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우연과 연기론적 인과관계에 대하여, 무주 안국사 순례법회

담마다사 이병욱 2017. 6. 7. 19:46

 

우연과 연기론적 인과관계에 대하여, 무주 안국사 순례법회

 

 

 

 

이른 아침에 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비입니다. 충청도 어느 지역에서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우제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메마른 대지가 촉촉히 젖었습니다. 그러나 해갈할 만한 양은 아닙니다. 어디에서인가 산사태가 났다는 뉴스가 나올 정도는 되어야 비다운 비가 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랑비 내리듯, 내릴 듯 말 듯 내리는 비이긴 하지만 가뭄에 단비임에 틀림 없습니다.

 

순례법회 떠나는 날에

 

산하대지가 촉촉히 젖은 날 6 6일 순례법회를 떠났습니다. 매년 6 6일과 10 3일은 일년에 두차례 있는 능인선원 금강회전체순례법회날입니다. 원장스님과 함께 떠나는 순례법회에 여섯 대의 버스에 230명의 법우님들이 동참했습니다.

 

작은 법회모임에서는 일년에 네 차례순례를 떠납니다. 그 중에 두 차례는 금강회전체순례에 동참하여 떠납니다. 올해 들어 두 번째 순례에서 16명의 법우님들이 동참했습니다.

 

늘 변함없는 법우님들입니다. 2004년에 불교교양대학으로 인연을 맺었으니 올해로 만13년이 됩니다. 벌써 13년째 보아서인지 나이감각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10년전 순례법회 사진을 보니 세월이 흘렀음을 느낍니다. 더 나이 들어 보이고 머리는 점점 희어져 가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매년 함께 해서일까 얼굴을 보면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듯합니다.

 

순례법회 떠나는 날은 늘 설레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소풍 가는 것 같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 7시 이전까지는 도착해야 합니다. 먼 길이기 때문에 일찍 출발할수록 유리합니다. 일상사를 잠시 접어 두고 몸과 마음을 세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순례법회는 불교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일 것입니다.

 

무주 안국사를 햐하여

 

이번 순례법회는 무주 안국사입니다. 해발 천고지 가까이에 있다는 적상산성 안에 있는 호국사찰입니다. 설명문에 따르면 안국사는 사고(史庫)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적상산사고가 그것입니다. 임진왜란후에 조선왕조실록이 3백년동안 보관되어 있던 곳입니다.

 

 

 

 

 

 

 

 

 

적상산실록은 원래 묘향산 보현사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한국전쟁이 났을 때 북한에서 실록을 반출해갔다고 합니다. 이는 묘향산 사고에 있던 것이 전라도 적상산을 거쳐 일제시대에 서울 장서각으로 옮겨진 것을 말합니다. 북한이 전쟁의 와중에서도 그 중요성을 알아 북한으로 가져 간 입니다.

 

적상산은 해발 1029미터에 달합니다. 안국사는 내륙 깊숙히 해발 천고지 가까이 되는 사찰입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은 곳이었으나 지금은 꼭대기까지 도로가 개설되어 전세버스가 올라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안전띠를 슬며시 매었는데

 

안국사올라 가는 길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마치 대관령이나 한계령 고개를 넘어갈 때처럼 구불구불한 길입니다. 마치 배속의 창자처럼 구불구불 비좁은 도로가 좁아 더욱 아찔합니다. 곡예운전을 하듯 매우 천천히 올라가는 버스 속에서 비로소 안전띠를 슬며시 맺습니다. 운전기사가 안전띠착용을 권유했으나 무시했지만 꼬불꼬불 위태한 길에서 스스로 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긴장했습니다.

 

 

 

 

 

 

 

 

 

구불구불 비좁은 양장길은 조금만 부주의해도 사고가 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일까 안국사는 겨울철에는 버스가 다닐 수 없다고 합니다. 운전실력이 없는 기사들은 포기하고 말 것 같은 길입니다. 모든 것은 운전기사의 운전솜씨에 달려 있습니다.

