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리뿟따존자의 아홉 가지 사자후

담마다사 이병욱 2017. 3. 13. 23:39

 

사리뿟따존자의 아홉 가지 사자후

 

 

여의치 않으면 피하라!

 

사람들은 사과하는 것에 인색한 것 같습니다. 다툼이 있었을 때 서로 마음에 상처받을 것입니다. 대게 감정싸움이기 쉽습니다. 본질은 온데간데 없고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는 싸움이기 쉽습니다. 그럴 경우 일단 멈추어야 합니다. 자리를 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중국 병서에 삼십육계가 있습니다. 마지막 계책은 여의치 않으면 피하라!”입니다. 이를 흔히 삼십육계줄행랑이라 합니다.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서도 피함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가 있다고 했습니다. 노사문제가 일어났을 때 냉각기를 갖듯이, 일단 피하고 보는 것입니다.

 

용서를 빌면

 

싸움을 했으면 반드시 화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먼저 화해를 요청하면 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해는 용기 있는 자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내가 생각해보니 너무한 것 같습니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라고 용서를 빌면 마음이 편합니다. 그럼에도 마음에 담고 있다면 마음의 부담이 되어 피곤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용서를 요청하는 자에게 용서를 받아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용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제자에게 그대가 잘못을 잘못으로 알고 여법하게 참회하였으므로 나는 그것을 받아준다.”(A9.11)라고 했습니다.

 

사리뿟따를 모함한 수행승

 

부처님이 사밧티 시에 있었을 때 입니다. 사리뿟따존자가 안거가 끝나서 유행을 떠나고자 했습니다. 이에 사리뿟따존자를 따르는 수행승들이 함께 떠나고자 했습니다. 이를 좋지 않게 본 한 수행승이 모함했습니다. 부처님을 내버려 두고 무리를 지어 떠나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좋지 않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수행승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존자 사리뿟따가 나에게 부딪치고 사과도 없이 유행을 떠났습니다. (āyasmā ma bhante, sāriputto āsajja appainissajja cārika pakkanto)”(A9.11) 라고 해코지 했습니다.

 

여기서 부딪치다라는 말은 āsajja’입니다. 이 말은 ‘having approached, insulted or knocked against’의 뜻입니다. 초불연에서는 ‘insulted’의 뜻으로 번역하여 세존이시여, 사리뿟따존자는 저에게 모욕을 주고 용서를 구하지 않고 만행을 떠나려 합니다.” (A9.11) 라 번역했습니다. 부딪침과 모욕의 차이입니다.

 

사리뿟따 말하기를

 

부처님은 사리뿟따존자를 불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이에 사리뿟따존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Yassa nūna bhante kāye kāyagatāsati anupaṭṭhitā assa, so idha aññatara sabrahmacāri āsajja appainissajja cārika pakkameyya.

 

세존이시여, 몸에 대하여 몸에 관한 새김이 현존하지 않으면, 그는 여기 어떤 동료를 부딪치고 사과도 없이 유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A9.11, 전재성님역)

 

 

길을 가다가 누군가와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경우 미안합니다.”라거나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도 몸이 부딪친 것을 알았다면 사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리뿟따는 늘 신체적인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딪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수행승은 사리뿟따가 자신을 치고 같다고 해코지 하고 있습니다.

 

‘kāya’āsajja’에 대하여

 

이 구절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세존이시여, 참으로 몸에서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립하지 못한 자는 다른 동료 수행자에게 모욕을 주고 용서를 구하지 않고 만행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A9.11, 대림스님역)라고 번역했습니다. 다른 점은 모욕입니다. 전재성님은 부딪침’이라 했습니다. 어느 번역이 맞을까요?

 

빠알리 원문을 보면 ‘kāye kāyagatāsati’라 하여 몸에 대하여 몸에 관한 새김또는 몸에서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립으로 번역했습니다. 신체의 접촉에 따른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āsajja’에 대하여 모욕이라 번역하여 마치 말싸움 난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모욕이라는 말은 몸을 뜻하는 빠얼리어‘kāya’와 맞지 않아 부적절한 번역으로 봅니다.

