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눈먼 자들이 길을 인도하면, 광화문에서 조계사까지 삼보일념(三步一念)

담마다사 이병욱 2017. 7. 2. 16:36


눈먼 자들이 길을 인도하면, 광화문에서 조계사까지 삼보일념(三步一念)

 

 

조계종 총무원장 직선과 관련하여 그 동안 네 번 촛불을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촛불시위 달리합니다.  법회형식을 빌기 때문에 ‘촛불법회’라 합니다. 삼귀의부터 시작하여 사홍서원으로 마무리 될 때 까지 시종 여법하게 진행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총무원측의 반응은 없습니다. 찻잔속의 미풍으로 그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방법을 달리 했습니다. 이번에는 삼보일배입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의사전달을 알리는 수단이 삼보일배일 것입니다. 정치인들도 종종 삼보일배를 함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그러나 삼보일배의 원조는 불교입니다. 스님들이 무분별한 개발에 맞서 삼보일배한 것이 시초입니다. 이렇게 오리지널 저작권이 불교에 있다시피한 삼보일배를 조계종총무원장 직선운동에 적용했습니다.

 

삼보일배도 진화하는가?

 

지금까지 삼보일배는 세 번 시행되었습니다. 출발지는 모두 광화문광장입니다. 작년 촛불의 힘으로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붕괴시킨바 있는 역사적 현장이기도 합니다. 광화문역 2번 출구 케이티본사앞이 집결지입니다.

 

첫 번째 삼보일배 때는 구호를 크게 외쳤습니다. 그것도 확성기를 동원하여 “직선실현”과 “자승OUT”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쳐댔습니다. 아마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을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삼보일배 때는 삼보를 걷다가 한번 멈추어 선 다음 목탁소리에 맞추어 반배를 했습니다. 첫 번째 삼보일배 때 삼보일배 선발대가 땅바닥에 삼보일배 행진 했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비교적 조용히 마무리 되었습니다.

 

세 번째 삼보일배는 지금까지 했던 것과 전혀 다른 양상입니다. 구호도 없이 침묵속에 삼보일배한 것입니다. 이를 삼보일념(三步一念)이라 합니다. 삼보일배도 점점 진화해 가는 것 같습니다.

 

눈을 감고 소청줄에 의지하여

 

 

세 번째 삼보일배, 즉 삼보일념은 7 1일 토요일 오후 5시 광화문 케이티본사 사옥 앞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삼보일념에 임하는 방법에 대하여 허정스님은 공지에서 경쇠소리에 맞추어 침묵하며 걷고 하얀 줄을 잡고 걷고 눈을 감고 걷습니다.”라 했습니다. 그리고 삼보일념에 임하는 자세에 대하여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눈을 감는 뜻은 세상이 어두워 사방을 둘러보아도 바른 말해 줄 스승이 없고 길을 안내해줄 스승이 없다는 한탄의 표현이고, 49재에 사용하는 하얀줄(소청)을 잡는 것은 종단이 죽음의 길을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경쇠는 세상과 불자들을 깨우치는 소리이고 침묵은 나자신을 돌아보자는 의미입니다.”

 

 

삼보일념 할 때 눈을 감으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눈먼 봉사처럼 눈을 감고 줄에 의지하여 걷는 것입니다. 줄은 광목으로 만든 백색줄입니다. 안내문에 따르면 사십구재를 지낼 때 사용되는 ‘소청줄’이라 합니다. 흰소청줄을 잡고 길게 늘어서 눈을 감은 체 세 발자국 떼며 한번 멈추어선 다음 일념하는 식입니다.

 

 

 

 

 

 

싱잉볼(Singing Bowl) 소리에 맞추어

 

삼보일념은 광화문광장 케이티사옥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이동한후 광화문을 바라보고 오른쪽 큰 도로를 따라 동십자각, 미국대사관, 조계사로 이어지는 북쪽 길입니다. 도중에 정원스님이 분신한 장소에 멈추어 잠시 묵념을 가졌습니다.

 

 

 

 

 

 

본격적으로 백색광목천을 붙잡고 삼보일념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원이 약 60명 가량 되다보니 간격이 1미터만 유지해도 60미터라는 긴 줄이 형성됩니다. 삼보일념은 싱잉볼(Singing Bowl) 소리에 맞추어 일념을 하고 삼보 하는 식입니다.

 

 

 

 

 

줄이 길어서 엇박자가 나기도 합니다. 선두와 후미의 걸음걸이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도중에 목소리 큰 사람이 “하나”, “둘”, “셋” 하며 세 걸음 구호를 외치기도 했지만 줄이 너무 길어서 발걸음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흰광목천에 의지하여 눈을 감고 세 번 걷고 멈추어 일념하는 식으로 길을 걸어 갔습니다.

 

한국불교의 현실과 종단의 적폐

 

삼보일념은 세 번 걷고 멈추어서서 일념하는 것입니다. 일념은 그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 , , 삼보에 대한 일념일 수도 있고 자신의 소원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날 삼보일념에서는 한국불교의 현실과 종단의 적폐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피켓을 두 개 준비 했습니다. 하나는 불교가 사회의 희망이 되어 주세요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는 도살장에 끌려온 한 마리 짐승이었다라는 것입니다. 전자는 청무원장 직선제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적광스님 납치, 감금, 폭행에 대한 것입니다.

