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언제쯤이나 나는”마음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담마다사 이병욱 2017. 5. 16. 12:46

언제쯤이나 나는마음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진리가 증명되는 순간

 

테라가타와 테리가타를 보면 종종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라는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길(magga)과 경지(phala)에 이르렀을 때 감흥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런 감흥은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처음으로 설법했을 때 꼰당냐가 느꼈던 감흥과 같은 것입니다.

 

꼰당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했을 때 법의 눈(dhamma cakkhhu)’이 생겨났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감흥어린 말로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S56.11)라고 읊으셨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증명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꼰당냐를 시작으로 오비구는 차례로 깨달아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했습니다. 제자들도 따라서 깨달음을 성취했습니다. 부처님이 최초로 깨달은 진리를 설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깨달음 역시 부처님의 깨달은 것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깨달음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깨달은 진리가 증명되었습니다. 부처님 제자들이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입니다. 공통적으로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 (Tisso vijjā anuppattā kata buddhassa sāsana)”(Thag.465)라는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보편적이어서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언제쯤이나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불자라 합니다. 불자가 되면 부처님이 갔던 그 길로 따라 가야 할 것입니다. 그 길로 죽 가면 해탈과 열반이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테라가타에 따르면 딸라뿌따 존자는 언제쯤이나하며 다음과 같이 고대합니다.

 

 

Kadā nuha pabbatakandarāsu,

ekākiyo addutiyo vihassa;

Aniccato sabbabhava vipassa,

ta me ida ta nu kadā bhavissati.

 

언제쯤이나 나는 산의 협곡에서

일체 존재를 무상하다고 통찰하며

홀로 벗도 없이 지낼 수 있을까?

나에게 그것이 언제쯤이나 가능할까?”(Thag.1097)

 

 

테라가타 오십련시집에 나오는 딸라뿌따의 첫 번째 게송입니다. 딸라뿌따는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깨닫고자 하지만 여건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일체존재가 무상한 것을 알지만 통찰하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서 일체존재(sabbabhava)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존재 등의 세 가지 존재, 즉 욕계, 색계, 무색계의 존재를 말합니다.

 

삼계가 무상함을 통찰하려면 홀로 벗도 없이 지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벗도 없이 (addutiyo)라는 말은 갈애를 뜻합니다. 갈애를 친구로 했을 때 삼계를 윤회할 수밖에 없습니다이띠붓따까에서는 갈애를 벗으로 삼는 사람은 오랜 세월 윤회하며 이러한 존재 저러한 존재로의 윤회를 벗어나기 어렵다.”(It.109)라 했습니다.

 

그것이 언제쯤일까?”

 

딸라뿌따 존자와 관련하여 Thag.1097에서 Thag.1151까지 54개의 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Thag.1097에서부터 Thag.1112까지 15개의 게송은 언제쯤이나(kadā)”로 시작됩니다. 딸라뿌따는 늦은 나이에 부처님에게 출가한 듯 합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딸라뿌따의 경(S42.2)’에서 배우마을의 촌장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깨달음도 더디었던 것 같습니다. 노년출가의 어려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출가했지만 아직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언제쯤이나 누더기 옷을 걸친 성자로서

가사를 걸치고 나의 것이 없이 바램 없이

탐욕과 성냄 뿐만 아니라 어리석음도 버리고

행복하게 산기슭에서 내가 지낼 수 있을까?”(Thag.1098)

 

언제쯤이나 살육과 질병의 소굴이자

죽음과 늙음에 시달리는

이 몸을 통찰하면서, 숲속에서 두려움 없이 홀로,

내가 지낼 수 있을까? 그것이 언제쯤일까?” (Thag.1099)

 

언제쯤이나 나는 날카로운 지혜의 칼로

공포를 일으키고 고통을 가져오는

갈애의 넝쿨과 여러 얽힌 것들을 자르고

내가 지낼 수 있을까? 그것이 언제쯤일까?” (Thag.1100)

