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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국민스님이라 하나? 명진스님 단지불회 7월 법문

담마다사 이병욱 2017. 7. 9. 20:20

 

왜 국민스님이라 하나? 명진스님 단지불회 7월 법문

 

 

월요일인가 싶으면 금요일입니다. 바삐 살아 가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은 화살 보다 더 빠르게 광속으로 흘러 가는 것 같습니다. 주오일제가 정착되어 감에 따라 대부분 행사는 토요일에 열립니다. 결혼식, 등산 등 각종모임이 토요일로 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례도 토요일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일까 일요일은 푹 쉬는 날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활동이나 가족 모임 등 자신과 가족을 위한 날로 되어 있는 듯 합니다.

 

일요일은 마음 놓고 쉬는 날입니다. 주오일제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나 장사 등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나 일요일 하루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날입니다. 무엇 보다 종교활동하는 사람들을 위한 날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일요일 오전 도시에서는 교회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휴일임에도 정장을 하고 마치 결혼식에라도 참석하는 것처럼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교회로 향하는 장면입니다. 반면 등산복 차림을 한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일요일 오전은 교회가는 사람들과 산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양분된 듯 합니다.

 

모든 행사가 토요일에 집중 되어 있는 것은 교회 가는 사람들을 배려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반면 불자들은 절에 잘 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절이 산 중에 있어서 먼 것이 큰 요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동네에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라 여겨집니다. 일요일 오전이면 교회 가는 사람들 때문에 대부분 모임이 토요일에 집중 되어 있다고도 생각해 봅니다.

  

불자들이 절에 가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기도하러 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법문들으로 가는 것입니다. 대부분 전자입니다. 대부분 절에서 기도는 열심히 하지만 법문을 하지 않습니다. 극소수 절에서 법문을 하고 있습니다. 법의 종교인 불교에서 법문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기도의 종교라 볼 수 있는 기독교의 경우 목사의 설교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대의 아픔을 함께 했기에

 

2017 7 9일 명진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단지불회에서 3년 만에 재개한 법문입니다. 이번 7월 법문은 두 번째 입니다. 양재동 시민의 숲에 있는 윤봉길기념관에서 10시에 열렸습니다.

 

명진스님 법문은 개인적으로 이번이 두 번째 입니다. 지난 4 22일 수원에서 열린 길거리 법회에서 처음 들었는데 이에 대하여 경청할 아는 리더십, 명진스님의 길거리 열린법회(2017-04-2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명진스님법회는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 했습니다. 특정지역의 모임이 아니라 전국적 모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지역구가 아니라 전국구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의 참여가 두드러집니다. 이는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 모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용산참사희생자가족, 세월호참사희생자 가족 등 이 땅에서 불행하고 소외받고 억울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 까지 그들과 오랜 세월 함께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명진스님은 시민사회단체의 인사들과 가깝습니다. 특히 조계종으로부터 제적 당하고 난 후에 백기완 선생등 시민사회단체 인사들 대부분이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민사회단체에서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시대의 아픔을 함께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거철에는 수행을 하고 해제철에는 고통받는 사람들과 오랜 세월 함께 한 것입니다.

 

전국구 국민스님

 

출가수행자의 본분사는 수행과 포교입니다. 안거철에 수행하고 해제철에는 포교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 삶일 것입니다. 그런데 명진스님은 해제철에는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했다는 사실입니다. 불교를 넘어서 불교 밖으로 영역을 확장한 것입니다. 불교라는 울타리 내에서만 머물렀다면 오늘날과 같은 전국민의 스님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즘 명진스님을 국민스님이라 합니다. 조계종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조계종 스님이 아닌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양재시민의 숲 윤봉길기념관 3층에는 국민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하여 이백여명의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앉을 자리가 부족해서 보조의자가 놓여졌습니다.

 

 

 

 

 

 

 

 

 

 

 

 

 

 

 

 

 

 

 

 

법회는 여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삼귀의를 시작으로 해서 끝날 때는 사홍서원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두 시간 동안 진행된 법문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빨리 지나갔습니다. 법문 도중에 두 명이 단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한분은 박민수목사이고 또 한분은 허정스님입니다.

 

행복공동체의 비법이 무엇인지

 

목사가 법회에서 법문한 것을 처음 봅니다. 이는 박목사가 명진스님을 따르기 때문이라 합니다. 현재 은혜공동체를 이끌고 있는데 60여명의 회원들의 얼굴이 매우 맑고 깨끗하다고 합니다. 모두 행복해 보이는데 그 비법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요청해서 법상에 서게 된 것입니다.

 

박민수목사에 따르면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기 때문에 공동체회원들이 행복한 것 같다고 합니다. 예수의 삶을 알게 되면 예수를 흠모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산상수훈의 교훈이라 합니다.

 

박목사에 따르면 예수는 절대 기도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경끼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 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더러운 것이고 이방인이나 하는 것이라 합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여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저열하게 본 것입니다. 먹을 것은 널려 있음에도 더 소유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지구에 대한 모독이라 합니다.

