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신뢰할 만한 스승이 없을 때는 경전을 스승으로

담마다사 이병욱 2017. 5. 15. 22:35

 

신뢰할 만한 스승이 없을 때는 경전을 스승으로

 

 

아비담마를 맹비난하는 J법사

 

아비담마를 백날 달달 외워 본들 도가 아니다. 말짱 도루묵이다.”유튜브에서들은 법문입니다. 어떤 이가 아비담마 공부를 해야 하나요?라는 물음에 J법사가 답한 것입니다. 유튜브에 꾸준히 상담한 것을 올려 놓은 자는 마치 깨달은  도인처럼 보입니다. 법당처럼 보이는 방에는 작은 불상이 있고 연등도 걸려 있습니다. 아마 재가법사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비담마를 맹렬히 비난합니다. 그런 J법사는 아비담마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아비담마에 대하여 모르면 가만 있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아비담마에 대하여 공부해 보지도 않았고 아비담마에 대하여 모르는 자가 아비담마에 대하여 맹비난하는 것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빠알리 삼장중의 하나로서 전승되어온 가르침을 모두 부정했을 때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요? 혹시 자신의 말만 믿어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로 마하야나주의자들이 아비담마를 맹비난합니다. 대게 부처님은 아비담마에 대하여 한말씀도 없으셨다.”라 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비담마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담마상가니 해제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의 기원은 부처님, 담마상가니(法集論)에서(2016-12-2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아비담마와 관련하여 맛지마니까야에서 “도반 사리뿟따여, 여기 두 비구가 있어 아비담마에 대한 논의를 하는데” (M32)라고 했습니다. 또한 율장에서는 비방하고자 의도하지 않고 ‘자, 경전이나 게송이나 논서를 배우고 나중에 계율을 배우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와 정신이 착란된 자이거나, 초범자인 경우는 무죄이다. (Vin.II.144, 율장비구계, 1654p)라 하여 부처님당시에 아비담마논장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아비담마에 대하여 한말씀도 하지 않았다고 하여 아비담마를 비판한다면 커다란 구업을 짓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열반을 부정하는 L교수

 

마하야나주의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J법사에 따르면 내가 무아인데 무얼할려고 함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부처님 가르침 조차 부정합니다. 깔라마경에 부처님이 부처님 말씀조차 믿지 말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한 적이 없음에도 자신의 말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경전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L교수는 열반도 부정합니다. 최근 유튜브강좌에 따르면 열반을 내가 성취해야 겠는데 이런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생사야. 그게 사견이고. 그 생각이 없어져 버리면 된다는데 그 생각이 쉽게 없어지냐고? 그럼 어떻게 해야 없어집니까? , 그건 본래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 보라 이게야. 이게 정견이에요. “ (2017 금강경 의 4) 라 했습니다. 모든 것을 개념화 된 것으로 보아 분별심만 내지 않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 모두 부정되는 것입니다.

 

마하야나주의자들의 법문을 들으면 받아 적을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말만 믿으라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부처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이른바 팔만사천 법문이 왜곡되거나 부정됩니다.

 

메일을 하나 받았는데

 

최근 메일을 하나 받았습니다. 전재성박사의 니까야강독모임에 대한 글을 하나 올렸는데 이에 대한 비판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초기불교와 초기경전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전문을 빠짐 없이 올려 봅니다.

 

 

"연민과 질투 양극단을떠나"를 읽고..

 

중생은,

일체법의 주체이며,

일체법은 본시 양극(분별 에너지)으로 구성 됩니다.

 

님의 글(5/13블로그)에서,

중도의 설명은 중도의 참뜻이 아닌, 중용의 설명인듯 합니다.

 

극과 극의 중립을 유지하려는 견해, 그것 또한,

"중립"하려는,

중립이라는 극에 치우처 있어 

붓다적 "중도"의 설명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중도의 견해란

유위적으로 조작하여 실현 될수 없는 견해 입니다.

 

고타마 붓다의

"범소유상 개시허망"의 견해에서

진정한 붓다의 중도의 견해를 들여다 볼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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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어 번역경서"에 대하여,

 

불교는 정법으로 성립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번역되어 나온 빨리어 경서들,

과연 정법 을 전하는 경전일까요?!