 

언제쯤이나 지혜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선인들의 칼을 단박에 부여잡고,

사자좌에 앉아 악마와 그 군대를 단숨에

내가 쳐부술 수 있을까? 그것이 언제쯤일까?” (Thag.1101)

 

언제쯤이나 가르침을 중히 여기고

있는 그대로를 보고 감관을 정복한,

그러한 참사람의 모임에서 정진하는 것을

내가 보여줄 수 있을까? 그것이 언제쯤일까?” (Thag.1102)

 

언제쯤이나, 권태, 기아, 갈증,

바람, 열기, 곤충, 뱀이

산곡성에서 의취를 이루기 위한,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인가? 그것이 언제쯤일까?” (Thag.1103)

 

언제쯤이나, 위대한 선인에 의해 알려진

보기 어려운 네 가지 진리가 있는데,

자신을 정립하고 새김을 확립하여

내가 지혜로써 알 수 있을까? 그것이 언제쯤일까?” (Thag.1104)

 

언제쯤이나 한량없는 형상들,

소리들, 맛들, 감촉들, 사실들이 불타고 있는데,

멈춤을 이루고 지혜를 가지고

내가 볼 수 있을까? 그것이 언제쯤일까?” (Thag.1105)

 

언제쯤이나 추악한 말을 들어도

그것 때문에 상심하지 않고,

또한 칭찬을 받아도 그것 때문에,

내가 기뻐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이 언제쯤일까?” (Thag.1106

 

언제쯤이나, 나무조각이나 건초나 덩굴처럼,

이러한 존재의 다발과

한량없는 안팎의 사실들을

내가 평등하게 잴 것인가? 그것이 언제쯤일까?” (Thag.1107

 

언제쯤이나 숲속에서 가사를 걸치고

선인이 밟던 길을 가는,

나에게 신선한 물줄기로

우기의 비구름이 비를 내릴까? 그것이 언제쯤일까?” (Thag.1108)

 

언제쯤이나 숲속에서 벼슬을 단 새,

공작이 산혈에서 우는 것을 듣고 일어나

불사의 성취를

내가 도모할 수 있을까? 그것이 언제쯤일까?” (Thag.1109)

 

언제쯤이나 용연으로 흘러들고

경해로 나아가는

갠지스 강, 야무나 강, 싸랏싸띠 강을

가라앉지 않고 신통력으로

내가 건널 수 있을까? 그것이 언제쯤일까?” (Thag.1110)

 

언제쯤이나, 전쟁터를 누비는 코끼리처럼

일체의 아름다운 인상을 물리치고

선정에 들어 감각적 쾌락의 대상에 대한 욕망을

내가 쳐부술 수 있을까? 그것이 언제쯤일까?” (Thag.1111)

 

언제쯤이나 빚에 괴로워하는 가난한 자가

빚쟁이에게 시달리다 보물을 찾고 좋아하듯,

위대한 선인의 교법을 실현하여

내가 기뻐할 것인가? 그것이 언제쯤일까?” (Thag.1112)

 

 

 

 

 

 

열 다섯 개의 게송을 보면 언제쯤이나(Kadā)”로 시작하여 그것이 언제쯤일까? (kadā bhavissati)”로 끝납니다. 강렬한 해탈에 대한 열망을 스스로 물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게송은 출가하고 나서의 마음상태를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게송에서 여러 해 동안 그대에게 나는 청원을 받았다. ‘재가의 생활은 자네에게 이것으로 충분하다.’라고. 그래서 내가 지금 출가한 수행자인데, 마음이여, 왜 그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가?”(Thag.1113)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마음을 조복받지 못해서 자문한 것입니다.