 

박목사는 태양과 식물이 있으면 먹거리는 널려 있기 때문에 축적하는 삶은 어리석다고 합니다. 태양이 떠 있는 한 생명체에게는 에덴 동산이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공동체에서는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게 산다고 합니다. 밥만 먹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먹을 걱정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투자하기 때문에 은혜공동체 사람들이 행복하게 보일 것이라 말합니다.

 

박민수목사의 말을 들어 보면 이제까지 들어 보지 못하던 것입니다. 전혀 기독교 답지 않은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불교적 삶과 유사한 점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박목사는 은혜공동체나 불교나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왜 음식절제해야 하는가?

 

바이블 산상수훈에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 31)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고 사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초기경전에서 무수하게 나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확실한 길의 경(A3.16)’에 따르면 수행승에게 세 가지 원리를 따르면 번뇌를 부수기 위한 효과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수행승이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이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이고, 깨어 있음에 철저한 것입니다. 이 중에서 두 번째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식사할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이것을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괴로움을 제거하고 새로운 괴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깊이 성찰하여 음식을 섭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식사할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A3.16)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세 가지 기본적인 조건 중에서 음식절제가 들어가 있습니다. 음식을 아무 생각 없이 먹으면 탐욕으로 먹게 됩니다. 욕망을 끊지 못하는 한 욕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매일 먹는 음식에서 절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욕망의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무소유와 청정한 삶을 이루기 위하여 탁발을 했습니다.

 

음식을 약으로 알아?

 

탁발하는 자는 주는 대로 먹습니다. 탁발하지 못하면 굶기도 합니다. 오후 불식이기 때문에 오전에 한끼만 먹어야 합니다. 음식을 즐기며 먹을 수 없습니다. 테리가타에 따르면 싸리뿟따는 , 다섯 모금 식사하고, 그리고 물을 마시면, 자신에 전념하는 수행승이 평안한 삶을 살기에 족하다.”(Thag.983)이라 했습니다. 음식을 즐기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온갖 산해진미로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네 덩이를 금방 먹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은 음식 아닌 것으로 살 수 없지만,

음식이 마음에게 평온을 주는 것도 아니다.

음식으로 이 집적의 몸이 유지되니,

이와 같은 것을 보고 탁발하는 것이다.”(Thag.123)

 

 

부처님은 음식절제를 말씀 하시면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는 대승공양게에서 볼 수 있는 음식을 약으로 알아라는 말과 대조적입니다.

 

음식을 약으로 알았을 때는 고기도 먹을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을 것입니다. 율장에 따르면 아팠을 때 약으로 고기나 화주가 사용된 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행승이 무소유와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음식에 대한 집착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S35.239) 음식을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 몸이 유지될 정도만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음식절제하는 이유는 다시는 윤회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안다.” (A3.16)라 한 것입니다.

 

수행과 관련된 이야기

 

두 시간 동안 진행된 단지불회 법문은 명진스님과 두 분의 초청인사의 법문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그런 스님은 독설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시국과 관련된 된 것입니다. 그 중에는 조계종과 관련된 것도 있습니다. 이런 독설 때문인지 조계종 총무원에 밉보여서 승적을 박탈 당했습니다. 이에 시민사회단체 원로 수 십명이 명진스님 구명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법회에서는 시국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대신 수행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명진스님은 화두수행방법을 하나 알려 주었습니다. 잠을 잘 때 하면 효과적이라 합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심을 가지며 잠자리에 들라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생업에 바쁜 자가 잠을 잘 때 만큼은 화두수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허공 끝은 어디인가?” 등 알 수 없는 의문으로 잠이 들어 잠이 깼을 때 역시 그 의문이 그대로 있다면 매우 개운하게 잔 것이라 합니다. 화두들고 자고 화두 들고 깨는 것입니다.

 

아는가, 단지 알지 못함을

 

스님은 모른다는 말이 진리의 문에 들어서는 것이라 합니다. 단지불회(但知不會)라는 말도 모른다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단지불회는 아는가, 단지 알지 못함을이라 합니다. 아는 것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모른다가 정답이라 합니다. 이름도 얼굴도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니라 합니다. 마음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나의 마음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누군가 왜 삽니까?”라고 물었을 때 어떤 이는 죽지 못해서 삽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답이 없다고 합니다. 이럴 때 모릅니다라 합니다. 이렇게 알 수 없는 의심이 의단이 되도록 촛첨을 맞추라고 합니다. 오직 모른다가 진리의 문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고 일체의 앎이 끊어진 자리가 진여자성이라 합니다.

 

누가 잠을 잘 자는가?  

 

명진스님은 잠을 잘 때 알 수 없는 의문을 가지고 잠을 자라고 했습니다. 알 수 없는 의문이 의단이 되어 잠을 청했을 때 잠을 자고 난 다음에도 의단이 그대로 있다면 잠을 잘 잔 것이라 합니다초기불교에서도 잠을 잘 자는 방법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잠을 잘 자는 자는 깨달은 자라 했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된 자는 잠을 잘 이룰 것이라 했습니다. 반면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자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부자나 권력자는 자신의 부와 권력이 빼앗길까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잠을 잘 자는 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 성자는 언제나 참으로 편히 잠자네. 감각적 쾌락에 더럽혀지지 않은 님은 청량해서 번뇌가 없다네.” (S10.8,A3.35) 라 했습니다.