 

빅쿠보디는 관련구절에 대하여 “Bhante, one who has not established mindfulness directed to the body in regard to his own body might strike a fellow monk and then set out on tour without apologizing.” (A9.11)라고 번역했습니다. 빠알리어 āsajja’에 대하여 부딪침의 의미가 있는‘strike’로 번역했습니다. 이는 몸과 관련된 말이기 때문에 적절하다고 보여집니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의 번역어 모욕은 부적절한 번역으로 봅니다.

 

땅과 같은 마음으로

 

사리뿟따존자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수행승은 몸을 부딪친 것에 대하여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다고 사리뿟따존자를 비난하고 다녔습니다. 더구나 부처님에게 까지 해코지 했습니다. 그러자 사리뿟따는 부처님 앞에서 해명합니다.

 

사리뿟따존자에 따르면,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놓쳤다면 부딪쳤어도 부딪친지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사리뿟따존자는 늘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걷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몸에 대하여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자에 대하여 아홉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존자의 아홉 가지 사자후라 합니다.

 

사리뿟따존자의 아홉 가지 사자후 중에 가장 첫 번째로 예로 든 것은 입니다. 사리뿟따존자는 몸에 대한 새김이 없는 자는 부딪쳤어도 사과 한마디 없이 넘어 갈 수도 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Seyyathāpi bhante, pahaviya1 sucimpi nikkhipanti, asucimpi nikkhipanti, gūthagatampi nikkhipanti, muttagatampi nikkhipanti, khelagatampi nikkhipanti, pubbagatampi nikkhipanti, lohitagatampi nikkhipanti, na ca tena pahavī aṭṭīyati vā harāyati vā jigucchati vā evameva  kho aha bhante pahavisamena cetasā viharāmi vipulena mahaggatena appamāena averena abyāpajjhena.

 

세존이시여, 예를 들어 마치 땅에 깨끗한 것을 버리더라도, 깨끗한 것을 버리더라도, 더러운 것을 버리더라도, 똥을 버리더라도, 오줌을 버리더라도, 침을 버리더라도, 고름을 버리더라도, 피를 버리더라도, 그 때문에 땅이 번민하거나 수치스러워 하거나 기피하는 것이 없듯, 이와 같이 세존이시여, 저는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땅과 같은 마음으로 지냅니다.”(A9.11, 전재성님역)

 

 

사리뿟따 존자는 땅과 같은 마음으로 지낸다고 했습니다. 그런 땅은 무엇이든지 다 받아 줍니다. 땅에 침을 뱉어도 땅은 무어라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땅에 똥을 싸도 땅은 무어라 하지 않습니다. 이런 땅에 대하여 한량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마음으로 비유했습니다. 신체에 대한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자, 즉 사리뿟따존자와 같은 자는 네 가지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를 말합니다.

 

번역비교해 보면

 

전재성님 번역과 비교하여 초불연 번역을 보면 이와 다릅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예를 들면 그들이 땅에 깨끗한 것을 던지기도 하고, 더러운 것을 던지기도 하고 똥을 누기도 하고 오줌을 누기도하고 침을 뱉기도 하고 고름을 짜서 버리기도 하고 피를 흘리기도 하지만 땅은 그 때문에 놀라지 않고 주눅 들지도 않고 넌더리치지도 않듯이, 세존이시여, 그와 마찬가지로 저는 땅과 같이 풍만하고 광대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고통 없는 마음으로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몸에서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립하지 못한 자는 다른 동료 수행자에게 모욕을 주고 용서를 구하지 않고 만행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A9.11, 대림스님역)

 

 

차이는 마지막 문장에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몸에서..”로 시작되는 문장이 하나 더 있는 것입니다. 이문장은 빠알리원문에 없는 것으로 불필요하게 삽입된 것으로 봅니다. 빅쿠보디역을 보면 Just as they throw pure and impure things on the earth-—feces, urine, spittle, pus, and blood—yet the earth is not repelled, humiliated, or disgusted because of this; so [375] too, Bhante, I dwell with a mind like the earth, vast, exalted, and measureless, without enmity and ill will.”라고 되어 있어서 초불연 번역이 이중번역 되어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사리뿟따존자의 아홉 가지 사자후

