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
요즘은 두 개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입니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 없이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왕래합니다. 그럼에도 아날로그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료를 이메일로 보낸 다음 반드시 전화를 걸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 문자기능을 활용하여 “자료 발송했습니다.”라고 하면 그만인 것을 굳이 전화를 걸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문자를 받으면 반드시 답신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실시간 소통이 가능합니다. 문자를 보냈는데도 답신이 없다면 전화를 하게 될 것입니다. 문자로 할 수 있음에도 자꾸 전화를 하면 짜증이 납니다. 요즘에는 부부간에도, 부모와 자식간에도 문자로 소통하는 시대입니다. 늘 스마트폰에 불이 들어왔는지 확인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세작이었나?
스마트폰 시대에 가장 강력한 소통수단은 카톡일 것입니다. 대개 문자로 소통하지만 친한 사람은 개별카톡으로 소통합니다. 카톡은 개별적 소통뿐만 아니라 집단소통도 가능합니다. 실시간으로 소통가능한 카톡은 때로 ‘업무용’으로도 활용됩니다. 그러나 대부분 모임이나 단체에서 단체카톡방을 만들어 실시간 소통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많은 단체카톡방이 있습니다. 그 중에 직선제 모임에 대한 카톡방도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일종의 운영자들의 모임방이고 또하나는 재가불자들의 모임방입니다. 운영자의 모임방에는 스님을 포함하여 재가활동가들 수 십 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재가불자방에는 백명이 약간 넘는 인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느 카톡방이난 마찬가지이겠지만 활발하게 소통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침묵모드입니다.
재가불자카톡방에서 S교수가 슬며시 퇴장했습니다. 그런 교수가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빠져나갈 때 이름을 보고서 알았습니다. 속담에 ‘오비이락’이라는 말이 있듯이 S교수가 나갔을 때 법보신문에서는 명진스님을 비난하는 S교수의 컬럼이 떴습니다. 이제까지 말 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흔히 말하는 ‘세작’역할을 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나기도 합니다.
불청객이 들어 왔는데
운영자모임방에서 대부분 결정이 이루어집니다. 총무원장 직선제에 대한 일정이나 동원, 구호 등 갖가지 의견을 취합하여 결정을 합니다. 만일 세작이 있다면 그대로 상대편에 정보가 고스란히 넘어 갈 것입니다. 촛불법회, 삼보일배, 기자회견 등 지금까지 문제 없이 잘 해 왔습니다. 대부분 침묵하는 가운데 이런 성과가 있기 까지 헌신적인 노력을 해 온 사람들이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불청객이 들어 온 것입니다.
불청객은 ‘오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로 찾아온 손님’을 일컫는 말입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다운 받을 때 끼여 들어온 프로그램 같은 존재입니다. 그 불청객은 다름 아닌 스님입니다. 들어온 스님은 M스님으로 대부분 싫어합니다. 약 두 달 전 H스님의 초대로 들어 온 바가 있었는데 분란을 야기하여 스스로 퇴장한 바 있습니다. M스님은 H스님에게 공개참회를 요구 하는 등 주도권 다툼을 벌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M스님은 타인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즉흥적으로 그것도 연속해서 자료를 올리는가 하면, 상대방의 동의도 받지 않고 이곳 저곳 카톡방에 명단을 초대합니다. 그리고서 자신의 에스엔에스 계정에 있는 내용을 남이 보건 말건 복사하여 뿌립니다. 마치 하루 종일 에스엔에스만 하는 사람 같습니다. 이런 스님의 막무가내식 행위에 대하여 몹시 불편해 한 바 있습니다.
셀프초청으로 들어온 스님
운영자방에는 여러 명의 스님들이 있는데 M스님은 D스님이 초청해서 들어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M스님이 카톡방에 들어 오자 침묵이 흘렀습니다. 또 어떤 분란을 일으킬지 다들 염려하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D스님은 M스님을 초청한 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D스님이 카톡방에 “M스님을 초청한 것이 아니라 잠시 M스님에게 핸드폰을 보여 드렸는데 본인이 초청을 했습니다.”라 했습니다. 남의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스스로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를 요즘말로 한다면 ‘셀프초청’이라 볼 수 있습니다.
