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삶이 지겹고 권태로울 때, 경이로운 삶을 위한 통찰

담마다사 이병욱 2017. 8. 27. 12:44

 

삶이 지겹고 권태로울 때, 경이로운 삶을 위한 통찰

 

 

경이(驚異)에 대하여

 

홍콩대엽야자수에 새순이 돋았습니다. 갑자기 솟아 난 것 같습니다.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 같습니다. 이전에 없던 것이 새로 생겨 났을 때 생명을 봅니다. 생명의 신비라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경이(驚異)’라 할 것입니다.

 

 

 

 

 

경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놀라울 만큼 신기하고 진기함입니다. 영어로는 ‘wonder’ ‘a miracle’ ‘a marvel’이라 합니다. 경이는 기적과 같이 놀라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경이에 대한 예를 든다면 그는 법당의 불화를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가 될 것입니다. 이는 인공적인 것에 대한 경이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봄은 신비와 경이로 가득한 생명의 위대한 현장이다.”입니다. 이는 자연에 대한 경이로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경이로움

 

경이에는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있습니다. 여행 가서 거대한 인공구조물을 접할 때 경이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도시에서 백층 이상의 마천루를 쳐다 볼 때 역시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작고 왜소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것에 대한 경이일 것입니다.

 

경이에는 자연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이 세상에 생명처럼 경이로운 것은 없습니다. 새싹이 돋는다든가, 꽃이 핀다든가, 악조건 속에서 뿌리를 내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경이로움은 무에서 유를 보는 것 같습니다. 없는 것에서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생명이 그렇습니다. 자연다큐를 보면 새의 부화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암수가 짝을 이루어 사랑을 합니다. 사랑의 결실로 알을 낳습니다. 없던 것에서 새로운 것이 생겨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알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다는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을 하면 아기가 태어납니다. 없던 것에서 갑자기 나온 것 같습니다. 마치 무에서 유가 창조된 듯합니다. 그래서일까 유일신교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을 모두 창조주가 창조했다고 합니다. 생명의 경이에 대하여 창조주를 상정하지 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 봅니다.

 

창조주가 만들었을까?

 

경이는 놀랍고 신기하고 진기하고 이상한 것을 말합니다. 경이는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있습니다. 거대한 인공구조물을 만들어낸 것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생명현상처럼 경이로운 것은 없습니다. 과학이 발달 되어 유전자 지도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경이로움이라고 표현되는 거대한 인공구조물과 생명현상은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질서입니다. 그리고 자기조직화입니다. 질서와 자기조직화의 특징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마치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 같습니다. 인공적인 것이라면 당연히 사람이 만들어냅니다. 그렇다면 생명현상은 누가 만들어 낼까요?

 

부처님 가르침에서 누가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생명현상에 대하여 누군가 누가라고 했을 때 이는 창조주를 상정한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의 원인에 의해서 이 세상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누가가 아니라 어떻게입니다. 상윳따니까야 몰리야 팍구나의 경에서, 몰리야 팍구나가 세존이시여, 누가 태어납니까?”(S12.12)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태어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태어난다.’라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태어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태어남이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S12:12)

 

 

부처님은 연기법적 사유를 말씀 했습니다. 누군가 누가 태어납니까?”라고 대뜸 물었을 때 이는 올바른 질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섭취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는 네 가지 자양분(사식)을 섭취하는 자아를 상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는 영원주의적 관점입니다. 영원주의는 하나의 원인이라 볼 수 있는 창조주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누가 태어납니까?”라는 질문은 자아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연기의 가르침을 설하는 부처님에게 적절한 질문이 아닙니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이 있습니다. 누군가 무안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 했을 때 이는 자아를 가정한 것입니다. 질문이 성립되지 않는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이 됩니다. 또한 이 세상은 영원한가?”등 답이 없는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라면 연기법에 따라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태어남이 생겨납니까?” (S12:12) 라는 식으로 묻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누가(who)가 아니라 무엇(how) 때문에 입니다.