 

산길을 올라가다가 관광버스가 굴렀다는 뉴스를 종종 접합니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 마다 나의 목숨과 운명은 운전기사 한사람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운전기사가 조금만 판단을 잘못하면 나의 인생은 이곳에서 끝날지도 모릅니다. 그럴 경우 대단히 억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육지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수 많은 교통사고가 일어납니다. 그런 사고 중에 세월호가 있었습니다. 수백명의 학생들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스마트폰에살고싶어요라며 절규하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꼼짝없이 죽음에 직면 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탁월한 수행자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수 많은 글을 썼습니다. 사고사로 죽은 자들에 대한 불교적 해법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불교적 해법은 상윳따니까야 몰리야 씨바까의 경(S36.21)’에서 찾았습니다. 그것은 여덟 가지 원인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앙굿따라니까야에서도 여덟 가지 원인이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탁월한 수행자의 경(A5.104)’이 그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탁월한 수행자의 경(A5.104)’에는 수행자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수행자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탁발음식 등 네 가지 필수품에 대하여 간청하면 받고 간청하지 않으면 받지 않는 등 다섯 가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상윳따니까야 몰리야 씨바까의 경과 일치 합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Yāni kho pana tāni vedayitāni cittasamuṭṭhānāni vā semhasamuṭṭhānāni vā vātasamuṭṭhānāni vā sannipātikāni vā utuparināmajāni vā visamaparihārajāni vā opakkamikāni vā kammavipākajāni vā, tānissa na bahudeva uppajjanti. Appābādho hoti.

 

그에게는 담즙으로 인해서 생기거나, 점액으로 인해서 생기거나, 바람으로 인해서 생기거나, 체질로 인해서 생기거나, 계절의 변화로 인해서 생기거나, 불운한 사건으로 인해서 생기거나, 우연한 인해서 생기거나, 업의 과보에 인해서 생겨나는 고통이 많지 않고 질병이 없다.”(A5.104)

 

 

수행자중의 수행자, 탁월한 수행자는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운명적 사건에 크게 휘둘리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건으로 인하여 크게 고통받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는 세상의 이치를 알기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항상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새기고 실천하기 때문에 운명적 사건이 닥쳐도 크게 당황한다거나 낙담하지도 않고 심지어 억울해 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고사(事故死)에 대하여

 

경에 따르면 삶의 과정에서 8가지 사건이 발생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어쩌면 교통사고처럼 목숨까지 잃게 되는 사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고가 발생했을 때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지, 그리고 불교적 해법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가르침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여덟 가지 원인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인간체험(vedayitāni) 8가지 원인들을 다루고 있다. 이 가운데 세 가지는 우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절대적 의미에서의 우연, 즉 무인(無因:ahetu)과 일상적 의미의 우연(sammutisacca)을 명확히 구분했으며, 일상적 의미에서 우연은 연기론적인 인과관계로 설명했다. 1) 계절의 변화에 의한 발생 (utuparināmajāni), 2) 불운한 사건의 발생(visamaparihārajāni), 3) 우연한 피습(opakkamikāni)이다. 이들은 우연적인 사건이지만 인간체험의 8가지 원인들 가운데 3가지로 언급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자신의 업의 과보(kammavipākajāni)는 오직 한 가지에 해당한다. 모든 개인의 고통은 전생의 업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한 일상적 의미에서의 우연적 사건이 인과적으로 야기된 것이라는 것을 부정한 불교의 문헌은 없다.”(앙굿따라니까야 5 287번 각주, 전재성님)

 

 

경에 따르면 사람이 살면서 고통을 겪는 것에 대하여 여덟 가지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담즙, 점액, 바람, 체질, 계절변화, 불운한사건, 우연한 피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업보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원인 중에는 놀랍게도 우연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교인들의 상식이라면 모든 것이 업과 업의 과보로 볼 것입니다. 그래서 교통사고가 나서 조금 다쳤다면 다행이라 말하면서 액땜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혀 다릅니다. 만일 모든 것을 업보 탓으로 돌리면 숙명론자가 됩니다. 숙명론은 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S36.21)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는 자이나교의 교리입니다.

