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세상에 직선실현등을 달고
M스님으로부터 개인카톡을 받았습니다. 카톡에는 등하나 달라는 글이 짤막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을 몇 일 앞두고 받은 카톡에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사업잘되시기고 가정의 평화로움과 가족의 건강과 행운을 축원하면서 2017년도 부처님오신날 등하나 달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OO스님_()_”이라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계좌번호를 알려 주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받고 한참 동안 망설였습니다.
소원등을 다는 이유
불자들은 부처님오신날에 대부분 절에 갑니다. 인연있는 절에 가서 법문듣고, 관불하고, 등을 달고, 점심공양으로 비빔밥 먹는 것이 보통입니다. 비록 일년에 한번에 지나지 않지만 등을 다는 행위로 인하여 자신은 ‘불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이 불자인지 아닌지 정체성을 혼란을 겪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설문조사했을 때 드러납니다. 일년에 한번 절에 가서 등다는 것에 대하여 “내가 불자 맞어?”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경계에 있는 불자들이 그날의 감정에 따라 불자라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불교인구 3백만명이 빠진 이유에 대하여 ‘주인의식’을 들기도 합니다.
일년에 한번이라도 절에 가서 등을 다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임에 틀림 없습니다. 대부분 공덕을 바라고 짓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사대소원, 즉 건강, 학업, 사업, 치유목적입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이유로 불자들은 절에 ‘소원등’을 답니다. 그 결과 절에 가면 울긋불긋 연등으로 장관을 이룹니다. 그러나 등을 단다는 것이 반드시 절에 가서 다는 것이 아님을 이번 개인카톡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직선실현등을 달고
M스님으로부터 개인카톡을 받고 한동안 망설였습니다. 마침내 결단을 내려 송금해드렸습니다. 작은 금액이지만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등을 하나 달기로 했습니다. 발원은 사대소원이 아닌 ‘직선실현’으로 했습니다. M스님이 최근 조계종총무원장 직선실현을 위하여 삼보일배를 한바 있기 때문입니다. 등을 달게 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직선제카톡방에서 M스님과 설전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M스님의 원칙주의와 충돌하는 또 한분의 스님과의 논쟁을 지켜 보는 과정에서 개입한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결국 M스님은 퇴장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작용하여 등을 달기로 했습니다.
사이버상에 등을 달았습니다. 처음 있는 일입니다. 송금할 때 직선실현이라는 문자를 남겼습니다. 직선실현등이 된 것입니다. 등이라는 것이 절에 가서 다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상식을 깬 것입니다. 그렇다고 M스님이 어떤 식으로 등을 달아 줄지 알 수 없고, 또한 어떤 식으로 축원을 해줄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 다니는 M스님에게 ‘보시해 주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M스님이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돈으로 보시해서는 안되지만
M스님과 개인적으로 이야기해 본적이 없습니다. 카톡방에서 대화한 것이 고작입니다. 그런데 M스님은 페이스북, 카톡 등 사이버상에서 매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이버공간이긴 하지만 수 많은 사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스님이 가입한 여러 카톡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스님이 초대한 카톡방에는 국회의원 등 각계각층 유명인사들도 많습니다. 아마 수 백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오신날 등하나 달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는 개별카톡을 보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카톡을 보고서 송금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M스님에게 작은 금액이나마 송금했습니다. 사이버상에서 등달기는 사실상 불가능기 때문에 스님에게 보시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원래 스님에게 돈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염불선으로 유명한 청화스님은 생전에 “스님에게 돈주지 마세요. 호주머니에 돈 있으면 공부안합니다.”라 했습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수행자에게는 사대필수품을 보시했습니다. 그것은 먹을 것, 입을 것, 와좌구, 필수의약품입니다. 이것 외에 금은을 보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누군가 금과 은을 허용할 수 있다면 그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 (S42.10) 라 했습니다. 청화스님이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금과 은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허용한다면 당신은 그를 수행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거나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고 확실히 여겨도 좋습니다.” (S42.10) 라 했습니다. 금과 은을 받는 자는 부처님제자가 아님을 말합니다. 그러나 한국적 현실에서 사대필수품만을 보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대게 돈으로 보시하고 맙니다.
