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해 윤회는 없다? 과학적 유물론자의 오만과 편견

담마다사 이병욱 2017. 3. 22. 10:19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해 윤회는 없다? 과학적 유물론자의 오만과 편견

 

 

그들은 왜 이혼했을까?

 

이혼사유를 보면 성격(性格)차이라 합니다. 성격차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각 개인이 지닌 특유한 성질이나 품성차이일 것이라고 사전적으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특유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성격은 타고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라문 청년이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생겨납니까?”(M135) 라며 묻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자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 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작용에 대하여 말씀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바라문 청년이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연기법은 원인조건결과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모든 행위는 모든 결과의 원인이 됩니다. 그렇다고 행위를 지은 즉시 과보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차이가 있습니다. 조건이 맞아야 과보를 받습니다. 업이 달리 익는 것입니다. 그래서 업이숙(業異熟: kammavipaka)’이라 합니다.

 

성격차이로 이혼했다면 이혼할 만한 원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잠복해 있던 원인이 조건을 만났을 때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기간이 사람에 따라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과 여러 가지 조건이 복합적으로 얼키고 설켜서 업의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의 성격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연기법적으로 사유해야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다릅니다. 일란성 쌍둥이라도 잘 눈여겨 보면 다른 데가 있습니다. 성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물건이 똑같아 보여도 자세히 뜯어 보면 다른 데가 있습니다.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결과로서 나타나는데 그 과정에서 조건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연기법은 원인(hetu: )과 조건(paccaya: )과 결과(phala: )로서 이루어집니다.

 

연기법은 인연과(因緣果)’로 설명됩니다. 그래서 인과법또는 인연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서 설명되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Katamo ca bhikkhave, paiccasamuppādo? Avijjāpaccayā bhikkhave, sakhārā. Sakhārapaccayā viññāa.)”로 시작 되는 십이연기 정형문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불교인들은 연기법적으로 사유해야 합니다. 연기법적으로 사유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업과 업의 작용인 것을 알게 됩니다. 업과 업의 작용을 아는 것이 정견(正見)입니다.

 

강병균교수의 윤회무용론

 

만일 불교인이 업과 업의 작용을 배제하고 설명한다면 견해(diṭṭhi: 私見)’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 예를 수 없이 봅니다. 불교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안다는 스님들이나 학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최근 교계신문에서 이런 칼럼을 보았습니다.

 

 

윤회론을 믿으면 오히려 해가 된다지금의 기억이 까마득히 지워질다음 생에 대한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말로는 윤회론을 믿는다 해도무의식적으로는 무시한다죽을  기억이  사라진다면 새로 태어나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그런 윤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강병균교수, 윤회론 해악 허점, 불교닷컴, 2017-03-21)

 

 

강병균 교수는 윤회론이 해악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윤회론에 허점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과학적 사실에 기반하여 글을 쓰고 있는 강병균 교수의 이런 주장은 한두번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업과 업의 작용의 부정이며,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의 부정입니다.

 

강병균 교수에 따르면 윤회무용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설령 윤회가 참이라 하더라도 새롭게 태어나는 자에게 있어서 윤회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음을 말합니다.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래서 그런 윤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라며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이전 생을 기억할 수 없지만

 

이전 생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기억할 수 있는 한계는 아마 육칠세 정도 인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사건에 한정됩니다. 그렇다고 육칠세 이후 모든 일들이 다 기억 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일, 인상 깊었던 것, 처음 겪었던 사건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수 십년을 산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많은 세월을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일년 전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제의 일도 잘 기억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나는 일년 전의 나와 십년 전의 나와 다른 나가 아닙니다. 그 사이에 사건이 무수히 있었습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무수한 행위를 하며 살아 온 것입니다.

 

행위를 빠알리로 깜마(kamma)라 하고 한자어로는 업()이라 합니다. 이 순간에도 업을 짓고 있습니다. 어제도 업을 지었고, 물론 일년 전에도 없을 지었고, 십년 전에도 업을 지었습니다. 지은 행위()는 조건이 맞으면 결과로서 나타납니다.