 

부처님은 숙명론을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만일 모든 것이 업과 업의 과보로 본다면 숙명론일 뿐만 아니라 결정론이 되기도 합니다. 과거에 지은 업이라도 반드시 과보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업이 달리 익기 때문입니다. 업을 지으면 이생에서 과보를 받을 수 있고 다음생에서도 받을 수 있고 먼 후생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업이 효력이 상실 될 수도 있습니다. 악업 보다 선업을 더 많이 지었을 때입니다 마치 소금덩이를 강물에 던지면 짠맛을 느낄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뉴스에 따르면 체육관 천정이 무너져서 신입생들이 죽고, 길거리공연장에서 대형 환풍판이 무게를 못이겨 가라 앉아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고는 예측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사건을 전생의 업보 탓으로 돌린다면, 지나가다 떨어진 간판에 즉사한 사람이나 벼락에 맞아 죽은 자도 업보 탓으로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여덟 가지 원인 중에 우연적인 것이 세 가지라 했습니다. 그것은 즉 1) 계절의 변화에 의한 발생 (utuparināmajāni), 2) 불운한 사건의 발생(visamaparihārajāni), 3) 우연한 피습(opakkamikāni)을 말합니다. 특히 불운한 사건과 우연한 피습은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통사고 등 각종 사고사(事故死)로 죽는 케이스가 이에 해당됩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건을 우연론이라 볼 수 없습니다. 만일 모든 것을 우연이라 본다면 모든 것은 이는 절대적 의미에서 우연론, 즉 무인론이 되어 버립니다. 절대적 우연론이란 그 모든 것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만들어진 것이다.”(A3.61) 입니다.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부처님의 연기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업보 탓으로 돌리는 숙명론이나 어떤 것도 우연에 의해 발생한다는 무인론을 배격했습니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를 설했습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업과 업의 과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몰리야 팍구나가 부처님에게 운명에 대하여 물었을 때 부처님은 여덟 가지로 대답했습니다. 그 중의 세  가지는 우연에 대한 것이고 마지막으로 업의 과보(kammavipākajāni)’에 대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우연론을 인정했습니다. 이는 경에서불운한 사건의 발생(visamaparihārajāni)우연한 피습(opakkamikāni)’이 대표적입니다. 그렇다고 이 두 가지는 절대적 의미에서 무인론이 아닙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우연적 사건이 인과적으로 야기된 것이라는 것을 부정한 불교의 문헌은 없다.”라 했습니다. 모든 것은 인과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다는 말입니다.

 

우연과 연기론적 인과관계

 

세월호에 탑승한 학생들은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들 중 어떤 학생은 스마트폰에 나는 살고 싶어요라고 절규했습니다. 이런 죽음에 대하여 어떤 이는 숙명론이라 받아 들이고 또 어떤 이는 우연론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건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학생들이 세월호에 탑승한 것이 가장 가까운 원인입니다. 이밖에도 기상악화나 운전미숙, 정비불량, 암초 등 수 많은 요인이 있습니다. 하필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이런 사고는 전생의 업보 때문도 아니고 원인 없이 일어나는 우연적 사건도 아닙니다.