 

"여시아문"(나는 이렇게 들었다) 무책임한 경전,

"어떤 빨리어 경전에 쓰여있는 내용을 나는 번역했을 뿐이다" 라는 무책임한 전달 경전,

검증되지 아니한 서적들, 불교전달,이대로 가도 될까요?!

 

진정한 불교를 전하고자하는 역경자라면,

스스로가 직접체험으로 검증한후, 그 여부를 역경하여 세상에 전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법,

고타마 붓다 입멸, 그리고 부파불교시대를 거처 구전되오다가 400여년후에 문자화 됬다하니

경전내용은 어딘가가 왜곡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2000여년의 유통,

어찌 검증하지 아니하고 어찌 정법이라고 단정 할 수 있겠습니까?! 

 

불교 2500여년,

붓다(nirvana완성자)를 이룬자가 있습니까?!

정답없는 불교,

논쟁만 난무 할 뿐임을 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님의 글을 보면,

번역된 경전내용에 입각하여 정설여부를 평하심을 잘 압니다. 허나

그 경서가 왜곡된 경서라면 그 평문은,

많은 불자들의 수행제도가 아닌 반대방향으로 흘러갈수도 있겠지요.

 

한번쯤 만나 뵙고 담론제의를 하고자 하나,

나의 짧은 유위적 소견으로 정법을 설득하기 어려울거라 여겨져

짧은 글이나마 대신해 봅니다

 

저의 글에 이의 있으시면 글 주십시요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합장.

(걸사)

 

 

보낸사람은 걸사입니다. 걸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스님같기도 합니다. 문장을 보아서 글을 써 본 사람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올린 글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중도에 대하여

 

글을 보면 크게 두 갈래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올린 글에 대한 것이고, 또하나는 초기경전에 대한 비판입니다. 먼저 올린 글에서 중도에 대하여 비판 했습니다. 전재성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나름대로 견해를 올린 것에 대하여 잘못 되었다고 합니다.

 

올린 글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과 부자에 대한 질투라는 양극단을 떠나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어쩌면 중도같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중도보다는 중용에 가까울 것이라 합니다. 이런 의견 받아 들여 중도 또는 중용이라고 수정했습니다. 좋은 지적에 감사 드립니다.

 

중도에 대하여 누구나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중도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초전법륜경에 중도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마침 중도 세미나가 있어서 중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세미나에 따르면 중도는 완성된 도로서 깨달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중도는 팔정도이다라 했을 때, 여기서 팔정도는 완성도가 아닌 실천도라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입니다. 완성된 도로서 중도와 실천도로서 팔정도입니다.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한다.”라 했습니다. 이 말에 이어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설합니다. 십이연기의 유전문은 사성제에서 고성제와 집성제에 해당되고, 십이연기의 환멸문은 사성제에서 멸성제와 도성제에 해당됩니다. 도성제가 팔정도이기 때문에 팔정도가 실천도임에 틀림 없습니다.

 

중도에는 고락중도, 유무중도, 단상중도 등 수 많은 중도가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어느 스님은 가격중도까지 이야기합니다. 제품가격을 정하는데도 중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도는 정치용어로도 사용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이미 완성된 도로서 깨달은 상태를 말합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자와 행복하고 부유한 자를 대하는 태도는 극단으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나보다 불행한 자에게는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나보다 행복한 자에게는 질투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양극단입니다. 

 

호불호(好不好)’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한번 실은 사람은 죽어라 미워하고, 한번 좋으면 역시 죽어라 좋아 합니다. 이는 양극단입니다. 탐욕과 성냄 또한 양극단입니다. 좋으면 거머 쥐려 하는 것이 탐욕이고, 싫으면 밀쳐 내려 하는 것이 성냄입니다.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양극단을 떠난다는 것은 탐욕과 성냄을 떠나는 것이고, 좋아함과 싫어함을 떠나는 것입니다. 연민과 질투를 떠나는 것도 중도일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중도라 한 것입니다. 지적한 대로 중용이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경전이 왜곡되었다고?

