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발전하고 진화해 왔을까? 마하야나와 테라와다의 정체성
요즘 스마트폰시대입니다. 손안에 있는 작은 컴퓨터는 이동중에 전화도 하고 인터넷도 하고 실시간 대화 하는가 하면 심지어 이동중에 업무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글쓰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메모’기능입니다.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하여 간단히 글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 TV를 보았습니다. 아침 6시 정규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교양프로가 많습니다. MBC에서 도자기에 대한 방송을 했습니다. 이전에 방송했던 것을 다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도자기라면 중국이나 일본을 떠 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방송에 따르면 영국입니다. 18세기 영국에서 ‘본차이나(Bone chaina)’라는 흰색의 도자기가 대유행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건너간 도자기 기술이 서양에서 꽃피운 것입니다.
시누아즈리(Chinoiserie)와 자포니즘(Japonism)
도자기와 관련하여 일본사쓰마도자기도 소개되었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도공의 후예인 15대 심수관이 출연했습니다. 오늘날 유명한 사쓰마도자기는 19세기 메이지 유신당시인 1867년 만국박람회에 출품해서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 불리우는 중국도자기를 최고로 쳐 주었으나, 만국박람회에서 사쓰마도자기가 각광받는 바람에 자포니즘(Japonism)이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사쓰마도자기는 일본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정유재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도공의 후예인 15대 심수관은 “혁신이 겹겹이 쌓이는 모습이 전통이라 볼 수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방송을 듣고 이 말을 스마트폰에 메모해 두었습니다.
스마트폰에 키워드만 메모 해 두어도 글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잊어 버리기 쉽습니다. 그것은 한순간에 하나밖에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이나 귀 등 여섯 가지 문으로 수 많은 정보가 들어 왔을 때 아무리 좋은 말이나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기억해 놓지 않으면 잊어 버립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합니다.
지금 생각 났을 때 기록해 두어야 합니다. 이처럼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만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테라가타에서는 “형상 없는 자여, 멀리 미치고 홀로 움직이니”(Thag.1128) 라고 표현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홀로 움직인다(ekacāri)’라는 말은 주석에 따르면 “두 셋의 마음들이 한 번에 작용할 수 없고, 하나의 마음은 한 상속(相續: Santāna)에서 일어난다. 그것이 사라지면 하나의 마음이 일어난다.”(ThagA.III.156)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15대 심수관은 혁신과 전통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전통이라는 것이 옛것만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함을 말합니다. 정유재란 당시 끌려 왔던 도공이 만든 것은 세계최고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 심수관들이 더욱 개량하고 발전시킨 결과 오늘날 세계최고의 도자기가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동물의 뼛가루 등으로 만든 본차이나 역시 혁신에 따른 것입니다.
일등회사의 자만심
요즘세상을 승자독식시대라 합니다. 마치 선거에서 이긴자가 모든 자리를 차지하듯이, 일등상품이 시장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일등은 없습니다. 후발주자에게 추격당하여 흔적도 사라지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시장지배력을 가진 회사가 왜 망했을까요? 그것은 혁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등제품이라는 자만심에 따라 방심했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 정규방송이 시작 되기 이전 TVn에서 ‘어쩌다 어른’이라는 프로를 보았았습니다. 유명강사들이 나와서 강연하는 교양프로입니다. 한 강연에서 시장지배력을 가진 일등회사의 자만심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대게 시장에서 일등하는 제품은 그 제품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착각합니다.
