ② 구화무쟁(口和無諍)-입으로 화합함이니 다투지 말라. ③ 의화동사(意和同事)-뜻으로 화합함이니 같이 일하라. ④ 계화동수(戒和同修)-계로 화합함이니 같이 수행하라. ⑤ 견화동해(見和同解)-바른 견해로 화합함이니 함께 해탈하라. ⑥ 이화동균(利和同均)-이익으로 화합함이니 균등하게 나누라.

(육화, 六和)

 

 

한국콘텐츠진행원에 실려 있는 용어사전입니다. 요지는 계화(戒和), 견화(見和), 리화(利和), 신화(身和), 구화(口和), 의화(意和) 입니다. 공동체생활하는데 있어서 필수적 항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육화의 구성을 보면 신, , 의 삼업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전에서는부드럽게 행동하라, 자비롭게 말하라, 남의 뜻을 존중하라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만 잘 지켜도 공동체 생활에서 다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두 개가 더 추가 되어 있습니다. 계화라 하여 계율을 지켜야 함을 말하고, 견화라 하여 의견을 같이 하라고 합니다.

 

육화의 오리지널 버전은

 

육화에 대한 설명을 보면 대승육화경도 있고, 달리 표현된 육화경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화는 대승불교의 산물일까요? 초기경전을 보면서 놀랍게도 육화에 대한 이야기가 맛지마니까야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육화의 가르침은 맛지마니까야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맛지마니까야 꼬삼비 설법의 경(M48)’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 있습니다.

 

 

1)

수행승들이여, 여기 수행승은 동료 수행자에 대해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자애로운 신체적 행위를 일으킨다. 이것은 새겨 둘 만한 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존경을 만들고, 도움으로 이끌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고, 일치로 이끄는 것이다.

 

2)

수행승들이여, 또한 수행승은 동료 수행자에 대해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자애로운 언어적 행위를 일으킨다. 이것은 새겨 둘 만한 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존경을 만들고, 도움으로 이끌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고, 일치로 이끄는 것이다.

 

3)

수행승들이여, 또한 수행승은 동료 수행자에 대해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자애로운 정신적 행위를 일으킨다. 이것은 새겨 둘 만한 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존경을 만들고, 도움으로 이끌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고, 일치로 이끄는 것이다.

 

4)

수행승들이여, 또한 수행승이 여법한 소득 즉 정당하게 얻어진 것이 있다면, 하나의 발우에 있는 것일지라도, 이와 같이 소득을 남김없이 나누어, 계행을 지키는 동료들과 함께 물건을 사용해야한다. 이것은 새겨 둘 만한 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존경을 만들고, 도움으로 이끌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고, 일치로 이끄는 것이다.

 

5)

수행승들이여, 또한 수행승이 결점이 없고 하자가 없고 섞임이 없고 오염이 없고 자유롭고 방해가 없고 마찰이 없어 삼매에 도움이 되는 계행이 있는데, 수행승은 이와 같은 계행 속에서 동료 수행자들과 함께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계행과의 일치를 도모해야한다. 이것은 새겨 둘 만한 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존경을 만들고, 도움으로 이끌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고, 일치로 이끄는 것이다.

 

6)

수행승들이여, 또한 수행승은 고귀한, 해탈로 이끄는 견해가 있어 그것을 실천하면, 올바로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데, 수행승은 이와 같은 견해에 관하여, 동료 수행자들과 함께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그 견해와의 일치를 도모해야한다. 이것은 새겨 둘 만한 것으로 사랑을 만들고, 존경을 만들고, 도움으로 이끌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고, 일치로 이끄는 것이다.”(M48, 전재성님역)

 

 

신구의 삼업에 대한 것을 보면 자비로운 신체적 행위, 자애로운 언어적 행위,  자애로운 정신적 행위라 하여 자애가 키워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에서 신구의 삼업은 부드럽게 행동하라, 자비롭게 말하라, 남의 뜻을 존중하라라고 설명되어 있어서 그 의미가 확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네 번째 항은 이익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소득이 있을 때 함께 사용하고 나누어야 함을 말합니다. 대승에서는 이익을 균등하게 나누어 가지라라 했습니다. 초기경전과 일치합니다.

 

다섯 번째 항은 계행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삼매에 도움이 되는 계행이라 했습니다. 대승에서는 화동(和同)하고 애경(愛敬)하라라 했습니다. 초기경전의 내용과는 약간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여섯 번째 항은 견해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해탈로 이끄는 견해라 했습니다. 대승에서는 정법(正法)에 의한 정견(正見)만을 같이 해야 한다.”라 했습니다. 그런데 대승에서 또 다른 육화에 대한 것을 보면 견해에 대하여 ()등의 견해를 같이 함이라 되어 있습니다. 후대로 갈수록 변질 되어 감을 알 수 있습니다.