 

사고는 일어날만한 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천정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하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절대적 숙명론과 절대적 우연론을 부정했습니다. 부처님이 업의 과보를 말씀 했지만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이는 업이 달리 익기도 하지만 업은 효력을 상실하기도 합니다. 악업을 지은 자가 이를 압도할 선업을 지었다면 마치 갠지스 강물에 소금덩이를 던진 것처럼 악업이 약화 되어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과 고통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니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만일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내가 만든 것이라면 내탓이요!”가 되어 영원주의가 되어 버리고,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이 남이 만든 것이라 하여 네탓이야!”라 한다면 허무주의가 됩니다. 이는 양극단입니다.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한다고 하며 무명으로 인하여 형성이 일어나고로 시작되는 십이연기를 설했습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를 있게 한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안국사 가는 극도로 위험한 꼬부랑길에 생명의 위험을 느꼈다면 하필 그 버스에 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또한 나의 운명은 전적으로 버스운전기사의 운전실력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안전띠를 매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버스가 굴러 죽는다면 과연 해야 할 일을 다 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청정한 삶을 살았다면 담담하게 받아 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즐기는 삶을 산 자가 죽음에 이르렀다면 아직 할 일이 많은데라며 아쉬워하며 죽을 것입니다.

 

꼬부랑길에 버스가 굴러 죽음에 이르렀다면 이는 전생의 과보에 따른 숙명적인 것도 아니고, 무인론에 기반한 우연론도 아니고 하필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불운한 사건의 발생(visamaparihārajāni)우연한 피습(opakkamikāni)’이라 하여 우연을 인정했지만, 이러한 우연은 인과의 지배의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의 법칙에 지배 받음을 말합니다. 가장 가까운 원인은 버스에 탄 것이고, 먼 원인은 순례일정에 동참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까운 원인부터 먼원인까지 따져 가다 보면 숙명론이나 우연론이 발붙이지 못합니다.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괴로움은 업과 업의 과보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살다보면 피치 못하게 불운과 우연이 발생합니다. 이는 업보의 성숙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굶주림이나 목마름, 중독, 물림, 불에탐, 익사함, 살해당함 등은 제때에 죽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것은 업의 성숙과는 달리 불운한 사건으로 의학적으로 처리 될 수 있는 것이다.”(Milp.302)라 했습니다.  업과 업의 과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고사는 업보와 무관합니다. 그러나 연기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원인(hetu)과 조건(paccaya)과 결과(phala)라는 연기의 법칙에 따릅니다. 일상적 의미에서 우연은 연기론적 인과관계에 따른 것입니다.

 

불두화가 절정

 

안국사 가는 길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오로지 운전기사의 실력에 달려 있습니다. 마침내 안국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안심했습니다. 해발 천고지 가까이에 있는 안국사는 이제 봄이 한창인 것 같습니다. 가까이 가니 불두화가 절정입니다. 저지대에서는 이미 한달전에 피었던 것입니다. 천고지 가까이에 있어서일까 한달 가량 계절의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법석이 열리고

 

안국사는 경치가 매우 좋은 절입니다. 내륙 깊숙이 있고 더구나 해발고도가 천고지에 달하다 보니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듯 합니다. 발아래는 산들이 아득히 포개져 있습니다. 큰 마음 먹으면 오기도 힘든 절에서 법석이 열렸습니다. 도착하자 마자 순례자들은 법당에 자리잡았습니다. 가는 비가 뿌려서 완전한 야단법석은 되지 못했습니다. 법우님들은 극락전과 청로루에 주로 자리잡았습니다.

 

 

 

 

 

 

 

 

 

 

순례지에서 법회를 연다고 하여 순례법회라 합니다. 2004년 이후 대부분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언제나 매년 6 6일 현충일날에는 금강회 춘계순례법회 가는 날로 정해져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정근

 

순례법회에서 하일라이트는 아마 정근(精勤)일 것입니다. 주로 관세음보살정근입니다. 지장도량에 가면 지장정근을 합니다. 관세음보살정근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며 칭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일이십분 하는 것도 아니고 보통 사오십분합니다. 계속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라고 정근하다 보면 삼매에 빠져 든다고 합니다.