 

사리뿟따 존자는 아홉 가지 예를 들어 사자후를 토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1)땅과 같은 마음, 2)물과 같은 마음, 3)불과 같은 마음, 4)바람과 같은 마음, 5)걸레와 같은 마음, 6)천민아이와 같은 마음, 7)뿔 잘린 황소와 같은 마음으로 지낸다고 했습니다. 또 사리뿟따 존자는 자신의 몸에 대하여 8)괴로워 하고 수치스러워 하고 혐오 스러워 하는 것이라 했고 9)구멍과 째진 곳으로 흘러나오는 곳이라 했습니다.

 

 

 

 

 

여법하게 참회하면

 

사리뿟따존자가 부처님 앞에서 몸에 대한 알차차림을 유지하는 한 신체접촉으로인한 다툼이 있을 수 없음을 아홉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에 사리뿟따존자를 모함하려던 수행승은 자신의 잘못을 부처님에게 고백합니다.

 

부처님은 수행승의 잘못을 받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잘못을 잘못으로보고 여법하게 참회하였으므로 나는 그것을 받아준다.”라 했습니다. 진정으로 참회한 자의 잘못을 받아 준 것은 계율의 성장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잘못을 참회하는 수행승에게 사리뿟따에게도 잘못을 고백하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여, 여기서 그의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갈라지기 전에 이 어리석은 자를 용서하라.”라고 말합니다. 이에 사리뿟따존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Khamāmaha bhante tassa āyasmato sace ma so āyasmā eva māha: khamatu ca me so āyasmāti.

 

세존이시여, 만약 그가 저에게 존자여 나를 용서해 주시오.’라고 말하면, 저는 그 존자를 용서하겠습니다.”(A9.11, 전재성님역)

 

 

잘못했으면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면 용서를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수행승은 사리뿟따가 아닌 부처님에게만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당사자인 사리뿟따에게 용서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머리가 일곱조각 날 것이라 합니다. 성자를 해코지하는 과보가 매우 무서움을 알 수 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잘못을 용서하면 받아 줄 것이라 했습니다.

 

걸레와 같은 마음으로

 

매맞은 사람이 다리 뻗고 잘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과하거나 용서를 비는 것은 마음의 부담을 덜어 줍니다. 다툼이 발생했을 때 용서를 빌고 사과를 하면 상대방도 마음이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용서와 사과할 마음이 있다는 것은 한량 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네 가지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다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는 1)땅과 같은 마음, 2)물과 같은 마음, 3)불과 같은 마음, 4)바람과 같은 마음, 5)걸레와 같은 마음, 6)천민아이와 같은 마음, 7)뿔 잘린 황소와 같은 마음으로 비유했습니다. 이중 걸레와 같은 마음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에 대하여 몸에 관한 새김이 현존하지 않으면, 그는 여기 어떤 동료를 부딪치고 사과도 없이 유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예를 들어 걸레로 깨끗한 것을 닦더라도, 더러운 것을 닦더라도, 똥을 닦더라도, 오줌을 닦더라도, 침을 닦더라도, 고름을 닦더라도, 피를 닦더라도, 그 때문에 걸레가 번민하거나 수치스러워 하거나 기피하는 것이 없듯, 이와 같이 세존이시여, 저는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걸레와 같은 마음으로 지냅니다.”(A9.11, 전재성님역)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걸레는 부정적 이미지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 걸레는 긍정적 이미지입니다. 걸레는 똥, 오줌 등 모든 것을 닦아 냅니다. 그렇다고 걸레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걸레는 걸레의 역할을 충실히 할 뿐입니다.

 

항상 신체적인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있는 자는 다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네 가지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량 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싸움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가 사리뿟따 존자입니다. 걸레는 똥이나 오줌을 치워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한량 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마음을 내는 자, 즉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을 내는 자에 대하여 걸레와 같은 마음으로지낸다고 했습니다.

 

 

2017-03-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