 

가차 없는 엔트로피법칙

 

작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은 창조주 같습니다. 인간은 거대한 인공구조물, 그리고 문화예술품, 또 회사와 같은 조직이나 단체, 그리고 정치제도와 같은 시스템을 만들어 냅니다. 이는 인공적 경이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더욱 경이감을 느끼는 것은 생명현상입니다. 봄이 되면 산천초목에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수컷과 암컷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처럼 자기조직화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자기조직화 하는 것에 대하여 네겐트로피(Negentropy)’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네겐트로피는 엔트로피(Entropy)’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엔트로피가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차 없이 이동하는 것이라면, 네겐트로피는 정반대로 무질서에서 질서를 창조해냅니다. 무질서로 향하는 엔트로피에 맞서서 질서화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공구조물이고, 회사이고, 정치시스템입니다. 또 생명현상입니다. 그러나 인공구조물도, 정치시트템도, 생명도 때가 되면 결국 무질서로 됩니다. 일시적으로 질서를 유지하지만 결국 무질서로 되돌아 가게 됩니다. 무서운 엔트로피법칙입니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차없이 진행하는 엔트로피법칙은 불교에서 제행무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형성된 것은 무엇이든지 소멸한다는 제행무상의 법칙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것이 괴멸되어 가고 있습니다. 거대한 인공구조물도, 위대한 예술품도, 영원할 것 같은 정치시스템도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어느 것 하나 엔트로피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엔트로피에 저항하여

 

생명현상만은 엔트로피에 저항하여 자기조직합니다. 인공구조물보다 더 경이로운 것이 생명현상입니다.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은 엔트로피에 맞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끊임 없이 무질서로 향하고 붕괴되고 있지만 생명이 있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네 가지 음식(사식)에 따른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 자양분의 경(S12.11)’에 따르면, 먹는 음식의 자양분, 접촉의 자양분, 의도의 자양분, 의식의 자양분입니다. 이 네 가지 식사를 매일 하기 때문에 엔트로피에 맞서 생명이 유지됩니다. 더구나 이 네 가지 음식(자양분)으로 인하여 내생에 새로운 태어남의 원인이 됩니다.

 

불교에서 태어남이란 이전에 지은 행위, 즉 업에 따른 것입니다. 네 가지 식사가 결국 태어남의 원인이 됩니다. 창조주가 있어서 내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고자 하는 나의 의도에 따라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누군가 누가 태어납니까?”라는 것은 우문입니다.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태어남이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올바른 질문이라 했습니다. 이는 조건발생을 뜻합니다. 태어날 만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생명은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네겐트로피라 볼 수 있습니다. 

 

사는 것이 지겨울 때

 

사는 것이 지겨울 때가 있습니다. 매일 똑 같은 일이 반복 되었을 때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럴 때 분위기 전환 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이 시장에 가보는 것입니다. 재래시장에 가보면 활력이 넘쳐 납니다. 장사치들은 여기저기서 떠들고 사람들은 물건을 흥정합니다. 삶이 지겨울 때 시장바닥에 가 보면 생명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삶이 지겨울 때는 삶의 현장으로 달려 가면 됩니다.

 

삶이 무료하고 따분하고 권태로울 때 자연을 접하면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장대한 자연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삶의 활력을 느낍니다. 식물에서 싹이 돋고 꽃이 피는 것을 보는 것 만 해도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새들이 부화하는 모습, 동물이 새끼 키우는 모습, 사람들이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보면 경이로움 그자체입니다. 무질서로 향하는 엔트로피에 저항하여 자기조직화여 커가는 모습을 보면 질서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생명의 탄생도 신비롭지만 그것 못지 않게 성장하는 모습도 경이롭습니다.

 

생명보다 더 경이로운 것

 

이 세상은 경이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삶이 지겨울 때 생명이 있는 곳에 가면 생명의 환희, 삶의 환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이때 경이로움은 환희와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생명보다 더욱 더 경이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혹하게 진행되는 엔트로피 현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엔트로피가 멈추는 것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혹하게 진행되는 엔트로피 현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엔트로피를 멈추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논문에서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그런데 생명현상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그것은 마치 산 위에서 굉장한 속도로 폭류가 되어 흐르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그 밑에는 폭포수로 고여서 일순 정지하게 되는데 정지될 때에 말하자면 엔트로피도 감소되고 이것이 바로 생명현상이라는 것이다.” (전재성박사, 불교사상과 환경문제)

 

 

 

 

 

 

생명현상은 엔트로피와 반대로 움직입니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면 생명현상이 사라지고, 반대로 엔트로피가 감소하면 생명현상이 생겨납니다. 이를 폭포수로 비유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폭류와 같다고 했습니다. 전우주가 폭류와 같은 것입니다. 오온도 폭류와 같은 것입니다. 오온이 폭류처럼 무상하게 변하며 흘러 가는 것입니다.