 

걸사님의 두 번째 지적을 보면 경전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경전도 오류가 있음을 말합니다. 가르침이 구전되어 온 과정에서 변질될 수도 있고 문자화 하는 과정에서 편집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또한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실수도 있음을 말합니다. 누구나 한번쯤 의심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유독 마하야나주의자들에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걸사님은 우리말로 번역된 빠알리 경전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습니다. 정말 부처님이 하신 말씀인지 의문스럽다는 것입니다. 전승과정에서 변질되고 편집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번역자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경전을 번역하는 자는 열반체험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수행도 해보지 않은 자가 어떻게 번역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만나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걸사님의 지적은 어느 정도 타당합니다. 방대한 빠알리 경전이 모두 부처님 가르침인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결집과정에서 추가되거나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구전 과정에서 왜곡될 수 있고 더구나 문자화 과정에서 잘못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구전이 가장 정확하다고 합니다. 기억하여 암기 하는 것이 문자화 한 것 보다는 오류가 적다는 것입니다.

 

문자화 하다보면 필사할 때 졸다가 한줄 빼 먹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번갈아 가며 암송했을 때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암송하면 장음이나 단음 등으로 문자화 할 수 없는 이점도 있다고 합니다.

 

팔만사천법문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사천법문이라 합니다. 놀랍게도 이런 말은 테라가타에도 있습니다. 아난다는 삼십련시집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Dvāsīti buddhato gahi,

dve sahassāni bhikkhuto;

Caturāsītisahassāni,

ye me dhammā pavattino.

 

부처님에게서 팔만이천,

수행승들에게서 이천을 받아

팔만사천의 법문을

나는 담지하고 있다.”(Thag.1030,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팔만사천법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말은 ‘Caturāsītisahassāni’를 번역한 것입니다. 여기서 ‘Caturāsīti+sahassāni’로 분해되는데, ‘Caturāsīti’ ‘eighty-four’의 뜻이고, ‘sahassāni’‘a thousand’의 뜻이 되어, ‘Caturāsītisahassāni’를 팔만사천이라 합니다.

 

아난다가 팔만사천이라 한 것은 고빠까 목갈라나라는 바라문이 물어 보았을 때 답한 것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바라문은 그대는 많이 배웠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통하다. 그대는 스승께서 말한 것을 얼마나 기억하는가?”라고 물었는데 그것에 대하여 답한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팔만사천법문이 부처님이 모두 설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은 팔만이천법문을 설했고, 제자들이 이천법문을 설한 것입니다.

 

불리한 내용도 들어가 있다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합니다. 또 팔만사천법문이라 합니다. 놀랍게도 초기경전에서 근거를 발견합니다. 그것도 테라가타 아난다의 게송에서 발견됩니다. 테라가타 해제에 따르면 테라가타 성립시기에 대하여 부처님 재세시부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제일결집에서 송출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게송에 따라 제3차 결집에서 편입된 것도 있다고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대부분 게송이 부처님 당시 제자들의 깨달음과 열반의 기쁨과 환희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게송에서는 놀랍게도 팔만사천 법문중에 이천법문이 수행승들의 법문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리한 것도 넣은 것입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고디까나 박깔리 존자의 자살에 대한 언급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바로 이런 점이 초기경전에 신뢰성을 부여 한다는 사실입니다. 수행승의 자살이라는 불리한 내용도 들어가 있는 것은 경전이 왜곡되지 않고 올바로 전승된 증거라 합니다.

 

인식의 지평을 넓히면

 

초기경전을 접하면 마치 퍼즐맞추기하는 것은 느낌입니다. 가르침은 이미 다 완성되어 있음에도 인식의 한계로 인하여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을 접하면 접할수록 인식의 지평은 넓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수 십권에 달하는 방대한 초기경전을 다 읽을 수는 없습니다. 소설 읽듯이 첫 페이지부터 읽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디를 열어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런 부처님 가르침은 사성제로 요약됩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은 사성제로 수렴됩니다. 그런 사성제는 팔정도에서 정견에 해당되는 것이고, 팔정도는 사성제의 도성제에 해당되기 때문에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사성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에 해당되고, 십이연기에서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 했으므로, 사성제와 십이연기도 맞물려 돌아가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는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기계장치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 가는 듯합니다. 이런 구조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Sytematic’하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구조적이고 체계적이라는 말입니다.