퍼스널컴퓨터가 출현하기 이전 업무용컴퓨터의 강자가 있었습니다. 그 회장은 이것으로 더 이상 새로운 제품이 나오지 않으리라 본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기술혁신이 이루어져 개인컴퓨터시대가 열렸습니다. 이에 대응하지 못한 그 회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아마 “이것 외 다른 것은 없다.”라든가, “더 이상 기술혁신은 없다.”라는 자만의 결과일 것입니다.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을 가진 회사는 자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혁신하지 않으면 금방 도태 되고 맙니다. 현재의 기술은 과거의 기술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초고층빌딩, 대형선박, 긴 터널, 긴 교량 등 세상에서 가장 큰 것들은 여러 단계 기술혁신의 산물들입니다. 이는 더 크게, 더 빠르게, 더 높이라는 구호의 산물일 것입니다. 반대로 더 작게, 더 압축하여 만든 것이 오늘날 스마트폰입니다. 이와 같은 문명의 산물은 끊임 없는 기술혁신과 개량의 결과물입니다. 일등이라 하여 “이것 외 다른 것은 없다.”라는 자만심을 갖는 순간 퇴보합니다.
성장을 멈추었을 때
사람들은 어느 순간이 되면 신체적인 성장이 멈추어 버립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성장은 끝이 없습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 평생 향상시켜도 다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에 만족하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소욕지족하는 삶이 아닙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그리고 오만과 편견으로 살아 가는 삶을 말합니다.
더 이상 정신적인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이미 죽은 자와 같습니다. 그것은 게으른 자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부지런함은 생명의 길이요 게으름은 죽음의 길이다. 부지런한 사람은 죽지 않지만 게으른 사람은 죽은것과 마찬가지다.”(Dhp21)라 했습니다.
게으른 자는 살아 있어도 이미 죽은 자와 같습니다. 살아 있지만 숨만 쉬고 있을 때 이미 죽은 송장과 같습니다. 한평생 탐욕으로 분노로 살아 가는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더 이상 정신적인 성장이나 향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 가는 자에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간에서는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갑니다. 그 흐름이라는 것은 오욕락으로 사는 것입니다. 눈과 귀 등 감각기관을 즐기는 삶입니다. 그리고 식욕과 성욕, 수면욕, 재물욕, 명예욕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런 세간의 흐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이르게 됩니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자들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오욕락을 즐기면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살아가지만,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정반대로 살아 갑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아 갔을 때 죽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가는 자들은 게으른 자들입니다. 욕망대로 살아 가는 자들은 정신적 성장이나 향상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탐욕과 분노로 살아 가다 보니 ‘업’만 쌓이게 됩니다. 지은 행위의 과보로 인하여 또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으른 자들은 육체적 죽음과 함께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정말 죽게 됩니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아가는 성자들은 부지런한 자들입니다. 탐욕과 분노를 소멸시키는데 있어서 근면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항상 사띠(sati)하며 알아차리며 깨어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정신적인 향상과 성장을 이루었을 때 죽지 않습니다. 더 이상 재생의 원인이 되는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죽음과 함께 완전한 열반에 들기 때문에 부지런한 자는 죽지 않습니다.
행복의 시대에서 힐링의 시대로?
그날이 그날 같은 매일매일 똑 같은 일상입니다. 만일 정말 똑 같은 일상이라면 살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같은 영화를 열번, 스무번, 백번 보라면 지겨워서 볼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도 일상을 살만한 것은 같아 보여도 작은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날씨가 다르고 계절이 바뀌듯이 똑같아 보이는 일상에도 변화가 있기 때문에 살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편하게 살려 하다 보니 성장을 멈추게 됩니다.
사람들은 편리함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편리함이라는 말은 안락함과 동의어이고, 안락함은 또한 즐거움과 동의어입니다. 즐거움이라는 말은 ‘행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고, 지금 불행한 자는 이 불행이 어서 끝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바라는 행복은 즐거움의 추구입니다. 오욕락을 누리는 것을 행복이라 합니다. 그러나 오욕락은 일시적으로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지만 오래 가지 않습니다. 오래 가지 않아서 괴로워합니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행복이라는 말대신 ‘힐링(Healing)’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제 행복의 시대에서 힐링의 시대로 바뀐 듯합니다. 불교계에도 힐링전도사라 불리우는 유명스님들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행복을 이야기 했지만 아무리 해도 행복하지 않아서인지 새로운 슬로건을 들고 나온 것이 힐링이라 보여집니다.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지만 오욕락의 추구가 결코 행복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어떤 것일까요?