 

오온에 대하여 통찰하지 못하면

 

요즘 사십대들에게 최고로 인기있는 프로가 자연인이라 합니다. 어느 종편방송에서는 이제 간판프로로 자리잡았습니다. 산에서 홀로 살아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종편 뿐만 아니라 공중파방송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심산유곡에서 홀로 살아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나도 언젠가는 저와 같이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세속을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출가는 하나의 꿈입니다. 꿈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꿈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출가했다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왔다고 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일 것입니다.

 

환속하는 것은 출가자들의 모습에서 실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세속보다는 더 세속적인 출가집단에서 아무런 희망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출가자들은 출가목적이 분명했음에 틀림 없습니다. 딸라뿌따존자의 언제쯤이나게송을 보면 그것이 언제쯤일까?”라 하여 강력한 의지가 보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몸에 대한 통찰입니다.

 

딸라뿌따존자는 이 몸에 대하여 살육과 질병의 소굴’(Thag.1099) 이라 했습니다. 그런 몸은 결국 늙음과 죽음에 종속됩니다. 또한 몸에 대한 집착에 따라 번뇌가 일어납니다. 그몸은 다름 아닌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로 이루어진 오온입니다. 몸에 대한 통찰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설명됩니다.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어리석은 자에게는 이 현세의 몸이 생겨난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에게는 이 무명이 파기 되지 않고 갈애가 극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는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청정한 삶을 닦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는 몸이 부서져 죽은 뒤에 또 다른 몸을 받는다. 만약 그가 몸을 받으면 그는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상윳따니까야 S12.19, 전재성님역)

 

 

몸에 대한 통찰, 즉 오온에 대한 통찰을 하지 못하면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다시 몸을 받게 됨을 말합니다. 이는 어리석은 자에게나 해당됩니다. 그러나 몸에 대한 통찰을 한 자는 다시는 몸을 받지 않습니다. 현자는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청정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노년출가의 어려움

 

딸라뿌따는 배우마을의 촌장으로 있을 때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듣고 부처님에게 귀의했습니다. 그러나 습관이 있어서인지 출가생활이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마음과의 싸움입니다. 이는 Thag.1113에서 재가의 생활은 자네에게 이것으로 충분하다. (agāravāsena ala nu te ida)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주석에 따르면 이보게, 마음이여, 많은 세월을 여러 괴로움을 겪으면서 재가에서 생활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출가했지만 마음이 따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재가의 생활습관이 있어서 쉽게 바꾸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딸라뿌따는 끊임 없이 자문합니다. 마치 퇴전과 불퇴전을 거듭하는 것 같습니다. 촌장으로서 나이 들어 출가한 것이 쉽지 않음을 말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노년 출가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노년의 출가자가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 설법을 하기 어렵다. 계율을 수지 하기 어렵다.” (A5.60)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년 출가하면 가르침을 실천하기 어려움을 말합니다.

 

마음의 항복을 받아내고

 

평생 무대에서 살았던 배우마을의 촌장은 노년에 출가했습니다. 그동안 지은 습관으로 인하여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출가의 어려움이 게송에 절절히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마음에 대하여 마음이여, 어찌해야 그대가 내게 항복하겠는가?”(Thag.1135) 라 하여, 마음을 의인화 하여 마치 대화하듯이 노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마음의 항복을 받아 내었습니다. 마음에 대하여 이제 나는 주인으로 행세하리라.”(Thag.1144) 라 했습니다.

 

딸라뿌따는 마음에 끌려 다녔습니다. 마음의 노예가 되어 산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에게 출가해서는 마음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노년에 출가하여 끊임 없이 언제쯤이나그것이 언제쯤일까?’라 해서 일 것입니다. 마침내 배우마을의 촌장 딸라뿌따는 거룩한 님, 즉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남자들이나 여자들의 어떠한 행복이든

그대의 욕망과 기호를 좇아서 누린다면,

마음이여, 그들은 무지한 자들, 악마에 사로잡힌 자들,

존재에 환희하는 자들, 그대의 노예들이다.”(Thag.1151)

 

 

2017-05-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