 

초기경전을 접하면 접할수록 가르침이 구조적이고 체계적임을 실감합니다. 방대한 빠알리경전이 마치 거대한 기계장치의 구조물같다는 느낌이 들어갑니다. 또한 복잡한 전자회로 같다는 느낌도 들어갑니다. 만일 거대한 기계장치에서 하나가 고장나면 돌아 가지 않을 것입니다. 복잡한 회로장치에서 부품하나가 결함 있으면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읽어 보지도 않고

 

부처님 가르침은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경전을 접하면 접할수록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마치 아이들 퍼즐맞추기 놀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경전을 보지도 않은 자들은 먼저 비난부터 합니다. 경전을 다 읽어 본다면 왜곡되었다든가 등의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논장은 더욱 더 체계적입니다. 법을 체계화 한 것이 아비담마 논장입니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읽어 보면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체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여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접하면 가르침에 더욱 더 신뢰감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논장을 비난하는 자들은 대게 읽어 보지도 않고 공부하지도 않은 자들입니다. 그래서일까 유튜브에서 법사라 불리는 자는 저는 솔직히 아비담마를 모릅니다.”라 말하면서 맹비난합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가 숙여진다고 합니다. 진리의 세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초기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자가 초기경전이 왜곡되었다고 말하고, 논장을 읽어 보지 않은 자가 부처님이 그런 말 한적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경장도 믿지 않고 논장도 거부한다면 무엇을 믿어야할까요? 아마 자신이 말하는 이야기를 믿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빗나간 견해를 말하는 자들

 

정견과 사견이 있습니다. 정견은 부처님 가르침을 말하고, 사견은 빗나간 견해를 말합니다. 육사외도 스승의 가르침을 견해(diṭṭhi)라 합니다. 빗나간 견해를 말하는 자들은 이것만이 진리이다.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M95) 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으로 모두 논파되어 거짓이 됩니다. 오늘날도 예외는 아닙니다. 자칭타칭 도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입만 바라보라고 합니다. 자신이 깨달은 자이기 때문에 부처라 보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진리라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가르침마저 왜곡합니다.

 

오늘날 불자들은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누가 스승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승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초기경전을 부정하는 자들, 논장을 부정하는 자들은 스승의 자격이 없습니다. 전승된 빠알리삼장을 부정하고 오로지 자신의 입만 바라보라고 했을 때 사견, 빗나간 견해이기 쉽습니다.

 

스승을 잘못 선택했을 때

 

스승이 없는 시대에는 경전이 스승입니다. 부처님의 원음이 고스란히 실려 있는 빠알리경전이 이 시대의 스승입니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에서는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이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라 했습니다. 믿고 신뢰할 만한 스승이 없을 때는 차라리 경전을 스승으로 하는 것이 나음을 말합니다.

 

온갖 견해가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자칭타칭 도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세치 혀로 온갖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대게 경전을 비방합니다. 경전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길로 가기 쉽습니다.

 

스승을 잘 못 만났을 때 현생 뿐만 아니라 내생에서도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선택할 때는 “첫째, 어느 경전에 근거 하고 있는가, 둘째, 어느 주석서에 근거 하고 있는가, 셋째, 어느 스승으로부터 전수 받았는가, 넷째, 언행이 일치 하는가”를 따져 스승을 정해야 합니다.

 

경전을 근거없이 비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대게 탐욕과 분노 등 번뇌에 가득찬 자들입니다. 법문이라 하지만 받아 적을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럴 듯하게 이야기해도 빗나간 견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봉사들이 줄을 섰는데, 앞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전을 비방하고 논장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스승으로 했을 때 불이익받을 것입니다. 사견을 가진 자들을 믿고 따랐을 때 오랜 세월 불행과 고통을 가져올 길로 다른 사람을 이끄는 것은 아닌가?”(M95) 라 했습니다. 그런데 현생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스승을 잘못 선택했을 때 현생은 물론 내생에서도 불행과 고통이 따를 것이라 했습니다.

 

 

2017-05-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