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비광명이라 하는가? 부처님오신날과 정법시대
한문탄생게와 빠알리탄생게
부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을까? 이런 의문에 대하여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대게 부처님의 탄생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문 탄생게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를 기본으로 합니다. 풀이하면 “하늘 위와 하늘아래 나 홀로 존귀하도다.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라는 내용입니다.
한문 탄생게에서 핵심은 ‘안(安)’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행복’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중생을 위하여 “내 마땅히 행복하게 하리라”라는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빠알리 탄생게는 이와 전혀 다릅니다. 디가니까야 ‘비유의 큰 경(D14)’에 표현된 탄생게는 다음과 같습니다.
Dhammatā esā bhikkhave. Sampatijāto bodhisatto samehi pādehi patiṭṭhahitvā uttarābhimukho1 satta padavītihāre gacchati setamhi chatte anuhīramāne , sabbā ca disā anuviloketi , āsahiñca vācambhāsati: "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Ayamettha dhammatā.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원리가 있다. 보살은 태어나자마자 단단하게 발을 땅에 딛고 서서 북쪽으로 일곱발을 내딛고 흰 양산에 둘러싸여 모든 방향을 바라보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을 선언한다. 이것이 이 경우의 원리인 것이다.”(D14, 전재성님역)
빠알리경전에 묘사된 부처님의 탄생게는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라는 구절이 핵심입니다. 보살이 태어나자 마자 일곱발을 내 딛고 선언한 말은 놀랍게도 ‘다시 태어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번 생이 마지막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한문탄생게와 빠알리탄생게가 다른 것은 ‘편안케 함’과 ‘다시 태어남 없음’일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대승불교와 근본불교가 지향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대승보살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고.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고 다시는 태어남이 없다고 선언한 것은 괴로움과 윤회의 종식에 대한 선언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많던 불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한국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이라 하여 음력 사월초파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하여 하루 쉬고 있습니다. 불자라면 인연 있는 사찰에 가서 법문도 듣고, 등도 달고, 점심공양으로 비빔밥을 먹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이날 하루는 그저 쉬는 날로 여길 뿐입니다. 한국에서 불교세가 전국민의 15.5%에 지나지 않아 소수의 사람들만이 불교를 종교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오신날이라 하여 특별한 국가적 행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만이 절에 가서 하루 보내는 날로 되어 있습니다.
불교를 종교로 갖는 사람들을 ‘불자(佛子)’라 합니다. 그렇다면 불자의 기준은 어디까지일까요? 이는 설문조사로 나타납니다. 작년에 종교인구총조사가 발표 되었습니다. 매 10년 마다 발표되는 총조사는 2015년에 실시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일년 가까이 미루어지다가 발표된 조사를 보면 충격적입니다. 불교인구가 무려 3백만명 가량 빠진 것입니다. 그 많은 불자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현재 한국의 불교인구는 약 7백만 가량 됩니다. 이는 2005년 종교인구총조사 당시 천만불자에서 약 3백만명이 빠진 수치입니다. 3백만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여러가지 추측을 합니다. 그 중에 어느 종교전문가는 매우 독특한 견해를 말했습니다. 그것은 기분에 따라 불자가 되기도 하고 기분에 따라 불자가 되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설문조사할 때 그날의 기분에 따라 불자가 되기도 되지 않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인의식’을 들었습니다.
불교인들은 일년에 한번 절에 가도 불자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절에 한번 가지 않아도 불자라고 합니다. 사월초파일에 딱 한번 절에 가서 등을 달아도 불자라하거나 불교서적 몇 권 읽고서는 설문조사에 응할 때 불교인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날 기분이 좋지 않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설문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불교인이라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변인으로 머물러 있는 불자들이 약 3백만명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불교와의 인연
한국에 불교인구가 7백만이라 하지만 대부분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인지 잘 모릅니다. 설문에 불자라고 응하지 않은 3백만은 말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일반 국민들은 더욱더 부처님 그분에 대하여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그분에 대하여 제대로 알면 “저는 자랑스런 불교입니다.”라고 당당히 선언할 것입니다.
불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와 인연맺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 불교와 처음 접했습니다. 불교종립학교에 배정된 것이 불교와 인연의 시작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불교시간에 ‘부처님의 일생’을 배운 것입니다.
중학교 시절 처음 접한 불교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습니다. 불교교과서에는 부처님의 탄생에서부터, 출가, 성도, 열반에 이르기까지 흔히 보는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사문유관’에 대한 것입니다. 나이 어린 싯다르타가 성밖에 나갔을 때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만 본 것이 아닙니다. 명상하고 있는 수행자도 보았습니다.