보시공덕에 대하여
불자들은 보시공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아난다여, 축생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백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M142)라 했습니다. 동물에게 천원어치의 먹을 것을 주었을 때 백만원이 갚음이 기대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큽니다. 사람중에서도 부도덕한 자에게 보시하는 것조차 천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고 했습니다. 도덕적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보시하면 십만배라 했습니다. 하물며 수행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클 것입니다.
보시를 할 때 바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에게 만원을 보시했을 때 십만배의 갚음이 기대된다면 10억원이 됩니다. 만원 보시해서 10억원의 갚음을 기대하며 보시한다면 보시할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가를 바라고 보시했을 때 청정한 것은 아닙니다. 티내고 주지 않는 것, 상을 내지 않고 주는 보시가 가장 수승하다고 했습니다. 무주상보시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금강경에서는 강조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
부처님오신날 절에 가서 등을 다는 행위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떠돌이 스님에게 사이버상에 등하나 달아 주는 것도 역시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그러나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는 쓸데 없는 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중에는 “천국이 어디있고 지옥이 어디 있어! 죽으면 끝이지!”라며 단멸론적 사고를 가진 자가 있습니다. 몸이 파괴되어 죽으면 정신도 흩어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견해를 가진 자에게 있어서 보시는 어리석은 자나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라는 견해를 갖게 됩니다.
업과 업의 과보를 믿는 불자들은 보시공덕을 믿습니다. 부처님은 동물에게 보시해도 갚음이 기대된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절에 가서 삼보공덕을 찬탄하며 등하나 다는 공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현자는 보시하고 어리석은 자는 보시하지 않는다.”가 될 것입니다. 사이버상에서 M스님은 보시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작은 금액이나마 보시했습니다. 이런 행위가 과연 “어리석은 자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 라 볼 수 있을까요?
보시는 청정해야
보시는 청정해야 합니다. 최상의 보시는 받는자나 주는자나 모두 청정했을 때라 합니다. 그러나 받는자가 청정하지 않더라도 주는자가 청정하면 청정한 보시라 합니다. 반대로 주는자가 청정하지 않더라도 받는자가 청정하면 역시 청정한 보시가 됩니다. 최악의 보시는 받는자나 주는자나 모두 청정하지 않을 때입니다.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바라는 자에게 부정하게 취득한 것을 보시했을 때 그 보시공덕이 크지 않다고 합니다. 최상의 보시는 받는자나 주는자 모두 청정했을 때입니다.
“계행을 지키는 자가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보시하는 자의 덕행이 보시를 청정하게 만드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가 계행을 지키는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지 않고
여법하지 않게 얻어진 것을 불신의 마음으로 보시하면
보시 받는 자의 덕행이 보시를 청정하게 만드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가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지 않고
여법하지 않게 얻어진 것을 불신의 마음으로 보시하면
어느 쪽의 덕행도 보시를 청정하게 만들지 못하네.
계행을 지키는 자가 계행을 지키는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보시는 굉장한 과보를 가져온다고 나는 말한다.
탐욕을 떠난 자가 탐욕을 떠난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보시는 세간적인 보시 가운데 최상이라고 나는 말한다.”
(M142, 전재성님역)
2017-05-06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즐겁고 유쾌한 제1회 마하마야페스티벌 (0) | 2017.05.14 |
---|---|
인간권력은 저열한 것, 왕권이 부럽지 않은 포살공덕 (0) | 2017.05.10 |
왜 자비광명이라 하는가? 부처님오신날과 정법시대 (0) | 2017.05.04 |
분노가 일어나면 톱의 비유를 (0) | 2017.04.28 |
한번 넘어진 의자는 (0) | 2017.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