 

견화(見和)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육화에 대하여 신(), (), (), (), (), ()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에서는 계(), (), (), (), (), ()의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육화에 대하여 신(), (), (), (), (), () 순으로 말씀 하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견해에 대하여 가장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해탈로 이끄는 바른 견해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신, , 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고 계행을 청정하게 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바른 견해로 화합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섯 가지 것들 가운데 그것을 실천하여,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해탈로 이끄는 원리로서의 고귀한 견해야말로 가장 뛰어나고 이것이 가장 종합적이고 가장 포괄적이다.”(M48)라고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견해의 화합에 관해 길게 설명합니다. 육화에서 앞서 다섯 가지는 견해의 화합을 위한 예비단계 내지 준비단계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견화는 해탈로 이끄는 바른 견해로서 사성제를 말합니다.

 

육화가 잘 실천 되고 있는 곳

 

부처님이 수행승들에게 여섯 가지 화합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은 꼬삼비에서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여기 꼬쌈비 시의 수행승들은 말다툼하고 언쟁을 하고 논쟁하고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릅니다.”(M48)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분쟁을 부처님도 막지 못했습니다. 부처님은 서로 싸우는 비구들에게 법문한 것이 육화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육화의 법문에 대하여 사랑을 만들고, 존경을 만들고, 도움으로 이끌고, 논쟁의 불식으로 이끌고, 화합으로 이끌고, 일치로 이끄는 것들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아누룻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서로 싸우는 꼬삼비를 뒤로 하고 유행했습니다. 유행하다가 아누룻다가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아누룻다가 있는 승가는 꼬삼비와 달리 화합하며 잘 지냈습니다. 육화가 잘 실천 되고 있는 곳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오염에 대한 경(M128)’에서 아누룻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마을에서 탁발하여 돌아오는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 음료수와 세정수를 마련하고 남은 음식을 넣을 통을 마련합니다.

 

 마을에서 탁발하여 맨 나중에 돌아오는 자는 남은 음식이 있으면, 그가 원한다면 먹고,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풀이 없는 곳에 던지거나 벌레 없는 물에 가라앉게 합니다.

 

 그는 자리를 치우고 음료수 단지나 세정수 단지나 배설물통이 텅 빈 것을 보는 자는 그것을 깨끗이 씻어내고 치웁니다. 만약 그것이 너무 무거우면, 손짓으로 두 번 불러 손을 맞잡고 치웁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그것 때문에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저희들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있습니다.(M128,율장대품 Vin.I.352, 전재성님역)

 

 

이 경은 맛지마니까야와 율장대품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부처님이 “그러면 아누룻다와 존자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화합하고 서로 감사하고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처럼 융화하며 서로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지내고 있는가?”라고 묻자 아누룻다가 위와 같이 답한 것입니다.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기

 

아누룻다의 말을 간단히 한마디로 요약하면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기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오물이 떨어져 있다면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치우는 것입니다. 버리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탁발에서 돌아 오면 먼저 돌아 오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 먼저 온 사람이 자리를 까는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에 상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쓰레기를 먼저 본 사람이 치우듯이 승가공동체에서 자발적으로 솔선수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마을에서 탁발하여 돌아오는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라 했습니다.

 

먼저 본 사람이 먼지 치우기는 순번을 정하는 것도 아니고 담당을 정해 놓은 것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탁발 갔다가 먼저 되돌아 온 자가 식사할 자리를 마련하고, 식사가 끝나면 가장 늦게 먹은 자가 마무리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스템을 가정이나 조직, 단체에 적용한다면 다툼이 없을 것입니다.

 

틀림 없는 부처님 원음

 

맛지마니까야에 있는 오염에 대한 경은 육화, 즉 여섯 가지 화합 하는 것에 대하여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초기경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 경전에서 한 말이 다른 경전에서 보충 설명되어 있는 식입니다.

 

이 경에서 한 말과 저 경에서 한 말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빠알리경전이 틀림 없는 부처님의 원음이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어도 서로 연계 되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 그분 말씀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 경전을 접하면 접할수록 점점 더 신뢰가 생겨 나고 동시에 신심도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승원에도 자물쇠가 있었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 당시에 수행승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율장의 경우 부처님 당시 시대상황을 정확하게 기록 해 놓은 것이라서 고대사연구에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는 경장과 율장이 매우 정확하고 사실적임을 말합니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열쇠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사리뿟따의 사자후의 경(A9.11)’에서 승원의 열쇠이야기가 나옵니다. 수행승들이 머무는 방에 자물쇠가 있음을 말합니다. 경에 따르면 그 때 존자 마하 목갈라나와 아난다가 열쇠를 들고 처소마다”(A9.11)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에 방사마다 열쇠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은 부처님 당시의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기도 합니다. 매우 세세한 내용까지도 기록 되어 있어서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알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 기록중의 하나가 육화에 대한 것입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piyacakkhūhi)

 

아누룻다는 육화를 실천한 자로 묘사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육화에서 몸에 대한 것을 보면 자애로운 신체적 행위를 일으킨다.”(M48)라 되어 있습니다. 언어와 정신에 대한 것도 자애로운 행위를 일으킨다라 하여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애로운 행위를 일으킬까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Taggha maya bhante, samaggā sammodamānā avivadamānā khīrodakībhūtā aññamañña piyacakkhūhi sampassantā viharāmā

 

“세존이시여, 참으로, 저희들은 화합하고 서로 감사하고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처럼 융화하며 서로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지냅니다.(M128, 전재성님역)

 

 

아누룻다는 수행승들이 서로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지냅니다.”라 했습니다. 이구절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서로를 우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 머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우정 어린 눈으로의 차입니다. 이는 빠알리어 ‘piyacakkhūhi’를 번역한 것입니다.