 

청로루에서 법우님들은 서서 계속 정근합니다. 정근소리가 법당 가득하게 울려 퍼집니다. 계속해서 같은 소리를 내니 자신이 내고 자신이 듣는 것이 됩니다. 더구나 수십명이 함께 소리를 내니 공명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수 십분 동안 진행된 정근에 불자들은 지리한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순례법회의 하일라이트는 스님의 법문보다도 정근인 것 같습니다.

 

관음가피력

 

관세음보살을 칭명하면 칠난에서 벗어나고 구남구녀한다는 법화경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칭명함으로 인하여 소원성취하는 것 보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법화경 관세음보문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또 만일 중생이 음욕이 많더라도 관세음보살을 항상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음음욕을 여의게 되며, 혹은 성내는 마음이 많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그 마음을 여읠 수 있으며, 혹은 어리석음이 많더라도 관세음보살을 항상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그 어리석음을 떠날 것이니라.”(관세음보살보문품, 법화경, 운허스님역)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는 모두 소리를 내어 나무관세음보살한다면 그 재난을 벗어나리라.”라 했습니다. 그리고서 위와 같이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관세음보살을 칭명하는 과정에서 탐, , 치가 소멸함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정근 하는 것이 불자들이 말하는 소위 사대소원, 즉 건강, 학업, 사업, 치유를 목적이라기 보다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데 더 큰 목적이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관세음보살을 칭명하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 하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칭명하는 과정에서 이미 마음이 청정해졌기 때문에 소원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 없어 보입니다.

 

오체투지를 했는데

 

관세음보살정근을 할 때 대부분 일어나서 합장한 채 계속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라 합니다. 일부 불자들은 계속 절하기도 합니다. 거의 사십분 가량 이어진 긴 정근시간이 어떤 이들에게는 지루하기도 하고 자장가처럼 들리기도 할 것입니다.

 

긴 정근시간을 활용하여 오체투지를 하기로 했습니다. 해발고도가 천고지 가까이이고 더구나 가느다란 비까지 와서 한기를 느꼈습니다. 또한 몸상태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오체투지를 하여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오체투지를 여러 번 하면 점심공양시간에 밥맛도 좋아질 것이라는 계산도 작용했습니다.

 

처음 오체투지할 때는 우리나라 방식에 따라 했습니다. 두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모아 합장한 채로 무릎을 꿇고 두 손과 머리를 바닥에 대는 것입니다. 이때 두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받드는 듯한 제스처를 취합니다. 한국불교 불자들은 절을 할 때 이와 같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관세음보살정근소리와 함께 천천히 오체투지 했습니다. 108배 등 숫자 세기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건강을 위해서 시작했습니다. 절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심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새로 계발한 오체투지 방법에 따른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식과 티벳식, 그리고 테라와다식을 절충한 것입니다.

 

새로 계발한 삼단터치방식 오체투지

 

티벳에도 오체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티벳오체투지는 우리와 다릅니다. 티벳에서는 전체투지(全體投地)’라 하여 온몸을 바닥에 쭉 까는 형식입니다. 우리나라에서처럼 사뿐사뿐 절하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티벳에서 전체투지하는 방식은 매우 다이나믹합니다. 가장 먼저 두 손을 하늘높이 치켜 세웁니다. 이때 두 손바닥을 붙이면 안됩니다. 두 손을 마치 연꽃봉오리처럼 만들기 위해 벌려 줍니다. 그 상태에서 정수리에 한번 터치합니다. 모두  세 번의 터치가 이루어집니다. 정수리와 이마와 가슴입니다. 삼단터치 한 다음 바닥에 온몸을 쭉 깔듯이 붙입니다. 이때 몸이나 옷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몸을 바닥에 깔자마자 곧바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몸을 바닥에 깐 채로 한참 있으면 죽어서 뱀이 된다고 합니다.

 

 

 

 

 

티벳식 전체투지

 

 

테라와다에도 오체투지가 있습니다. 두 손을 합장한 다음 이마나 코 부근까지 올려서 합장한 다음 몸을 구부려 두 팔과 머리를 바닥에 대는 방식을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한국식과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두 손을 펴서 하늘로 향하게 하는 행위는 보이지 않습니다. 두 팔을 바닥에 붙인 상태로 있다가 곧바로 일어나는 방식입니다.