 

죄를 지은 자가 숨어 보려 하지만 발각 되었을 때 처벌 받습니다. 죄를 지으면 언제 어떻게 발각될지 알 수 없습니다. 곧바로 발각될지, 일년 후가 될지, 아니면 일생동안 발각되지 않을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조건만 맞으면 언제든지 결과로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알기 쉽게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라문 청년이여, 이 세상에 어떤 여자나 남자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데, 잔인하여 손에 피를 묻히고 살육에 전념하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하여 자비심이 없습니다. 그는 그 행동과 그와 같은 행동의 결과로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 그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나지 않고 만약에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어떠한 곳에 재생하더라도 목숨이 짧습니다. 바라문 청년이여,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잔인하여 손에 피를 묻히고 살육에 전념하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하여 자비심이 없는 바로 이와 같은 행위는 목숨이 짧은 운명으로 이끕니다.” (M135, 전재성님역)

 

 

오계중에 살생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면 악처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입니다. 설령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목숨이 짧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전형적인 업과 업의 작용에 대한 것입니다.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살인을 원인으로 하여 죽음이라는 조건을 맞았을 때 지옥 등 악처에 태어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업과 업의 작용은 당장 나타날 수도 있지만 시간을 두고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살인을 한 자가 발각되지 않는 완전범죄를 완성했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 라 했습니다. 마치 해질녘에 산그늘이 지는 것처럼, 살인이라는 끔찍한 행위가 엄습할 것이기 때문에, 그 끔찍한 사건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업과 업의 작용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의 가르침입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그렇게 살아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결과이고, 또한 오늘은 내일의 원인이 됩니다. 이를 확장하면 전생과 내생은 자연스럽게 전개됩니다. 어제의 나, 일년 전의 나, 십년 전의 나를 부정하지 못하듯이, 간난아기 시절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여, 그 시기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전 생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를 알 수 없지만

 

현재의 나는 무수한 원인과 무수한 조건의 산물입니다. 오늘의 나가 어제의 나와 같지 않은 것은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조건은 어제의 조건과 같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동일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변화가 있습니다.

 

그날이 그날 같아 보이지만 해는 점점 길어져서 춘분이 이제 막 지났습니다. 이삼주 후에는 벚꽃을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올해의 나는 지난해의 나와 같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많이 변했습니다. 이를 확장한다면 청년기의 나와 같지 않고, 소년기의 나, 유년기의 나와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옛날의 나가 아니다!(I am not what I was!)”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연기법적으로 조건 지어진 나입니다. 그런 나는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흰머리가 더 많아지고 주름은 더 늘어나 늙어 보일 것입니다. 그러다 죽음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죽음 이후를 알 수 없습니다. 아직 죽어서 돌아 온 자도 없기에 죽음 이후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종교에서는 천국을 이야기하고 지옥을 이야기합니다. 오로지 보이는 것만 믿는 자들은 죽음 이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부정합니다. 당연히 윤회도 부정됩니다. 대체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전재성박사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 죽으려고 했다 합니다. 그렇다고 목을 매단다거나 자결한다든가 하여 치사하게 죽지 않으려 했다.’고 합니다. 이왕 죽을 바에는 수행하다 죽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천에 앉아 죽으려 했는데 그 때 생각한 것은 죽음 다음에 분명히 새로운 세계가 있을 것이다.’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과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으로 확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호흡이 느려지면서 이마에 빛이 나오며 온 우주가 빛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마치 빨려 들어 가듯이 정신을 잃었다고 합니다. 서서히 깨어 났을 때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에 경전을 읽어도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빠알리 경전을 보니 그 체험의 내용이 경전에 순서대로 상세하게 기록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테리가타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 이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르침에 따르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라 합니다. 이는 형성과정에 따른 불교적 세계관 도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도표에는 육도윤회가 있습니다. 어떤 회의론자는 왜 하필이면 육도윤회냐고 반문합니다. 10도 윤회, 20도 윤회도 될 수 있지 않느냐 말합니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왜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만 있는지도 의문일 것입니다. 이를 회의적 의심이라 합니다. 이는 가르침에 대한 의심입니다. 구체적으로 연기법에 대한 의심입니다. 또 다른 말로 업과 업의 작용에 대한 의심입니다.