 

폭포수 밑을 보면 잔잔해서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듯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폭포의 물이 고여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즉 엔트로피가 멈추었을 때 생명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온이라는 폭류가 멈추었을 때 고도로 생명이 충만된 현상이라 합니다. 이런 경이로움에 대하여 선정상태에서는 삐띠(piti)라 합니다.

 

삶이 무료하고 권태롭고 지겨울 때 시장바닥을 찾아 가면 활력을 얻습니다. 또 새로운 생명을 접하면 경이로움과 함께 지겹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경이를 느끼려거든 명상을 해야 합니다. 명상을 하면 희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를 빠알리어로 삐띠라 합니다. 그런데 삐띠는 경이로움라고도 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공적 구조물과 자연의 생명현상 보다 더 경이로운 것이 명상에 있어서 삐띠입니다.

 

희열에 대하여

 

빠알리어 삐띠는 일반적으로 희열로 번역됩니다. 삐띠는 초선정과 이선정에서 나타납니다. 칠각지에서는 새김과 탐구에 이어 세 번째 고리가 희열입니다. 상윳따니까야 자양의 여읨에 대한 경에서는 이렇게 표현 되어 있습니다.

 

 

자양을 수반하는 희열이 있고, 자양을 여의는 희열이 있고, 자양을 여의는 희열보다 더욱 자양을 여의는 희열이 있다.”(S36.31)

 

 

첫 번째, 자양을 수반하는 희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세간적 희열이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오욕락을 말합니다.  네 가지 음식, 먹는 음식의 자양분, 접촉의 자양분, 의도의 자양분, 의식의 자양분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도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자양을 여의는 희열은 선정의 희열이라 볼 수 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출세간적 희열이라 번역했습니다. 이는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사유와 숙고를 여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으로 설명됩니다.

 

세 번째, 자양을 여의는 희열보다 더욱 자양을 여의는 희열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출세간 보다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와 같은 희열에 대하여 수행승이 번뇌를 부숨으로써 마음이 탐욕에서 해탈한 것을 관찰하고, 마음이 성냄에서 해탈한 것을 관찰하고, 마음이 어리석음에서 해탈한 것을 관찰하여 희열이 생겨난다.”(S36.31) 라고 합니다. 번뇌의 소멸에서 오는 희열이 최상임을 말합니다. 오온이라는 폭류에 대하여 무상으로 관찰 했을 때 고요함에서 오는 열반이라 할 것입니다.

 

경이로운 삶을 위한 통찰

 

선가에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안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매일매일이 새롭다는 이 말은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난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 똑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보이지만 패턴은 약간씩 다르기 때문에 이전과 다른 것입니다. 만일 매일 그날이 그날이라면 지겨워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같은 영화를 한 두 번 볼 때는 볼만 하지만 열 번, 스무 번, 백 번 보라고 하면 고문에 해당 될 것입니다.

 

매일매일 똑 같은 일상을 살지만 똑같이 않습니다. 어딘가 달라도 다르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생이 지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루가 하루가 지겨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람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시장에 가면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여행을 가서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인공구조물에 경이로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을 접한다면 인생이 그다지 지겹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뿐입니다. 또다시 이어지는 권태, 무료, 하품, 졸림, 무기력함은 어쩔 수 없습니다.

 

오욕락을 통해서 희열을 맛볼 수 있지만 일시적이고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선정삼매를 통해서 희열을 맛보기도 하지만 역시 일시적입니다. 궁극적인 희열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상을 무상, , 무아로 통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신 없이 살아 갑니다. 또 한편으로 삶이 지겹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상을 관찰하면 삶이 지겨울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멈추어야 무상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재성박사는 니까야강독모임에서 멈추어서 보면 새로운 것으로 다가온다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삶이 지겹다면 경이로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무상을 관찰 했을 때 경이로운 것이어서 삶이 지겨울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매일매일 새로운 날,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2017-08-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