M스님의 셀프초청에 대부분 격앙된 분위기입니다. 어느 활동가는 왜 들어 왔는지 따져 묻습니다. 이에 M스님은 ‘궁금해서’라 합니다. 청와대에서 삼보일배와 일인시위를 하고 있는데 돌아 가는 사정을 몰라서 들어 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비상식적 행위에 대하여 용납할 수 없다며 퇴장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M스님은 그냥 넘어가자고 합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들어와서, 그것도 아무도 모르는 자를 초대합니다. 그 자가 흔히 말하는 세작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막가파식 행위에 사람들은 분개하며 줄줄이 퇴장합니다.
범계승이 불교개혁운동한다고
M스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조계종 총무원장 직선제 활동을 하면서 삼배일보 스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M스님에 대한 평판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현재 조계종으로부터 제적상태라 합니다. 머리를 깍고 회색승복을 입었지만 승적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유는 오래 전에 혼인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승적이 박탈 당했는데 본인은 억울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혼인과 관련된 호적이 아직도 정리 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M스님은 조계종 수뇌부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합니다. 직선제 운동에 합류한 것이 자신의 복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런 M스님은 촛불법회나 삼보일배, 일인시위를 하면 현장에 반드시 모습을 나타냅니다. 스님의 과거 행적을 아는 활동가들은 경원시 합니다.
스님은 시위 현장 뿐만 아니라 식당에서 밥먹을 때도 나타납니다. 심지어 기자회견장에도 나타나 배석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M스님의 행보는 매우 불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위 여당지라 불리우는 불교신문과 법보신문에서는 혼인전과가 있는 범계승이 불교개혁운동한다고 대놓고 비난합니다.
수행자의 허물은
M스님으로 인하여 불교개혁운동이 지장 받고 있습니다. 모두가 원하지 않음에도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탐탁지 않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불교개혁운동의 순수성을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소위 은처승, 도박승, 폭력승 들로 이루어진 집단과 비교하여 도덕적 우위에 서야 운동을 이끌어 갈 수 있음에도 과거 전력이 그들과 다름 없는 자가 포함되어 있다면 타격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M스님은 셀프초청하여 카톡방을 휘젓고 다니고 있습니다.
청정함을 추구하는 수행자의 허물은 크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같은 허물이라도 일반사람들의 허물과 스님들의 허물은 다른 것입니다. 머리를 깍고 회색승복을 입었다는 것은 청정한 삶을 살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향기 도둑의 경(S9.14)’에 따르면 “때 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S9.14)라 했습니다.
걸인과 걸사는 어떻게 다른가?
삭발한 수행자가 청정한 삶을 살지 않을 때 비난 받을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빅쿠는 걸식에 의존했습니다. 출가한 수행자는 대부분 걸식에 의존했습니다. 그런데 걸식하는 자는 빅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에는 바라문 걸식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걸식자라고 해서 똑 같은 걸식자가 아닙니다. 바라문 걸식자가 “존자 고따마여, 저도 걸식자이고 그대도 걸식자입니다. 우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S7.20)라고 물어 봅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답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걸식을 한다고
그 때문에 걸식자가 아니니
악취가 나는 가르침을 따른다면
걸식 수행자가 아니네.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S7.20)
걸식자 중에는 걸인도 있습니다. 걸인도 밥을 얻어 먹는 것에 있어서는 빅쿠와 다를 바 없습니다. 출가 수행자라 하여 모두 똑 같은 출가수행자가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도 역시 걸식에 의존하는 출가수행자였습니다. 바라문 수행자 역시 걸식에 의존하는 출가수행자입니다. 그러나 빅쿠와 다른 것은 청정한 삶입니다. 같은 걸식을 해도 청정한 삶을 추구하는 자와 청정한 삶을 추구하지 않는 자로 갈립니다. 걸인(乞人)과 걸사(乞士)는 다른 것입니다.
수행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청정한 삶을 추구하는 자를 빅쿠라 합니다. 빅쿠는 단지 얻어 먹는 점에 있어서는 걸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목표하는 바가 다릅니다. 그렇다면 청정한 삶을 추구하는 빅쿠는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요? 앙굿따라니까야 ‘왕족의 경(A6.52)’에서 바라문 자눗쏘니가 부처님에게 “존자 고따마여, 수행자들은 무엇을 구하며, 무엇에 뜻을 두며, 무엇을 근거로 하며, 무엇에 천착하며, 무엇을 목표로 합니까?”(A6.52)라며 묻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Samaṇā kho brāhmaṇa khantisoraccādhippāyā, paññūpavicārā, sīlādhiṭṭhānā, ākiñcaññābhinivesā, nibbānapariyosānāti.
