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중도(政治中道)는 가능한가?
정치의 계절입니다. 세칭 장미대선을 앞두고 케이블채널과 인터넷 게시판을 즐겨 보고 있습니다. 이전 수 년 동안 정치에 무관심했지만 매스컴에서 회자 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정치의 계절이 온 것 같습니다.
장미대선 첫 번째 TV토론을 보았습니다. 다섯 명의 주자가 상호토론하는 과정을 밤늦게 까지 지켜 보았습니다. 심야에 끝난 토론에 잠을 설쳤습니다. 생활의 리듬이 깨진 것입니다. 거의 두 시간 반 동안 진행된 토론에서 나름대로 감(感)이 왔습니다. 확실시 토론해 보아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정치의 계절에 정치를 외면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정치가 우리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잘 뽑은 지도자는 평화를 가져 오지만 못난 지도자를 뽑으면 전쟁이 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력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훌륭한 인물이 있었음에도 결과를 보면 늘 실망이었습니다.
다양한 이념스펙트럼
정치판은 ‘이데올로기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소위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이 지배합니다. 보수와 진보는 양극단입니다. 두 개의 거대한 정당이 사활을 건 싸움을 해 왔습니다. 총칼만 들지 않을 뿐 전쟁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최근 양극단체제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제3당의 등장으로 인하여 양극단에 의한 죽기살기식 전쟁이 사라진 것입니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정당이라면 ‘중도’일 것입니다. 여러 당이 있다면 그 스펙트럼은 반드시 좌에서 우로 전개됩니다. 극좌, 중도좌파, 중도, 중도우파, 극우파식입니다. 이번 장미대선 대진표를 보니 다섯 명의 후보자가 극좌, 중도좌파, 중도, 중도우파, 극우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이념 스펙트럼이 다양합니다. 다섯 명의 대선후보가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념의 정당이 많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합니다. 만일 일당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일당독재가 독재가 될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 두 개의 정당만 있다면 극한 대립이 끊임 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 사이에 정당이 존재한다면 서로 협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되치기 당한 극우파 후보
장미대선 첫 번째 TV토론에서 극보수 H후보가 “후보는 좌파입니까 우파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중도 위치에 있는 A후보는 “저는 상식파입니다.”라며 내치듯이 짤막하게 답했습니다. A후보는 상식 밖의 질문을 받고 당황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저 없이 곧바로 상식파라 했습니다. 이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고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극보수 H후보가 좌파인지 우파인지 물어 본 것은 전략에 따른 것이라 봅니다. 아마 ‘중도’라고 대답을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A후보는 그런 유도에 걸려 들지 않았습니다. 만약 중도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준비된 공세로 들어 갔을 것입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박쥐’라거나 ‘사쿠라’ 등 기회주의자로 몰아 부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표만 바라보는 회색분자로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A후보가 ‘상식파’라고 딱 잘라 말하면서 외면했을 때, 속된말로 H후보는 ‘되치기’ 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중도란?
정치판에서 중도라는 늘 부정적 용어이었습니다. 과거 유명 야당정치인은 ‘중도통합론’을 이야기했습니다. 70년대 당시 이 말은 ‘사쿠라논쟁’이 되었습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기회주의자로 취급된 것이 중도였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중도라는 말은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한다’고 말씀 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중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초기경전에서는 고락중도, 유무중도, 단상중도 등 다양한 중도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양극단을 떠난 가르침입니다. 구체적으로 연기의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어 유무중도의 경우 이렇게 표현 됩니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되고, 형성이 소멸하면..”(S12.1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것과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은 양극단이라 했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All or Nothing’입니다. 전부(全部)아니면 전무(全無)는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는 부처님 당시 상견이라 불리는 영원주의와 단견이라 불리우는 허무주의를 논파하기 위한 것입니다. 상견도 단견도 성립하지 않음을 연기법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논파되는 양극단
육체는 죽어도 영혼만큼은 영원히 산다는 종교가 있습니다. 또 육체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죽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는 양극단으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이와 같은 상견과 단견이 거짓인지 부처님은 연기법적으로 논파했습니다.
단견이 거짓인 것은 발생을 관찰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의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 라 했습니다. 이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iti imasmiṃ sati idaṃ hoti)”와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난다.(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라는 연기송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라 연기의 조건발생에 따른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 즉의 업과 업의 과보의 작용에 따라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남을 말합니다. 따라서 연기의 발생법칙에 따라 단견이라 불리우는 허무주의는 거짓이 되고 논파 됩니다.
