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백년을 사는 것보다 하루를 살더라도

담마다사 이병욱 2017. 9. 5. 10:07


백년을 사는 것보다 하루를 살더라도



요즘 케이블에서 인기 있는 방송은 아마 나자연일 것입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를 케이블 채널 이곳 저곳에서 봅니다. 우리나라 40대 시청률 1위라고 선전하는 나자연은 도시탈출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홀로 산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까 하는 바램입니다.

 

나자연에서 어느 퇴역군인출신은 과거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오년 동안 누워 있다가 돌아 가셨다고 합니다. 참으로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자식에게만은 폐를 끼쳐 주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어떤 방법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업무로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서 요양원에 있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지낸지 꽤 오래 되었다고 합니다. 생업에 바쁜 자식들이 부양할 수 없어서 요양원에 보낸 것입니다. 가까운 친척 중에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분이 있습니다. 차츰 기억이 없어지더니 이제 자식 얼굴도 못 알아 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결국 요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교양다큐를 주로 방송하는 EBS에서 백세쇼크라는 프로를 방송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임을 말합니다. 자동차를 오래 타면 하나 둘 고장나듯이, 마찬가지로 사람도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하나 둘 신체의 기능이 망가져 갑니다. 활동은 거의 없고 숨만 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생에 대한 집착은 강한 것 같습니다. ‘늙으면 죽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죽음의 위기에 닥치면 더욱 더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법우님의 아버지는 구십이 넘었는데 밥을 열심히 잘 먹고 있다고 합니다. 잘 먹어야 오래 살기 때문이라 합니다.

 

꼭 살아있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살아 갑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살다 갑니다. 목숨이 소중한 것이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목숨을 부지하고자 합니다.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자들의 이미지는 젊음입니다. 살다살다 더 이상 살 수 없을 때 이미지는 잔뜩 찌그러진 이미지입니다. 배고픈 축생처럼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살 수 없습니다. 원담스님의 섭세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너의 존재를 세우는 것은 백지위에 점을 찍는 것과 같다. 하얀 백지는 淸淨無碍청정무애하지만 한 점이 찍힘으로 공간이 긴장하면서 뒤틀린다. 점을 중심으로 공간이 휘어지면서 중력이 발생한다. 점이란 존재는 하얀 공간에게 짐이 된다.

 

존재가 자기를 유지존속하면서 자기를 주장할 때 존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 존재를 떠받혀주고 살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존재는 주변에 의존하면서 존속을 꾀한다. 존재는 세계의 짐이요, 타자에 의존됨이요, 다른 것들의 희생을 먹고 존속, 유지된다.

 

나는 내 존재를 언제든 털어버릴 수 있다. 내 존재가 주변에 의존하면서 타자의 희생을 먹고 존속하는 데 드는 비용이 내 존재가 타자에 봉사하고 세계의 행복에 기여하는 효과보다 더 많다고 느껴질 때 내 존재는 해체되어 사라져야 한다. 나는 세계의 짐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내 존재가 세상의 짐이 되는지, 세상에 선물이 되는지 순간 순간 판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당연한 듯이 먹고 마시며 생존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왜 지금 너는 세계에서 양분을 섭취하면서 너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가? 너는 지금 바로 죽지 않고, 꼭 살아있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

 

죽음은 쉽고 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구하고, 대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다. 목숨이 뭐 그리 대단히 중요하다고 그런 말을 하는가? 바칠 것이 목숨 밖에 없으니 내놓는 것뿐이다. 장미꽃은 붉기 위해서 자신의 전 존재를 다 바치고, 빗방울은 비를 내리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고 떨어진다. 인간의 목숨이 장미 한 송이나 빗방울 보다 나을 게 뭐 있는가?

 

목숨이란 필요할 때까지 쓰다가 더 이상 필요 없으면 버리는 것이다. 언제까지 필요할까를 판단하는 것은 자기 지혜에 달려있다. 자기 목숨이 버리기에는 아깝지만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목숨이 떨어지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너는 그런 생명의 순환 가운데 한 티끌일 뿐이다.

 

네가 사라진다 해도 해와 달은 변함없이 돌고 꽃은 피고 바람은 불 것이니 너는 깨끗이 떠나라. 세상이 너를 기억해주지도 않을 것이며, 네가 왔다간 자취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남긴다는 게 우스운 짓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떠나라.

 

세상은 네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 네가 있음으로 오히려 잘 안 돌아갈 런지도 모른다. 부처님은 이렇게 사유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나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새삼스레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것도 없다. 애초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까.

 

세상에 대해서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세상에 무엇을 해줄까를 물을 뿐,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해줄까를 묻지 않는다. 내 존재는 세상의 짐이 되기보다는 세상의 선물로 살기를 바랄 뿐이다.