진정한 행복은?
매일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벌써 11년 째 쓰고 있습니다. 십년 이상 쓰다 보니 이제 습관이 되었습니다. 글쓰기는 일상입니다. 그런데 글쓰기 하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정신적 향상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사유한 것을 글로서 표현 했을 때 발전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특히 초기경전을 근거로 글을 썼을 때 정신적 향상과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가르침은 이미 완성되어 있음에도
초기경전을 근거로 글을 쓸 때 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살 뿐입니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가르침을 하나 하나 발견했을 때 보물을 찾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퍼즐맞추기 하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완전합니다. 다만 접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고 살뿐입니다. 그럼에도 부처님 가르침은 미완성된 것, 덜 깨달은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새로운 경전을 만들고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 냈습니다. 불교는 계속 발전되는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기술혁식이 이루어지듯이 시대마다 시대에 맞는 불교가 나와와 한다고 말합니다. 아마 이것이 마하야나의 전통일 것입니다.
마하야나에서는 불교가 진화해 왔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미완성이고, 부처님의 깨달음 역시 미완성이라는 것입니다. 후대 여러가지 불교가 나타난 것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이 이해 하지 못해서 모르는 것일 뿐입니다.
불교는 계속 퇴보 해 왔다
일본최고의 도자기 명인 15대 심수관은 “혁신이 겹겹이 쌓이는 모습이 전통이라 볼 수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오늘날 모든 물질문명은 혁신의 산물입니다. 어쩌면 불교전통도 혁신의 산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하야나교가 시대에 맞게 계속 변해 온 것은 불교의 진화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불교가 생겨남에 따라 깨달음 역시 새롭게 발견되는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에서는 혁신이나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 그 자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모르고 산 것일 뿐입니다.
마하야나의 정체성은 끊임 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불교의 발전, 불교의 진화라 합니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21세기 맞는 불교가 출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종종 새로운 교주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불교의 변질입니다. 원래 가르침에서 크게 후퇴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무상, 고, 무, 무아를 설했음에도 다시 해석해보니 상, 락, 아, 정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고 훼손됩니다. 시대에 맞는 불교라 하여 새로운 불교가 나타나지만 본래 가르침에서 멀어진 것들 입니다. 가르침에 있어서 혁신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르침 그 자체는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하고 뺄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전세계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불교는 불교퇴보의 역사라 볼 수 있습니다.
불교는 계속 퇴보 해 왔습니다. 불교가 발전해 왔다고 하지만 사실상 변질의 역사라 볼 수 있습니다. 기술은 여러 단계를 거쳐서 더 높이, 더 크게, 더 길게, 더 작게 하여 혁신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혁신을 하면 할수록 퇴보 됩니다. 본래 가르침에서 멀어졌을 때 전혀 다른 불교가 됩니다. 오늘날 마하야나는 전혀 다른 불교가 되었습니다. 불교의 변화는 한마디로 퇴보의 역사입니다.
진리 그 자체는 언제나 그 자리에
가르침 그 자체는 완전합니다. 진리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없습니다. 마하야나의 정체성은 끊임 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테라와다불교는 끊임 없이 본래가르침에 가까이 가려 하는 것이 정체성입니다.
종교가 개혁되면 본질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종교라 합니다. 테라와다불교야말로 보수 중의 보수라 볼 수 있습니다. 진리는 항상 그 자자리에 변함 없이 있을 뿐입니다.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여래는 그것을 올바로 깨닫고 꿰뚫었으며, 올바로 깨닫고 나서,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힌다. 그러므로 ‘그대들도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S12.20, 전재성님역)
2017-05-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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