 

 

 

 

 

스리랑카 웨삭데이

 

 

 

한국식과 티벳식, 테라와다식을 절충하여 오체투지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삼단터치입니다. 티벳식을 모방한 것입니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한 다음 가장 먼저 이마를 터치합니다. 다음으로 입, 그리고 가슴에 터치합니다. 이렇게 삼단 터치하면서 , , 하며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불이 이마에 해당되고, 법이 입에, 승이 가슴에 해당됩니다. 이렇게 삼단터치한 다음 두 팔과 이마를 바닥에 댔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두레는 생략했습니다. 테라와다식을 모방한 것입니다.

 

새로 시도한 오체투지는 삼단터치입니다. 이마와 입과 가슴터치입니다. 이런 삼단 터치는 불, , 승 삼보를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신, , 의 삼업을 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삼단터치할 때마다  ”, “”, “이라고 마음속으로 크게 외칩니다. 투지할 때는 삼보귀의이라 합니다. 한번 절함에 따라 세 가지를 이루는 것입니다. 일석삼조 또는 겟쓰리(Get Three)라 볼 수 있습니다.

 

불법승삼보 대신 신구의삼업으로 대치할 수도 있습니다. 이마, , 가슴을 삼단 터치하면서 ”, “”, “라고 마음속으로 크게 외치면서 투지할 때 삼업청정이라고 말합니다. 한번 절함에 따라 불법승삼보귀의이나 신구의삼업청정을 외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체투지 방식은 즉석에서 계발한 것이고 검증된 것이 아닙니다.

 

절에서 먹는 밥은 비빔밥은

 

길고 긴 관세음보살정근이 12시가 되자 끝났습니다. 원장스님의 법문에 이어 모두가 기다리는 점심공양시간이 되었습니다. 법문이 끝나기도 전에 미리 줄을 서서 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절에서 먹는 밥은 비빔밥입니다. 몇 가지 나물에다 고추장을 풀어 비벼먹어도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식사입니다. 청정한 마음에 청정한 식사를 하니 그 순간만큼은 몸과 마음이 모두 청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안국사는 어떤 절일까?

 

내륙 깊숙히 천고지 가까이 되는 곳에 있는 안국사는 세상사람들의 발길을 불허했습니다. 오지중의 오지에 절이 있는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사고 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 이름도 안국사(安國寺)라 했을 것입니다. 안국사에 대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적상산사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적상산사고는 실록과 선원보 등 전적들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사각(실록각)과 선원전을 건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충주· 성주· 춘추관의 실록이 병화로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남게 되었는데 이 실록은 난 중에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해주· 강화· 묘향산에 옮겨지면서 난을 피했다. 난이 끝나자 실록을 강화로 이송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묘향산으로 옮겼다가 1603 5월경에 다시 강화도로 안치하였다. 1603년 전주사고본을 모본으로 3부를 인쇄하고 여기에 교정본과 원본을 합쳐 5부를 마련 인쇄본 1부는 춘추관인 내사고에, 2부 교정본 1부 원본 1부는 강화의 마니산사고를 비롯하여 봉화의 태백산, 영변의 묘향산, 평창의 오대산사고에 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다. 그러다가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1610년 실록을 남쪽의 안전지대로 옮기기로 하고 1612년 적상산성으로 장소를 정해 1613년 사각을 짓기 시작, 1614년 완성됨으로써 오대산· 태백산·정족산· 적상산의 4대사고가 되었다. 특히 적상산사고는 서책의 보관상태가 좋아 실록을 고출하는 장소로서 임금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적상산사고에는 4대문이 있었으나 북문과 서문에 누각을 설치하고 주로 이곳으로 통행하였으며, 사고에는 사각· 선원각과 삼문이 있었고 사고의 수호와 포쇄시 이용했던 군기고, 참봉청, 별장청, 객사가 있었으며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 호국사, 안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고는 주로 사찰의 승병들이 지켰다. 건립당시에는 50여 명이었고 '선조실록' 봉안시에는 92명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태조 영정이 적상산사고에 봉안되기도 하였으나 난중에 승병이 흩어지고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그 위험이 더해지자 승려 각성에게 도총섭(
都摠攝)의 칭호를 제수하고 적상산성에 거주케 하였으니 적상산사고에 대한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11. 조선왕조실록의 요람 무주 '적상산사고', 전북일보 2011-08-14)