 

잠을 잘 자는 깨달은 자입니다. 누군가 달라이 라마에게 당신은 깨달았습니까?”라며 당돌하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에 달라이라마는 나는 잠을 잘 자는 사람입니다.”라고 답했다 합니다.

 

부처님도 잠을 잔 다고 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왕자가“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잘 주무셨습니까?(A3.35)라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왕자여, 나는 잘 잤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A3.35) 라 했습니다. 깨달은 자는 잠을 잘 잡니다. , , 치가 소멸된 자입니다.

 

등을 바닥에 대고 자는 자는

 

부처님은 잠을 잘 때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잠을 잔다고 했습니다. 등을 바닥에 대고 자는 것이 아닙니다. 등을 바닥에 대고 자는 것에 대해서는 죽은 자의 자세라 합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휴식의 경(A4.244)’에서 알 수 있습니다. 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대부분 죽은 자는 등을 바닥에 대고 휴식을 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죽은 자의 휴식이란 이와 같다.”(A4.244)라 합니다. 죽은 자가 등을 땅에 대고 있음을 말합니다. 초불연 번역에서는 아귀의 자세라 했습니다. 이는 빠알리어 뻬따(peta)를 번역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주석의 견해를 인용하여 뻬따(peta)는 아귀가 아니라 사자(死者)를 의미한다.”(Mrp.III.218)라 했습니다.

 

죽은 자가 등을 대고 누워 있습니다. 산 자가 등을 대고 누워 있다면 죽은 자와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테라가타에서는 “배부르게 먹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등을 대고 눕고 깨어서는 이야기를 즐기니 스승께서 꾸짖은 것들이다.(Thag.935)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죽은 자처럼 절대 바닥에 등을 대고 눕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이란?

 

번뇌가 소멸된 자는 잠을 잘 잡니다. 반대로 번뇌가 많은 자는 잠 못 이룹니다. 화두를 들어 의단인 상태에서 잠에 들었을 때 언제 잤는지 언제 깼는지 모를 것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늘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어쩌면 화두 든 상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점은 늘 사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알 수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이라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초야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중야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밤의 후야에는 일어나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은 이러한 것이다.(A3.16)

 

 

부처님은 누울 때 사자형상을 했습니다. 이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A3.16)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몸이 피곤하거나 아플 때 잠을 잘 때와 마찬가지로 자리에 누웠습니다. 이 때 주목하는 말은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sato sampajāno uṭṭhānasañña manasikaritvā)입니다. 부처님은 잠을 자면서도 사띠 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사띠 하면서 자고 사띠하면서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사띠 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잠을 자고 잠에서 깨었을 때 깊은 잠을 잤을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또한 꿈도 없었을 것입니다. 초기경전에 꿈 이야기가 거의 없는 이유라 봅니다. 언제 어디서나 사띠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이 깨어 있음에 철저한 삶이라 합니다.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부처님은 잘 때나 깰 때는 늘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sato sampajāno)라 했습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잠 잘 때도 알아 차리고 깰 때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며 알 수 없는 의문으로 잠을 청하고 알 수 없는 의문으로 잠을 깨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방법상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명진스님은 이런 방법을 잠잘 때 시도해 보라고 합니다. 이런 말은 어느 선사도 말 해 준적이 없을 것이라 합니다. 단지불회 참석자들에게 특별히 알려 주는 것이라 합니다. 이렇게 알 수 없는 의문이 의단이 되어 오직 모르는 상태가 되었을 때, 막막함에 몰입하면 생활이 달라질 것이라 합니다. 이처럼 나는 무얼까?”라는 알 수 없는 의문은 서양 철학자 디오게네스나 아리스토텔레스도 하던 것이라 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또 고금을 막론하고 해 오던 것이라 합니다.

 

왜 국민스님이라 하나?

 

두 시간에 걸쳐서 명진스님의 법문이 끝났습니다. 도중에 박민수목사의 은혜공동체는 왜 행복한가?’라는 주제로 이야가 있었습니다. 또 허정스님은 일인시위와 관련하여 말사 주지나 강사 등 종단으로부터 이득이 있고 직책을 누리면 나서기 힘들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가진 것이 없고 직책이 없을 때 일인시위가 가능함을 말합니다. 특히 적광스님 끌려 갈 때 이건 아닙니다라 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왜 우리는 이건 아닙니다.’라고 말하지 못할까요?”라 했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말한 것입니다.

 

단지불회에서는 매월 둘 째 주 일요일에 법회를 하고 있습니다. 8월 법회는 8월 12일에 있습니다. 법당이 없어서 양재동 시민의 숲 윤봉길기념관에서 매월 열릴 것이라 합니다. 3년 만에 재개된 단지불회 7월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명진스님이 제적당하고  두 번째 시행된 법회에 이백명 가량 되는 불자들과 시민들이 참석했습니다. 불자들이 대부분이지만 타종교인들도 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삶을 함께 한 세월이 오늘날 명진스님을 국민스님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2017-07-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