 

 

 

 

 

 

 

 

싱잉볼에 타종에 맞추어 삼보일념하는 광경은 매우 경건해 보였습니다. 이제까지 확성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방식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가장 큰 장점으로 주변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은 것입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이동하는 것이 숭고한 종교행사처럼 보여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지나가던 외국인들이 신기한듯이 멈추어서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꾸짖으려거든

 

어느 사회이든지 변화와 개혁을 이끌어 내려 하는 사람들은 깨끗해야 합니다. 대체로 진보적 인사들은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일까 대체적으로 보수적 사람들은 부패의 이미지입니다그래서인지 진보적 인사가 스캔들을 일으켰을 때는 사회적으로 파장이 매우 큽니다. 같은 허물이라도 청정한 삶을 추구하는 자의 허물이 더 커보이는 것입니다

 

개혁을 말하는 자들 역시 기득권 세력 보다는 당연히 도덕적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과 다름 없는 전력을 가진 자가 개혁을 논한다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식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꾸짖으려면 자신이 먼저 청정해야 할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꾸씨나라의 경(A10.44)’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꾸짖는 수행승이 다른 사람을 꾸짖으려 하면 이와 같이 ‘나는 청정한 신체적 행위를 하고 하는가? 맑고 흠없고 허물없는 신체적 행위를 갖추었는가? 나는 이러한 원리를 갖추고 있는가 아닌가?’라고 성찰해야 한다.(A10.44)

 

 

부처님은 다른 사람을 꾸짖는 자의 조건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 다섯 가지입니다. 그것은 1)신체적 행위가 청정한 자, 2)언어적 행위가 청정한 자, 3)폭력을 여읜 자애의 마음을 가진 자, 4)가르침에 실천하는 자, 5)계율을 잘 지키는 자 이렇게 다섯 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지 않은 자는 남을 꾸짖을 자격이 없음을 말합니다.

 

남을 꾸짖을 자격이 있는 자가 꾸짖어야합니다. 꾸짖을 때는 자애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경에 따르면 꾸짖는 방법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1)올바른 때에 말하지 때가 아닌 때에는 말하지 않는 것이고, 2)진실하게 말하지 허위로 말하지 않는 것이고, 3)온화하게 말하지 거칠게 말하지 않는 것이고, 4)의미를 갖추어 말하지 무의미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고, 5)자애를 말하지 안으로 성내어 말하지 않는 것이다.(A10.44)라 했습니다. 꾸짖을 때는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화를 내지 말고 부드러운 말로 하라고 했습니다. 무엇 보다 진실되게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성 있게 말한다면 누구나 감동할 것입니다.

 

눈먼 자들이 길을 인도하면

 

삼보일념은 바른 말 해 줄 수 있는 스승이 없는 현실을 지적 하고자 한 것입니다. 마치 눈을 감고 줄을 잡고 가는 것이 장님들 같습니다. 그러나 리더의 지시에 잘 따른 다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눈을 뜨고 살아도 눈 뜬 장님처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한국불교는 눈이 있어 보지만 눈을 감고 사는 것 같고, 귀가 있어서 듣지만 귀를 막고 사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입이 있어 말을 하지만 현실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이렇게 눈 감고, 귀 막고, 입 막고 살면 어떻게 될까요? 맞지마니까야 ‘짱끼의 경(M95)’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라드와자여, 마치 봉사들이 줄을 섰는데, 앞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바라드와자여, 모든 성직자들이 설한 것은 봉사들이 줄을 선 것과 같이 앞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나는 생각합니다.(M95)

 

 

부처님 당시 외도 중에는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M95)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주장은 확인 되지도 않고 증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은 연기법의 발생과 소멸의 원리로 외도의 모든 견해를 논파했습니다. 연기법으로 외도의 견해가 “공허한 것이고, 거짓된 것이고, 허망한 것”(M95)라는 것을 밝혀 낸 것입니다. 그런 외도의 견해는 마치 눈먼 봉사가 길을 이끄는 것과 같습니다.

 

선천적으로 눈이 먼 장님이 있습니다. 한번도 세상을 보지 못한 장님의 뒤를 따라 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역시 눈먼 장님입니다. 장님이 장님들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앞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M95)라 했습니다. 한국불교현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정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불교를 보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과는 반대로 가는 불교 같습니다부처님이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 하여 율장에서 금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는 곳이 한국불교입니다.

 

한국불교에는 장로스님들이 없습니다. 원로스님들의 모임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불교가 잘못된 길로 나아 가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어른이 없는 집안 같습니다한국불교에는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만 보입니다.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밥이 되는 약육강식의 짐승세계입니다또한 한국불교는 눈먼 자들의 세상과 같습니다.

  

눈 밝은 이가 길을 인도한다면

 

눈먼 자가 길을 인도했을 때 길이건 길이 아니건, 불쑥 솟아 올랐건 움푹꺼졌건, 평평하건 평평하지 않건 닥치는 대로 걸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바른 길로 어떤 때는 길이 아닌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정법도 없고, 계율도 없고, 어른도 없는 한국불교는 눈먼 자들이 인도하는 듯합니다신도들은 눈먼 자들의 뒤를 따르는 눈먼 신도들 같습니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 2008)’를 보면 눈 먼 자들이 인간 띠를 형성하여 걷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리드하는 사람도 눈이 멀었고 따라 가는 사람들도 눈이 멀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길을 알 수 없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럴 때 눈 밝은 이가 있어서 길을 인도한다면 목적지까지 무사하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2017-07-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