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분노가 일어나면 톱의 비유를

담마다사 이병욱 2017. 4. 28. 17:03

 

분노가 일어나면 톱의 비유를

 

 

내뜻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이 나고 심하면 분노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어떤 이는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화를 참지 말고 발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절대 화를 내서는 안됩니다. 범부들은 화를 낼 수 있지만 깨달은 자는 화를 낼 수 없습니다. 무아의 성자에게 있어서 분노라는 오염원은 이미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학인에게는 짜증, 불만족 등 성냄을 뿌리로 하는 오염원이 미세하게 나마 남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톱의 비유에 대하여 환기하라.”(Thag.445)

 

 

테라가타에 실려 있는 브라흐마닷따장로의 게송입니다. 장로는 어느 날 도시로 탁발하러 들어 갔는데, 한 바라문이 그에게 욕설을 했습니다. 장로는 그것을 듣고 침묵하며 탁발을 계속했습니다. 바라문은 또 다시 욕설을 퍼 부었습니다. 장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장로는 이런 일을 상기하면서 부처님이 설한 분노하는 자에게 화를 내는 자는 그 때문에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S7.3) 라는 게송을 읊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톱의 비유에 대한 게송을 읊었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톱의 비유를 상기하라고 했습니다. 명상주제를 닦는 자에게 분노가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면 스승이 말씀 하신 톱의 비유를 상기하라는 말입니다. 맛지마니까에 실려 있는 톱의 비유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양쪽에 손잡이가 있는 톱으로 도적들이 잔인하게 그대들의사지를 조각조각 절단하더라도, 그때 만약 마음에 분노를 일으킨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될 수 없다.” (M21, 전재성님역)

 

 

모욕적이고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참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인의 경지에 이르러야 참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도적들이 사지를 톱으로 절단 내더라도 분노의 마음을 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만약 화를 낸다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내어야 할까요?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마음은 그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고, 추악한 말을 뱉지 않을 것이고,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미워하지 않고 안녕을 기원하며 불쌍히 여길 것이다. 그래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이 사람을 채우리라. 이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세상을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게,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채우리라.”(M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사지가 절단 나는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자애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장 먼저 사지를 절단내는 도적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연민의 마음을 내라고 했습니다. 나를 죽이는 도적에게 자비의 마음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브라흐마닷따장로는 바라문들에게 모욕을 당해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부처님이 설한 톱의 비유를 들어 분노가 일어나면 톱의 비유에 대하여 환기하라.”(Thag.445)라고 했습니다.

 

이유 없이 분노의 마음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무시당했거나 모욕당했다고 생각할 때 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자비사상에 따르면 그런 것들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내라고 했습니다. 마치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경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기독경보다는 더 포괄적입니다. 원한 맺힌 자를 사랑하는 것을 너머 우주에까지 확산시키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게,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로운 마음이라 합니다.

 

아사와(번뇌)가 소멸된 성자에게 유아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사지가 절단된다고 해도 무아의 성자에게는 열반에 이르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치 뿐나존자가 이교도 지역에 전도하러 가면서 “세존이시여, 만약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이 날카로운 칼로 저의 목숨을 빼앗으면, 그 때 저는 이와 같이 ‘몸 때문에 목숨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하고 참괴하고 혐오하여 칼로 자결하길 원하는 세존의 제자들도 있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도 칼로 자결하는 셈이다.’라고 말하겠습니다.”(S35.88)라 한 것과 같습니다.

 

번뇌 다한 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축복과도 같은 것입니다. 오염원이 소멸된 유여열반에서 오온이 소멸하는 무여열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온이 내것이라고 여기는 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진짜 죽음을 의미하지만, 오온에 대한 집착이 없는 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죽어도 죽지 않은 불사(不死)’가 됩니다. 이교도 지역으로 포교를 떠나는 뿐나존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바라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라한이 아닌 성자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라한과 완전한 열반을 말합니다. 지금 도적에게 붙잡혀 사지가 절단될 위기에 처해 있는 빅쿠가 죽는 순간을 알아차리면서 임종을 맞이한다면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한꺼번에 두 가지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를 ‘사마시시(samasīsī)’라 합니다.

 

사마시시와 관련하여 앙굿따라니까야에는 근거가 되는 경이 있습니다. ‘무상에 대한 관찰의 경에 따르면 “그는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진다.(A7.16)”라 했습니다. 이 말은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지는 것”(Mrp.IV.6-7) 을 말합니다.

 

번뇌가 다한 성자에게 있어서 목숨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설령 번뇌가 미세하게 남아 있는 성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아라한과 완전한 열반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이 톱의 비유를 든 것은 일반사람들이라기 보다 명상주제를 닦고 있는 제자라 했습니다.

 

 

201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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