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여 사라지기 위해 애써야
백세쇼크
‘백세쇼크’ 이 말은 최근 EBS다큐에서 본 노인관련 프로의 제목입니다. 오래 오래 백세까지 사는 것이 축복일텐데 제목에 ‘쇼크’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임을 말 합니다. 그래서일까 백세까지 오래 사는 노인들의 병들도 추하고 비참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큐프로를 보면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건강하고 별탈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동차를 오래 타면 부품이 하나 둘 망가지듯이, 몸의 기능이 하나 둘 무너져 내려 갔을 때 거동조차 못하게 됩니다. 누군가에 신세 져야만 생명을 유지해 갈 수 있어서 산송장, 조금 심하게 말한다면 좀비와 같은 삶입니다.
사는 것이 무슨 벼슬이나 되는 것처럼
나이 들어 오래 오래 사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세월은 우리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다시는 이런 생을 반복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원담스님의 수행일기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2017년7월22일(토)中伏 흐림
소슬 비 오다가 그치니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는 숲에서 내뿜는 나무들의 입김이다. 기압이 낮아진 것인지 하루 종일 착 가라앉은 분위기다. 바다 밑으로 떨어진 돌처럼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자. 움직여 봤자 땀만 난다.
난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수행이라고? 죽지 않았으니 살아있는 거라고? 속편한 소리 집어치우자. 최소한 숨은 쉬고 있지 않느냐?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반응을 하지 않느냐? 그러니 살아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거다. 죽은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거지. 그런데 뭐 하러 살아있지? 바로 팍 꼬꾸라져 죽어도 되는데 죽지 않는 것이 희한하다.
더 이상 숨 쉬기를 멈추고 영원히 쉬어도 되는데 해야 할 일이 남은 사람처럼 다시 숨을 쉰다. 무슨 죽지 못할 필연성이라도 있나? 지금 죽으면 안 되는 무슨 피치 못할 사연이라도 있나? 꼭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냐? 네가 살아있어도 괜찮다고 너 자신을 완전히 설득할 수 있는가?
살아갈 이유를 자신에게 충분히 설득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은 생명을 구걸하여 연명하는 짓이다. 그건 비열하고 구차하며 가치가 없고 인류의 공동재산을 낭비할 뿐이다. 왜 살아있지? 뭐 하러 살아있지? 지금 죽으면 억울하냐? 언제까지 살래? 그래서 지금 뭐 하고 있니? 날카롭게 벼른 칼끝으로 자신을 찔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간다는 이유로 정신이 무디어지기 때문이다.
보통사람은 ‘살아간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드리고 합리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살아간다.’는 게 무슨 대단한 벼슬한 것처럼 귀하게 여겨 보호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듯이 여긴다. ‘살아간다.’는 어떤 의미도 내포되지 않은 그냥 맹목적인 생존욕구일 뿐이다. 그것은 동물적 본능이요, 무지이며, 고집이고, 고집불통이다. 그것은 자기중심성이며 我執아집덩어리이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죽는 것보다 못하다.
나는 사라짐을 원하지 ‘죽치고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날이 사라져간다면 좋으리. 그림자가 점점 사라져 빛 속으로 사라지듯 완전한 사라짐은 지극한 즐거움이라.
(원담스님, 수행일기 2017년 하안거-8, 2017-07-27)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의미도 모르면서 그냥 살아 있으니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서 매일 밥을 먹고 다음 날 눈 떠 있으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또 살아 갑니다. 그러다 보면 나이 먹게 되고 주름은 늘어 나고 기능은 망가지고 나중에는 걷지도 못하고 누워서 숨만 쉬고 있는 상태로 됩니다. EBS 다큐 ‘백세쇼크’에서 본 것처럼.
원담스님은 ‘사라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무슨 벼슬이나 되는 것처럼 살아 있는 것 자체를 감사히 여기는 것 보다, 이런 일이 반복될 것을 안다면 사라지는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합니다. 그것도 조금씩 하루하루 사라지는 것입니다. 마치 무대 조명이 서서히 페이드아웃(fade out) 되듯이, 나중에는 완전히 사라져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 싫어하여 사라져야 하는가?