 

빠알리어 ‘piyacakkhūhi’‘piya+cakkhū의 복합어입니다. 여기서 ‘piya’‘dear; amiable; beloved’의 뜻이고, ‘cakkhū’‘eye’을 뜻합니다. 따라서 piyacakkhūhi사랑스런 눈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우정의 눈이라 했습니다. .

 

우정을 뜻하는 말은 일반적을 ‘metta’라 합니다. 사랑을 뜻하는 말은 ‘piya’라 합니다. 특히 삐야(piya)는 남녀나 연인사이, 또는 부모자식 간의 사랑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비록 수행승들이 우정의 공동체에서 살지만 자애를 나타내는 표현에 대하여 metta대신에 piya를 사용한 것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빅쿠보디는 ‘piyacakkhūhi’에 대하여 ‘viewing each other with kindly eyes’라 번역했습니다. ‘상냥한 눈빛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 번역에서 전재성님의 번역 사랑스러운 눈빛으로‘piyacakkhūhi’를 상황에 맞게 가장 잘 번역한 것 같습니다.

 

 

아름답게 묘사된 삼화(三和)

 

수행승들이 서로 사랑스러운 눈빛으로(piyacakkhūhi)”바라 본다고 했을 때, 이 말은 언화(言和)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스런 눈빛으로 지낸다면 다툼이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기 식으로 서로 눈빛 만으로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에서는 신화, 언화, 의화가 모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누룻다의 말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assa mayha bhante, imesu āyasmantesu metta kāyakamma paccupaṭṭhita āvī ceva raho ca. Metta vacīkamma paccupaṭṭhita āvī ceva raho ca. Metta manokamma paccupaṭṭhita āvī ceva raho ca. Tassa mayha bhante, eva hoti: yannūnāha saka citta nikkhipitvā imesayeva āyasmantāna cittassa vasena vatteyya'nti. So kho aha bhante, saka citta nikkhipitvā imesa yeva āyasmantāna cittassa vasena vattāmi. Nānā hi kho no bhante, kāyā, eka ca pana maññe cittanti.

 

세존이시여, 저는 여기 존자들을 향해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자애로운 신체적 행위를 일으키며,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자애로운 언어적 행위를 일으키며, 여럿이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자애로운 정신적 행위를 일으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내가 나의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들의 마음을 따르면 어떨까?’라고 생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래서 저는 제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들의 마음을 따랐습니다. 저희들의 몸은 여러 가지이지만 마음은 하나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몸은 다 다르지만 마음은 하나입니다.(M128, 전재성님역)

 

 

이 문장은 꼬삼비 설법의 경(M48)’에 언급된 육화 중에서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자애인 삼화(三和)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초기경전은 서로 연결 되어 있습니다.

 

일심동체가 되는 과정

 

경에서는 정신적 자애인 의화에 대하여 나타낸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들의 마음을 따르면 어떨까? (yannūnāha saka citta nikkhipitvā imesayeva āyasmantāna cittassa vasena vatteyya'nti.)”라는 구절입니다. 바로 이 마음이야말로 일심동체가 되는 마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경에서는 일심동체가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그래서 저는 제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들의 마음을 따랐습니다. (So kho aha bhante, saka citta nikkhipitvā imesa yeva āyasmantāna cittassa vasena vattāmi.)”라 되어 있습니다. 이제 일심동체가 된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상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견해를 표출하면 합니다. 서로 자신의 견해를 표출한다면 다툼이 그칠 날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마음을 따랐을 때는 어떻게 될까요?

 

내가 그 사람 마음이 되었을 때 다툼이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저희들의 몸은 다 다르지만 마음은 하나입니다. (Nānā hi kho no bhante, kāyā, eka ca pana maññe cittanti)”라 했습니다. 일심동체라 볼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일심이신(一心異身)’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공동체

 

일심동체가 되었을 때 다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기 식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마을에서 탁발하여 돌아오는 자가 자리를 마련하고라고 한 것은 육화 중에서 신화(身和)’에 해당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수행승들은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눈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스러운 눈빛으로말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육화 중에서 언화(言和)라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수행승들은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이는 저는 제 마음을 버리고 이 존자들의 마음을 따랐습니다.”라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심동체가 되었을 때 이는 육화 중에서 의화(意和)라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어느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치우기 운동을 한다면 화합하리라 봅니다. 맞벌이부부라면 먼저 온 사람이 식사준비를 한다든가, 나중에 온 사람이 설거지를 한다든가 하는 식입니다. 여기에다 사랑스런 눈빛으로 말한다면 금상첨화 일 것입니다. 마침내 서로 상대방의 마음을 따랐을 때 한마음이 됩니다. 더 이상 다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의 삶의 방식일 것입니다.

 

 

2017-03-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