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자만에 대하여
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냉혈한입니다. 정이라고는 눈꼽만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마치 마른 저수지를 보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부처님은 마른 장작처럼 물기 하나 없는 차가운 감성을 가지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지혜와 함께 늘 자비를 강조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동시에 자비로운 자입니다. 지혜와 자비가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곳에 자비가 있고, 자비 있는 곳에 지혜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탐, 진, 치가 소멸된 자입니다. 탐욕이 소멸된 자리에 관용이 들어가 있고, 분노가 소멸된 자리에 자애가 차지하고 있고, 어리석음이 소멸된 자리이 지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범부들은 탐, 진, 치로 살아 가지만 부처님 제자들은 관용과 자애와 지혜로 살아갑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자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애와 연민이라는 것이 수행적 측면이기는 하지만 세상에 대한 자애와 연민으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하고 여법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라든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교조적으로 받아 들여 법과 율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불교판 탈레반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스토커가 되는가?
불교적폐청산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가 일부 사람들에게는 좋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고 합니다. 이는 철저하게 자신의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본다면 상대방의 행위는 “틀렸다”가 됩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르다”가 됩니다. ‘틀렸다’와 ‘다르다’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교 교리를 들이대며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더구나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표출하는 것은 ‘스토커’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 ‘광팬’이 있고 ‘스토커’가 있습니다. 주로 연예인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인기연예인들에게는 팬클럽이 한 두 개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광팬이 스토커가 되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 보다 쉽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관심 보여 주지 않으면 스토커로 변신합니다.
입에 도끼가
불교계에도 스토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주지 않으면 입에 칼을 물듯이 글로서 난도질합니다. 더구나 불교에 대하여 많이 안다는 사람이, 교리에 대하여 밝다고 말하는 사람이 휘두른 필봉은 도끼나 다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이 태어날 때 참으로 입에 도끼가 생겨난다. 어리석은 이는 나쁜 말을 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찍는다네.”(S6.10)라 했습니다.
스토커의 특징은 집착입니다. 광팬 역시 과도한 집착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좋아 할 때는 ‘죽어라 좋아’라 하고, 한번 싫으면 ‘죽어라 싫어’합니다. 이처럼 죽도록 좋아 하면 광팬이 되고, 죽도록 싫어 하면 스토커가 됩니다.
광팬과 스토커는 극과 극입니다. 그러나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집착입니다. 거기에는 지독한 아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상은 자만이고 교만이고 아만입니다. 스토커에게는 지독한 우월적 또는 열등적 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데?”
존재를 윤회케 하는 열 가지 족쇄에 마나(mana)가 있습니다. 마나에 대하여 아만, 자만, 교만, 교만이라 번역합니다. 공통적으로 한자어 ‘만(慢)’자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마나는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나함 단계에 이르면 욕망과 분노 등 거친 번뇌는 모두 소멸됩니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미세한 번뇌가 있습니다. 이를 오상분결이라 하는데 그 중에 마나가 있습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마나는 매우 미세한 번뇌라 합니다. 마나는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누구인데?”라 볼 수 있습니다. 마나는 지위가 높은 자들에게서 잘 드러납니다. 많이 배운자들, 부자들도 해당됩니다. 이에 대하여 태생의 자만, 배운자의 자만, 부자의 자만이라 합니다.
태생의 자만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들 입니다.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바라문이 되었습니다. 바라문은 바라문이 되기 위한 특별 수업을 받습니다. 자동적으로 “내가 바라문인데”라는 태생적 자만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부자의 자만이 있습니다. 부자들은 그들만의 모임을 갖습니다. 심지어 그들만의 지역에 살며 자녀도 그들만의 학교에 보냅니다.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경멸하기 까지 합니다. 그래서 은연중에 “내가 이만한 자산가인데”라는 자만의 마음이 내면 깊숙히 깔려 있습니다.
배운 자의 자만이 있습니다. 많이 배운 자는 배우지 못한 사람을 무시합니다. 학위를 가진 자는 은연 중에 “내가 명세기 박사인데”라며 배운자의 자만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수행자의 자만
자만에는 태생적 자만, 부자의 자만, 배운 자의 자만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수행자의 자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수행자인데”라는 미세한 자만일지 모릅니다. 더구나 도와 과를 성취한 복전의 위치에 있다면 존경과 찬사를 받을 것입니다. 이럴 때 자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수행자에게도 자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만은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대개 “내가 누구인데”라는 자만이기 쉽습니다. 그런데 오상분결에서는 마나와 함께 웃닷짜(uddhacca)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웃닷짜는 대개 ‘들뜸’ 또는 ‘흥분’으로 번역됩니다.