초기경전을 보면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가 도처에 나옵니다.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구함의 경(M26)’에 따르면 부처님은 알랄라 깔라마에게 떠나며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머무는 한, 그의 가르침은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 (nāyaṃ dhammo nibbidāya na virāgāya na nirodhāya na upasamāya na abhiññāya na sambodhāya na nibbānāya saṃvattati, yāvadeva ākiñcaññāyatanūpapattiyā)”(M26) 라는 말을 했습니다.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은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을 실현하려면 가장 먼저 ‘싫어해야(nibbidā)’ 합니다. 오온에 대하여 싫어하지 않으면 올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실현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장 첫 출발은 ‘모든 형성된 것들(sabbasaṅkhāra)’에 대하여 싫어하는 것입니다.
초불연에서는 ‘nibbidā’에 대하여 ‘염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이 법은 염오로 인도하지 못하고,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무소유처에 다시 태어나게 할 뿐이다.”(M26) 라고 번역했습니다.
두 번역에서 가장 차이 나는 것은 ‘virāgā’입니다. 전재성님은 이를 ‘사라짐’으로 번역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탐욕의 빛바램’이라 번역했습니다. 사라짐과 탐욕의 빛바램, 이 두 번역은 같은 빠알리를 두고 전혀 다른 번역어처럼 보입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과 열반의 실현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씩 소멸해 가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탐욕과 성냄과 같은 오염원입니다. 마침내 모든 오염원이 소멸 되었을 때 사라져 갈 것입니다. 오온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서 다시는 이 세상에서 오지 않습니다. 마치 연극배우가 극이 끝났을 때 조명이 서서히 페이드아웃되면서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빅쿠보디도 ‘virāgā’에 대하여 ‘fade out’으로 번역했습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nibbidā virāgā’가라는 정형구가 무수하게 나옵니다. 이어지는 말은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말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에서 각 경마다 마치 후렴구처럼 붙어 있는 정형구가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라는 말입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의 삶을 살면서 매생마다 반복되는 괴로움을 이제 끝내자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 단계가 모든 형성된 것들, 그 중에서도 특히 오온에 대하여 ‘싫어 하는 것(nibbidā)’ 이고, 그 다음은 그 대상으로부터 ‘사라지는 것 (virago)’입니다. 이를 한자어로 ‘염오’와 ‘이욕’이라 합니다. 초불연에서는 ‘염오’와 ‘탐욕의 빛바램’이라 했습니다.
인생고를 겪은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세상은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오래오래 살아 병고에 시달린 자의 입장에서 본 다면 이 세상은 싫은 것이고 하루 빨리 사라지고 싶은 곳입니다.
싫어하여 사라지기 위해 애써야
사람들은 오늘도 눈뜨면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어느 나이 든 거사님은 아침에 눈을 뜨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하루일과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만일 눈뜨지 못했다면 죽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밥을 먹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밥을 먹습니다. 밥은 생명이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가 백세가 가까운 노인이라도 걷지도 못하는 병자라도 밥은 먹어야 합니다. 밥마저 먹지 못하게 됐을 때 흔히 ‘밥숟가락 놓았다’라 하는데 더 이상 살지 못함을 말합니다.
EBS다큐에서 본 ‘백세쇼크’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내게 닥칠 일입니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서 일어났던 일이 나에게 현실로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늙어서 병들어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밥숟가락 하나 만은 놓지 않는 비참한 삶이 모두에게 예고 되어 있습니다. 살려고 발버둥 치기 보다는 싫어하여 사라지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싫어하여 떠남(nibbidā virago)’에 대해 말씀 했습니다. 특히 윤회의 고통에 대하여 말씀했습니다. 부처님은 윤회하면서 흘린 피가 사대양과 비할 바가 아니고,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이 역시 사대양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Yāvañcidaṃ bhikkhave, alameva sabbasaṅkhāresu nibbindituṃ, alaṃ virajjituṃ, alaṃ vimuccitunti.)”(S15.1) 라 했습니다.
“나는 사라짐을 원하지
‘죽치고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날이 사라져간다면 좋으리.
그림자가 점점 사라져 빛 속으로 사라지듯
완전한 사라짐은 지극한 즐거움이라.”
2017-07-2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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