“바라문이여, 수행자들은 인내와 온화를 구하며, 지혜에 뜻을 두며, 계행을 근거로 하며, 무소유에 천착하며, 열반을 목표로 합니다.”(A6.52)
수행자(Samaṇā)가 지향해야 할 삶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열반(nibbāna)의 실현’입니다. 수행자는 다시 태어나고 죽는 것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린다.(Yodha puññañca pāpañca bāhitvā)”(S7.20) 라 했습니다. 수행자는 악행(papa)도 짓지 않지만 공덕행(puñña)도 짓지 않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공덕행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선행을 해도 선행을 했다는 티를 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육조단경에서 말하는 “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의 모티브라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열반을 목표로 합니다. 빅쿠가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각자 추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왕족의 경(A6.52)’에 따르면, 왕족은 권력을 목표로 하고, 바라문들은 하느님(Brahma)를 목표로 하고, 장자들은 작업의 완수를 목표로 하고, 여인들은 지배를 목표로 하고, 도적들은 들키지 않음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인내와 온화를 구하며, 지혜에 뜻을 두며, 계행을 근거로 하며, 무소유에 천착하며, 열반을 목표로 합니다.”라 했습니다.
세속적인 일에 지나치게 관심보이면
수행자가 열반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세속적인 일에 지나치게 관심을 보인다면 비난받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세속적인 일을 즐기고, 떠드는 것을 즐기고, 잠자는 것을 즐기고, 무리지어 지내는 것을 즐기는 것”(A5.149)이라 했습니다. 출가자의 본분인 수행과 포교를 멀리 하면서 지나치게 세속적인 일에 관심 가졌을 때 머리깍은 처사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한국불교에는 머리깍은 처사들이 많습니다.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권승들 역시 머리깍은 처사들입니다. 계행이 엉망인 자가 삭발하고 회색 승복을 입고 있어도 역시 머리깍은 처사입니다. 수행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려면 수행자 보다 더 수행자 다워야 합니다. 그럼에도 출가자 본분사인 수행과 포교는 등한시 한채 세속의 일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다면 머리깍은 처사임에 틀림 없습니다.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기려면
스님들이 출가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출가이유입니다. 출가이유에 대해서는 맛지마니까야 ‘랏타팔라의 경(M82)’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경에서는 “이 세계는 불안정 하여 사라진다.” “이 세계는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 “세상에는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 “이 세계는 불완전하며 불만족하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라 하여 네 가지 출가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열반의 실현입니다.
수행자가 열반을 실현하려면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소유와 걸식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 가야 합니다. 그런데 밥을 얻어 먹을 때 아무렇지 않게 얻어 먹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밥값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계행은 엉망이면서 머리깍고 승복입고 있으면 당연히 대접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빚진 자들입니다.
수행자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굶어 죽지 않습니다. 만약 스님이 굶어 죽었다면 어떤 한국불교의 수치일 것입니다. 신도들은 스님이 굶어 죽도록 절대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행이 엉망이라면 그대로 내버려 둘 것입니다.
스님들은 굶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공덕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으로 먹을 것, 입을 것, 거처가 해결됩니다. 부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가 하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스님이 있다면 부처님의 상속자라 볼 수 없습니다.
스님들이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기려면 가장 먼저 계행이 청정해야 할 것입니다. 음식을 대했을 때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라며 시주의 고마움을 표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 보다 “나는 정법인 큰 유산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게으른 자는 받을 수가 없다.” (Vism.1.132) 라고 부처님의 유산과 부처님 유산의 상속자로서 자기자신을 반조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쁜 곳으로 이끄는
많은 악업을 짓고
아직 그 업보에 맞딱뜨리지만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긴다. (Thag.882, M86)
스님은 무엇으로 사는가?
카톡방에 갑작스런 불청객의 출현으로 인하여 카톡방이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남의 스마트폰을 조작하여 스스로 들어 온 스님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줄줄이 퇴장합니다. M스님의 셀프초청으로 인하여 카톡방을 새로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로 만든 카톡방에서 또 다시 새롭게 한국불교 개혁에 대하여 논의할 것입니다.
이익과 명예의 칭송을 추구하는 권승들의 무리도 문제가 있지만 그것 못지 않게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스님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머리만 깍았을 뿐 행위하는 것을 보면 세상사람들의 도덕적 평균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럴 때 ‘스님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17-06-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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