 

(원담스님, 섭세일기 2017 늦여름-2, 2017-08-29)

 

 

문단은 편의상 나눈 것입니다. 원담스님은 세상의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자꾸 요구만 하며 세상을 오염시키며 세상의 짐이 되며 살기 보다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호의호식 하며 악업만 쌓으며 오래오래 살기 보다는 가치 있는 일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이럴 때 목숨은 아깝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도를 이루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백년을 사는 것보다

 

세상 속에서 태어나 세상 속에서 살다가 세상에서 죽어갑니다. 내가 오늘 죽으면 나의 우주는 파괴되지만, 그렇다고 남의 우주까지 멸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어도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돌아 갑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오가고 차량들은 쏜살 같이 질주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듯, 사람들은 또 다시 본능대로 욕계의 세상을 살아갑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운좋게 살아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없지만 산자들은 오늘도 내일도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즐거움으로 살아 갑니다. 가다가다 종착지에 이르렀을 때 숫가락 놓게 됩니다. 마치 연극이 끝나면 페이드아웃(fade out)되듯이, 오염된 삶으로 악업만 잔뜩 진 채 삶의 무대에서 퇴장합니다.

 

죽은 자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어느 별에서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나 또다시 세상을 오염시키며 살아 갈 것입니다. 백년을 오염된 채 사느니 차라리 하루를 살더라도 깨끗이 사는 것이 낫습니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계행을 어기고 삼매가 없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계행을 지키고 선정에 들어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0)

 

지혜가 없고 삼매가 없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지혜를 갖추고 선정에 들어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1)

 

게으르고 정진 없이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정진하고 견고하게 노력하며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2)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4)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5)

 





 

법구경 천의 품에 있는 게송입니다. 게송을 보면 백년을 사는 것 보다 하루를 사는 것이 더 낫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계행, 지혜, 정진, 생멸, 불사, 출세간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범부로 백세까지 사는 것보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깨달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음을 말합니다.

 

무아의 가르침을 알면

 

초전법륜경에서 꼰단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진리의 눈(法眼: dhamma cakkhu)’이 생겨났습니다. 그 순간에 대하여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S56.11)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성과 소멸에 대한 지혜의 눈이 생겨난 것입니다.

 

법구경에서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Dhp.113) 라 했습니다. 여기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오온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주석에 따르면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의 다섯 가지가 무명(avijjā), 갈애(tahā), 행위(kamma), 자양분(āhara), 접촉(phassa)의 다섯 가지를 통해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DhpA.II.270) 라 했습니다. 다섯에 다섯을 곱하면 스물 다섯 가지가 됩니다. 초전법륜경에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 했을 때 이는 스물 다섯 가지가 생겨났다고 소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번뇌 다한 자에게 있어서 남아 있는 삶은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번뇌가 많은 자는 언제 죽을지 몰라 두려워 하지만 불사의 경지에 이른 성자는 삶과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 하지 않습니다. 테라가타에서는 죽음을 기뻐하지도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Thag.606)라 했습니다.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기는 성자에게 오온이 파괴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내가 없기에 죽음도 태어남도 없습니다. 자아관념이 있는 자에게 죽음이니 태어남이니 하는 말들이 시설되지만 무아의 성자에게는 애초부터 죽음은 시설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사(不死: amata)라 합니다.

 

아라한은 죽지 않습니다. 죽지 않기 때문에 태어남도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번뇌다한 아라한은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아라한선언하게 됩니다. 무아의 가르침을 알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어떤 이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 합니다. 대개 해 볼 것 다해 본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그래 보았자 오욕락입니다. 오욕락을 마음껏 누린 자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바라는 것이 오욕락입니다. 오욕락을 위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이가 구십세, 백세 까지 살아도 오욕락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누군가 죽어도 좋아!”라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삶에 열중 했을 때 그것은 단멸론적 삶이 되기 쉽습니다. 감각적 쾌락은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강렬한 것입니다.

 

원담스님에 따르면 죽음은 쉽고 살기는 어려운 일이다.”라 했습니다. 진짜 어려운 것은 도(magga)와 과(phala)를 이루는 것입니다. 살아 있으면서 계행을 지켜야 하고 정진해야 합니다. 오온이 무명, 갈애, 행위, 자양분, 접촉에 따른 생성과 소멸을 관찰해야 합니다. 무엇 보다 어려운 것은 자신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이가 아니다라고 나의 몸, 나의 느낌, 나의 지각, 나의 형성, 나의 의식에 적용해야 합니다. 마침내 나의 존재로부터 해방 되었을 때 팔십세, 구십세, 백세는 의미가 없습니다. 무아의 성자에게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2017-09-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