 

 

 

 

 

 

 

 

 

 

 

 

 

전북일보 기사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이 3백년관 보관 된 것이 이곳 적상산사고라 합니다. 그런데 기사에서는 이곳에 있었던 실록이 북한으로 넘어간 것은 언급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찰 설명할 때 한국전쟁당시 이곳에 있었던 조선왕조 실록을 극비리에 북한으로 가져갔다고 합니다. 본래 묘향산에 있던 것을 이곳에서 3백년 동안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라 합니다.

 

 

경이로운 무주양수발전소

 

해발 천고지 가까이에 있는 안국사는 접근하기 힘든 사찰입니다. 너무 가팔라서 겨울에는 길이 통제됩니다. 날씨가 풀리는 사월부터 단풍철이 끝나는 시점까지만 개방된다고 합니다. 이런 사찰을 2년전 메르스 사태가 절정일 때 순례계획을 잡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 당시 공포스런 분위기로 인하여 순례가 취소되었고 만 2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오게 된 것입니다.

 

내륙 해발 천고지 가까이에 있는 안국사는 경이로운 것들이 많습니다. 적상산성과 왕실사고가 이를 대표합니다. 그러나 현대판 경이라면 무어니 해도 양수발전소일 것입니다. 이름하여 무주양수발전소입니다. 하부저수지의 물을 상부저수지로 끌어 올려서 발전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시간당 60만키로와트라 하는데 일반 댐발전소에 비하여 6배의 효율이라 합니다.

 

 

 

 

 

 

 

 

 

 

 

 

 

 

 

 

 

 

 

 

 

 

 

 

 

 

 

 

 

 

 

 

 

 

 

 

 

양수발전소에는 커다란 전망대가 있습니다. 물을 저장하는 기능역할도 하고 전망대 역할을 합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세상은 끝이 없습니다. 산들이 첩첩이 포개져 아득히 이어집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거든

 

사람들은 대체로 안국사에 오기를 잘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오기 힘든 곳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세계테마기행에서 오지에 찾아 간 것 같습니다.

 

오지는 세상의 끝과 같습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너무나 깊은 곳에 있어서 전혀 다른 세상 같습니다. 한국에서 오지라면 단연 안국사일 것입니다. 구불구불 창자 같은 길에서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운전기사의 실수로 죽음을 맞이 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람 있었던 것은 새로 시도해 본 오체투지입니다.

 

관세음보살정근할 때는 티벳식과 테라와다식과 한국식을 절충하여 오체투지를 해 보았습니다. 테라와다에서는 삼귀의문이 아홉번이기 때문에 오체투지를 아홉번 이상 하는 것에 대하여 굴신운동으로 보지만, 불법승삼보귀의와 신구의삼업청정 오체투지를 알아차리면서 한다면 이것 또한 경행이나 좌선 못지 않게 좋은 수행방법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안국사에 오기를 잘 했다고 합니다. 온통 단풍나무천지인 안국사에서 단풍철에 다시 오기를 바라는 법우님들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거든 안국사로 가면 될 듯합니다.

 

 

 

 

 

 

 

 

 

 

 

 

 

 

 

 

 

 

 

 

 

 

 

 

 

 

 

 

 

 

 

 

 

 

 

 

 

 

 

 

 

2017-06-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