상견이 거짓인 것은 소멸을 관찰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의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 라 했습니다. 이는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진다.(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와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라는 연기송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Viññāṇanirodhā nāmarūpanirodho)”라는 연기의 조건소멸에 따른 것입니다. 육체는 죽지만 영혼만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상견은 조건 소멸되어서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연기의 소멸법칙에 따라 영원주의는 거짓이 되고 논파됩니다.
부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중도를 설했습니다. 초기경전에 언급되어 있는 중도를 보면, 유무중도 (有無中道, S12.15), 자타중도(自他中道, S12.17), 단상중도(斷常中道, S12.17), 일이중도(一異中道, S12.35), 고락중도(苦樂中道, S56.11), 오염중도(汚染中道, M3) 입니다. 이외 수 많은 중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중도이든지 연기법으로 설명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양극단에 대한 부정입니다. 있다면 연기법만이 있을 뿐입니다.
가격중도에 대하여
중도를 현실생활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격중도’ 같은 것입니다. 물건 값을 정할 때 적절하게 가격을 매기는 것입니다. 견적서를 제출할 때 적절한 가격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장사를 한다거나 비즈니스를 하는 경우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문제입니다.
국수장사하는 사람이 국수가격을 어떻게 정할까요? 너무 높게 책정하면 사람들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너무 낮으면 이윤이 남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주변 상권에 있는 타국수집의 가격을 조사하여 적정한 가격을 매길 것입니다. 견적서를 제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캐드를 이용한 인쇄회로기판설계를 하고 있습니다. 영업은 인터넷키워드 광고를 활용합니다. 주로 회사나 학교가 고객입니다. 일이 이루어지는 첫 번째 단계는 견적서 제출입니다. 주먹구구식이 아닌 견적 내는 공식에 따라 금액이 결정됩니다. 이때 너무 높게 가격을 제시하면 연락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낮게 책정하면 시간투자대비 노동의 대가가 따르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사정 고려하여 적정한 금액을 제시합니다. 어쩌면 이런 것이 가격중도일지 모릅니다.
가격중도는 중도라기 보다 중용(中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용이라는 말은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이 떳떳하며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나 정도”라 합니다. 가격을 매기는데 있어서 중도나 중용의 원리를 적용한다면 무리가 없으리라 봅니다.
중도(中道)는 정도(正道)
정치판에서는 중용이라는 말보다는 중도라는 말이 쓰입니다. 그런데 정치판에서 중도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연기법이 아니라 ‘가운데 길’ 정도의 의미로 여기는 것같습니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중간쯤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념스펙트럼에서 중간에 위치한 것을 중도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중도는 가운데 중(中)이 아니라 ‘바를 정(正)’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고락중도에서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S56.11) 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아닌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중도가 양극단을 떠난 연기의 가르침이라 했습니다. 연기는 사성제로 요악됩니다. 사성제에서 도성제가 팔정도입니다. 결국 중도는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정치판에서 말하는 중도는 단순히 이념스펙트럼의 중간에 위치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중도는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라는 양극단을 떠나 ‘정도(正道)’를 걷는 것을 말합니다. 정도는 바른길입니다. 두 갈래 길에서 항상 바른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른쪽 길은 방향을 말하지만 바른 길은 똑바른 길, 올바른 길로서 정도를 말합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팔정도’라 볼 수 있습니다.
토론하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
토론하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지혜로운지는 토론해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극우에서부터 극좌에 이르기까지 다섯 명의 토론자들의 토론을 보았습니다. 짧고 긴 것은 대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후보들 상호 토론을 지켜 보면 우열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지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사람들은 사람과 함께 논의 하면서 이와 같이 ‘이 존자는 탐구하는 자세와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에 따르면, 이 존자는 지혜가 열악하고 이 존자는 지혜가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는 심오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존자는 가르침을 설할 때에 간략하고 혹은 상세하게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힐 힘이 없다.’라고 안다.” (A4.192, 전재성님역)
토론하면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오로지 이미지로 승부하거나 세력에 의존하는 자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불행해집니다. 오로지 정도로 가는 바른 자만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정치중도(政治中道)는 가능한가?
정치의 계절입니다. 특히 대선시즌이 되면 국민들의 시선은 온통 대선 주자에게 쏟아집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단지 이미지만 보고 선택합니다. 정확한 선택을 하려면 토론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말을 하는지, 표정은 어떤지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호비교해 보야야 합니다.
비교하면 금방 드러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해도 세력이 없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산업화시대를 거쳐 민주화시대를 지나 반동회귀시대를 보냈습니다. 미래는 어떤 시대가 전개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과거로 돌아 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다만 길을 가되 바른 길, 정도로 가야 합니다.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바른 길이 중도(中道)입니다. 과연 ‘정치중도(政治中道)’는 가능할까요?
2017-04-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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