중학교 시절 불교를 접한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는지 모릅니다. 한국에서 불교를 종교로 하는 학교는 매우 희귀합니다. 그럼에도 불교학교에 배정받았다는 것은 나중에 생각해 보니 불교와의 귀중한 인연의 고리로 봅니다. 만일 기독교 계통의 미션스쿨에 배정받았다면 평생 교회에 다니며 살지 모릅니다. 청소년기에 접한 종교는 일생의 가치관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불교를 먼저 접한 것이 오늘날 불교를 종교로 하여 살아가는데 있어서 밑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를 접한지 44년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고작 13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형도심포교당에 있는 불교교양대학에 들어 가고 나서부터입니다. 들어가게 된 동기는 인생이 뜻대로 굴러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대한 불교적 해법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해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해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런저런 서적을 섭렵하다가 마침내 정법(正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법을 만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풀리지 않는 인생의 해법을 찾기 위하여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어느 명상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미얀마에서 수행한 바 있는 재가법사에게서 불교의 진수를 만났습니다. 처음 접하는 가르침과 수행방법을 접하면서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구나!”라며 마음속으로 탄성을 내었습니다. 그것은 2009년의 일입니다.
지금은 정법시대
정법을 만난지 이제 8년 되었습니다. 그런 정법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부처님 그분이 언어로써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날 문자로 기록된 빠알리경전이 대표적입니다. 본래 깨달음에 대하여 언어나 문자로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언어로서 명쾌하게 설명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연각불과 다른 것입니다. 연기법으로 깨달은 자라도 법을 설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가 있고 법을 설할 수 없는 자가 있습니다. 연각승은 법을 설할 수 없습니다. 연각승이 비록 연기법으로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이를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깨달음을 언어로써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법을 펼칠 수 있는 능력있는 자에 대하여 특별히 삼마삼붓다(sammāsambuddha), 즉 정등각자라 합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것에 대하여 모두 다 이야기 했습니다.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편으로, 그리고 경이나 게송 등 ‘구분교’의 방식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팔만사천법문입니다. 어떤 대승경전에서는 “부처님은 한마디도 설한 바 없다.”라 하지만, 부처님은 갖가지 방법으로 매우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오로지 삼마삼붓다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방법이 살아 있는 시대를 ‘정법시대’라 합니다. 그렇다면 정법시대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빠알리 삼장)이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둘째,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수행을 할 수 있는 팔정도가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셋째, 깨달음을 통하여 열반을 성취한 성자가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자금은 정법시대입니다. 빠알리 삼장, 즉 율장(Vinaya), 경장(Nikaya), 논장(Abhidhamma)가 전승되어 오고 있는 시대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빠알리 삼장은 최근 20년 이내에 대부분 번역되었습니다. 경장의 경우 쿳다까니까야의 일부경전을 제외하고 모두 우리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재가자들이 보아서는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금서와 다름 없는 빠알리율장 또한 모두 번역되어 있어서 시중에서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아비담마논장과 청정도론이 번역되어서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더구나 부처님 당시의 수행법도 접할 수 있어서 더욱 더 정법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정법의 시대는 ‘성자’가 출현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포살과 자자가 있는 여법한 승가공동체가 형성되어야야만 합니다. 사쌍팔배의 성자들이 출현할 수 있는 성스런 승가공동체가 형성되어야 진정한 정법시대가 될 것입니다.
정법은 오래 가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처음 진리를 설한 이래 가르침의 수레바퀴는 계속 굴러 왔습니다. 그 바퀴는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갈 뿐 옆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습니다. 마침내 한반도에도 전승되어서 정법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법을 아는 사람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시대에 정법을 접한 것은 행운입니다. 그러나 정법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정법이 변질되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과거에 여러 부처님들이 출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과거칠불이라 하여 위빠시붓다 등 일곱 분의 부처님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들려 주는 형식으로 설한 가르침을 보면 일곱분의 부처님에 대한 내용은 모두 동일 합니다. 다만 이름이 다르고 시대가 다를 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세상에 어느 부처님이 출현 해도 깨달은 내용이 동일함을 말합니다. 상윳따니까야 ‘인연의 모음(S12)’에 ‘과거칠불’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한결같이 똑같은 내용입니다. 디가니까야 ‘비유의 큰 경(D14)’에 따르면 과거불의 행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과거칠불 중에 가장 선두에 있는 위빠시붓다에 대한 것을 보면 탄생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석가모니부처님의 행적과 동일 합니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서는 왜 똑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놓았을까요? 그것은 정법의 변질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심오합니다. 그리고 세상사람들이 이해 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닫고 난 다음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이해하기 힘드네.”(S6.1) 라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역류도(逆流道)’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되는 가르침을 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정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었습니다. 부처님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을 설했으나 후대사람들은 이를 ‘상(常), 락(樂), 아(我), 정(淨)’으로 바꾸었습니다. 후대로 갈수록 가르침은 변질되어 마침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왜 자비광명인가?