여기 신도로부터 존경 받고 예배 받는 수행자가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내가 누구인데”라는 우월의식과 함께 자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들뜸 또는 흥분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나와 웃닷짜는 항상 함께 하는 것 같처럼 보입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마나와 웃닷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과위가 높은 성자에게서 은연중에 “내가 누구인데”라는 우월적 자만이기 쉽습니다. 우월적 자만과 함께 쓰이는 웃닷짜에 대하여 ‘자기정당화’라 번역하기도 합니다. “내가 누구인데”라는 우월적 자만과 함께 이를 정당화하는 들뜸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홉 가지 자만이 있는데
누구나 마나와 웃닷짜가 있습니다. 자만과 자기정당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나에는 우월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디가니까야 ‘합송의 경’에 따르면 “세 가지 교만 곧, 내가 우월하다는 교만, 내가 동등하다는 교만, 내가 열등하다는 교만이 있습니다. (Tisso vidhā: seyyo'hamasmī'ti vidhā. Sadiso'hamasmī'ti vidhā, hīno'hamasmī'ti vīdhā.)”(D33) 라 했습니다. 자만에도 우월, 동등, 열등이라는 세 가지 자만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만은 기본적으로 자아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자아개념이 없음을 말합니다. 자아관념이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다면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으로 표출됩니다. 이와 같은 자만에 대하여 부처님은 상윳따니까야 ‘쏘나의 경’에서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쏘나여,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이든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물질을 두고 나는 우월하다고 여기고 나는 동등하다고 여기고 나는 열등하다고 여긴다면 누구든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자밖에 될 수 없지 않은가?”(S22.49)
부처님은 오온 중에서 물질에 대하여, 즉 자신의 몸에 대하여 세 가지 자만에 대해 말씀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 대하여 ‘나는 우월하다’ ‘나는 동등하다’ ‘나는 열등하다’ 라는 자만이 있음을 말합니다.
주석에 따르면 자만은 모두 아홉 가지로 분류됩니다. 이를 아홉 가지 자만 또는구만(九慢)이라 합니다. 구만은 우월, 동등, 열등에 대하여 또 다시 우월, 동등, 열등이 가미 된 것입니다. 우월을 예로 든다면 우월중우월, 우월중동등, 우월중열등이 됩니다.
아라한 단계에서 부수어지는 자만은 세 가지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나는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 ‘나는 동등한한 자 가운데 나는 동등하다’ ‘나는 열등한 자 가운데 나는 열등하다’라는 세 가지 자만입니다. 나머지 6가지는 수다원 단계에서 부수어집니다.
최악의 자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만은 늘 자기정당화를 하는 것 같습니다. 자만은 우월적 자만도 있지만 열등적 자만도 있습니다. 우월적 자만은 대개 “내가 누구인데?”라 나타납니다. 반면 열등적 자만은 “내가 왜?”라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열등한 자 가운데서도 열등한 자의 자만이 있습니다. 열등도 자만에 속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열등한 자 중에서 ‘나는 열등하다’라고 하는 자의 자만에 대한 예문을 보면 “나는 태생에 의해서 노예상태이다. 그러나 나에게 부모의 노예의 지위는 없다. 내가 왜 노예라고 불리는가?”라 설명됩니다.
아홉 가지 자만 중에 최상위에 있는 것이 ‘우월한 자 가운데 나는 우월하다’입니다. 이런 자만을 가진 자는 주석에 따르면 왕들이나 출가자들에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왕의 경우 “왕은 왕국이나 재산의 담지자로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교만을 만든다”고 합니다. 출가자의 경우 “계행-두타행 등을 통해서 ‘누가 나 같은 자 있으랴?’라고 교만을 만든다.”라 합니다. 재가자의 경우라면 “내가 오계를 지키고 팔계를 지키고 포살일을 준수하는데 나 같은 자 있으랴?”라는 자만일 것입니다.
우월적 자만이든 열등적 자만이든 모두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라한이 되어야 없어진다는 자아와 자기정당화는 미세한 자아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오온에 대하여 ‘나는 우월하다’등 자만이 개입 되어 있을 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만은 “물질은 영원한가?”로 시작되는 무아의 가르침으로 제거됩니다.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자만이 타파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광팬과 스토커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모두 자아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기분에 따라 광팬이 되기도 하고 스토커가 되기도 합니다. 자아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 자만과 자기정당화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내가 누군데?”라는 우월의식과 “내가 왜?”라는 열등의식이 공존합니다. 아쉽게도 많이 배운 자, 많이 학습한 자에게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 다는 것입니다.
여기 불교공부를 많이 한자가 있습니다. 그는 원리원칙대로 살아 갑니다. 철저하게 오계와 팔계를 지니며 살아갑니다. 포살일을 지지며 계행대로 살아 갑니다. 그런데 이를 자랑스럽게 여겨서 포살일과 팔계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나 같은 사람 있으랴?”비판하고 비난하고 비방합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모두 틀린 것이 됩니다.
사람은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 보아야 그사람의 계행이 바른지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오래 살아 보아야 합니다. 연애와 결혼이 다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수행처에서 한철 살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함께 살다 보면 단점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사람과 함께 살아 보기 전에는 그 사람이 계행을 잘 지키는지, 정직한지, 지혜로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입장에서 “네가 틀렸다”라고 말한다면 지독한 자만에 근거합니다. 더구나 자신은 계율을 잘 지키고 포살일을 준수한다고 하여 상대방에게 이와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면 최악의 자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최악의 자만은 폭력입니다. 입에 도끼를 문 것처럼 마구 자신의 지식과 배움을 표현한다면 교조적 교리에 바탕을 둔 탈레반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치 마른 저수지처럼 감성이 마르고, 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아 냉혈적이고, 인정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자의 매마른 지혜는 공감하기 힘듭니다. 더구나 “네가 틀렸다”라고 우월감이 개입되어 있다면 이는 배운자의 자만에 해당되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분노로 글을 쓴다면 스토커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지혜와 함꼐 늘 자비를 강조했습니다.
각계 각층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배려 하고 경청하는 것이 리더의 덕목입니다. 이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단지 다를 뿐입니다.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 갑니다. 이런 삶은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2017-07-2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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