 

가르침을 의심하는 회의론자들은 절대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없다고 합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조건으로서 유신견과 회의적 의심과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 타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한다면 영원히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어서 윤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음 이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추론으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듯이, 이번 생은 이전 생에서 조건지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이 있으면 내일이 있습니다. 이번 생이 있으면 다음 생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의 법칙으로 명확하게 증명됩니다.

 

과학의 잣대로

 

강병균교수는 회의론자라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칼럼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가르침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윤회에 대하여 전생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합니다. 만일 강병균 교수의 이론이 참이라면 왜 사람들의 모습이 서로 다르고, 사람들의 성향이 서로 다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 합니다. 물론 유전자 연기론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생태유전자와 문화유전자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론은 물질에 바탕을 둔 과학적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 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과학의 잣대로 들이 댔을 때 정신적 현상은 모두 미신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일까 수학자 강병균 교수는 칼럼 말미에 이렇게 주장합니다.

 

 

인도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보라과학은 발달하지 못하고 점술·풍수·사주·미신·부적·점성술  온갖 사이비가 판을 친다.” (강병균교수, 윤회론 해악 허점, 불교닷컴, 2017-03-21)

 

 

 

 

 

 

동남아시아라면 태국, 미얀마 등 테라와다 불교국가도 해당될 것입니다. 그런데 강병균 교수는 이들 국가들이 못산다고 하여, 물질문명의 혜택을 덜 받았다고 하여 미개한 나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였다고 하여 정신문명도 덩달아 발달하는 것일까요? 물론 가능하기도 할 것입니다.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라 제도도 바뀌어 인본위주로 바뀌었을 때 행복한 삶도 보장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정신문명이 물질문명의 속도로 따라가는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여전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만과 편견의 극치

 

상윳따니까야에 견해상윳따(S24)’가 있습니다. 여기서 견해(diṭṭhi)라는 말은 사견(私見)을 뜻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사람들의 생각을 뜻합니다. 그런 견해에는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 빠꾸다 깟짜야나의 도덕부정론 등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스승의 가르침이 총 망라 되어 있습니다. 모두 빗나간 견해입니다. 그래서 사견(邪見)이라고도 합니다.

 

강병균교수의 과학에 바탕을 둔 불교적 해석은 사견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관련이 없는 강병균 교수의 개인적 견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이른 아침 맺혀 있는 이슬처럼 햇볕이 비치면 사라져 버릴 희론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스승이 없는 시대에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요? 특히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단멸론적 견해가 난무하는 시대에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요? 부처님은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실천하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M60)라 했습니다.

 

스승이 없는 시대입니다. 설령 스승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법을 말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믿을 만한 스승이 없으면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온갖 견해가 난무하는 시대에 의지할 것은 초기경전입니다.

 

초기경전은 부처님의 원음이 실려 있습니다. 초기경전은 마치 헌법과도 같습니다. 법을 위반했을 때 법전을 열어 보듯이, 의문 나는 것이 있을 때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됩니다. 열어 보아서 부처님 가르침과 맞지 않으면 버려야 합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과학을 기반으로 한 신종단멸론입니다.

 

물질문명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과학의 발달에 따른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정신문명도 발전하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물질문명이 극대화된 사회가 이천오백년 전 부처님 당시의 정신문명 보다 더 낫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퇴보한 면도 있습니다.

 

과학을 신봉하는 자들은 과학에 대한 맹신에 따라 가르침을 의심합니다. 그 결과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초기경전과 대조 해 보았을 때 사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견을 말하는 자는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여 윤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거나, 단지 물질문명의 혜택을 덜 받은 나라에 대하여 미개한 나라로 간주합니다. 과학적 물질주의에 기반한 오만과 편견의 극치라 보여집니다.

 

 

2017-03-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