가르침이 변질되어 사라지게 되었을 때 다시 암흑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다음 부처가 출현할 때 까지 정법의 시대는 존속하지 않습니다. 정법이 없으면 성자도 출현하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든 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부처가 또 다시 출현합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61겁전에 위빠시붓다가 출현했고, 다음에 시키붓다가 출현했는데 31겁전이라 합니다. 무려 공백이 30겁이나 됩니다. 한량없는 세월동안 암흑의 시대가 계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정법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또다시 정법은 변질되고 사라지고 맙니다. 이렇게 부처가 출현하기를 반복합니다. 마침내 석가모니 부처님에 이르게 됩니다.
이세상에 부처가 출현했다는 것은 커다란 사건입니다. 우주적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생사윤회를 반복하는 존재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불사, 즉 열반에 들기 위한 가르침이 있는 정법시대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보살이 입태할 때와 보살이 태어날 때 전에 없는 징조가 있다고 합니다. 특히 보살이 태어났을 때에 대한 것을 묘사한 장면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원리가 있다. 보살이 모태에서 나올 때에,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신들의 위신력을 압도하며 나타난다. 덮게도 없고 바닥도 없는 캄캄한 칠흑 같은 암흑에 둘러싸여 해와 달도 그와 같은 광대한 초월적 힘과 그와 같은 광대한 초월적 능력이 있어도 빛을 비추지 못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도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신들의 위신력을 압도하며 나타난다. 그곳에 태어난 뭇삶들이 있는데, 그들도 그 빛으로 ‘벗이여, 참으로 다른 뭇삶들도 여기에 태어났구나.’라고 서로를 알아본다. 이 일만의 세계가 흔들리고 진동하고 요동한다. 그리고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신들의 위신력을 압도하며 나타난다. 이것이 이 경우의 원리이다.”(D14, 전재성님역)
부모를 살해 하는 등 ‘오역죄’를 저지른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우주기가 끝나도 빛이 전혀 비추지 않는 사이지옥, 즉 틈새지옥에서 살아 간다고 합니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 틈새가 있어서 그곳에서 살아 가는 지옥중생들은 가장 무거운 업을 지은 자들입니다. 그런 지옥중생들에게도 한줄기 광명이 비출 때가 있는데 보살이 입태할 때와 보살이 탄생할 때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자비광명입니다.
흔히 부처님오신날 듣는 말 중의 하나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광명이 함께 하기를!”이라 합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광명’입니다. 불교에 대하여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데 이를 광명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빛과 같은 가르침은 보편타당한것이어서 누구에게나 어느 시대에서나 차별 없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극악무도한 오역죄를 저지른 지옥중생에게까지 빛이 미친다고 했습니다. 한번도 빛이라고는 접할 수 없는 자들이 보살이 입태하거나 보살이 태어날 때 비로소 ‘벗이여, 참으로 다른 뭇삶들도 여기에 태어났구나.’라며 서로를 알아본다고 합니다.
괴로움과 윤회를 종식을 위하여
이 세상에 부처가 출현한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합니다. 세상에 부처가 출현하여 정법을 펼치지만 후대로 갈수록 변질되어 사라지고 맙니다. 한량 없는 암흑의 시대가 됩니다. 삼계에서 고통스런 생사윤회를 반복할 뿐입니다. 그런데 부처가 출현했다는 것은 괴로움과 동시에 윤회의 종식을 이룰 기회가 왔음을 뜻합니다. 그래서일까 빠알리 탄생게는 대승탄생게와 달리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라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이야말로 모든 뭇삶들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불자들은 부처님오신날 절에 가면 관불의식을 행합니다. 꽃으로 장엄된 불단에 아기부처님이 있습니다. 신심있는 불자들은 아기부처님의 머리에 물을 부우면서 탄생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부처의 탄생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이 이땅에 출현한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대게 사람들을 편안케 하고나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초기경전에 따르면 괴로움과 윤회의 종식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 부처님의 탄생은 진동과 빛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은 사이지옥에 까지 뻗어 간다고 했습니다. 위로는 천상의 존재에서부터 아래로는 아비지옥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비춘 것입니다. 괴로움과 윤회를 종식시킬 수 있는 지혜와 자비의 광명입니다. 이 땅에 부처님이 출현한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2017-05-04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권력은 저열한 것, 왕권이 부럽지 않은 포살공덕 (0) | 2017.05.10 |
---|---|
사이버세상에 직선실현등을 달고 (0) | 2017.05.06 |
분노가 일어나면 톱의 비유를 (0) | 2017.04.28 |
한번 넘어진 의자는 (0) | 2017.04.28 |
정치중도(政治中道)는 가능한가? (0) | 2017.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