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늘 사띠하라 하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17. 8. 8. 10:05

 

늘 사띠하라 하는데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다리 꼬고 앉아 있어야만 할까? 오직 모를 뿐하며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가득해야 할까? ‘몰라몰라하면서 멍때리는 듯이 앉아 있어야할까? 고요를 맛 볼지 몰라도 가르침을 모른다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율장대품을 보면 상가형성과정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날부터 시작하여 전도선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순서적으로 전개되어 있습니다.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 다발을 보면 깨달음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입니다. 이는 율장대품 제1장 제1절이라 볼 수 있는 보리수이야기(Bodhikatha)’에서 연기법으로 설명됩니다. 부처님은 그날 밤 연기법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라고 시작되는 연기의 순관과 역관에 정신활동을 기울여 깨달은 것입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시험해 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 간 곳이 오비구가 있던 곳입니다. 부처님은 오비구에게 사성제 등 자신이 깨달은 것을 설명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초전법륜경에 잘 묘사 되어 있습니다. 오비구 중의 하나인 콘당냐가 마침내 알아 들었습니다. 율장대품에서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꼰당냐는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진리의 눈이 생겨났습니다. 그 순간 경천동지했습니다. 진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퀴는 후진불가입니다.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가는 바퀴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 했습니다.

 

진리의 수레바퀴는 다른 바퀴와 달리 멈출수도 없고 후진할 수도 없습니다. 진리를 알아 버리는 순간 오로지 그 길로만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흐름에 들어선 꼰당냐는 구족계를 요청했습니다.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가는 진리의 수레에 탑승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증명하고자 오비구를 찾아 갔습니다. 모두 가르침을 이해 했을 때 진리의 바퀴는 굴러 갔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맛 본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견도라 볼 수 있습니다. 다음 단계는 수행도와 무학도입니다. 무학도인 아라한의 단계에 이르러야 깨달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진리의 흐름에 들어선 오비구에게 무아의 설했습니다. 율장대품에서는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 했습니다. 오온에서 물질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를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모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온에 대하여 통제권이 없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오비구는 부처님으로부터 무아의 가르침을 듣고 모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무아의 가르침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가르침을 모른다면 깨달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행한다고 하는데

 

흔히 수행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수행 저런 수행 등 갖가지 수행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으면 모두 잘못된 길로 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계금취견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계금취견(sīlabbata-parāmāsa-diṭṭi)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종교적인 금계와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고 해탈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금계와 의식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말합니다. 중생을 윤회케 하는 열 가지 족쇄중의 하나입니다.

 

올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정견을 가져야 합니다. 정견은 초기경전에 확립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경전에 의지해야 함을 말합니다. 만일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경전을 무시하고 다른 것에 의지해서 수행한다면 사도에 빠지기 쉽습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때 깨달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좌선해서 빛을 본다든가 신비한 체험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깨달은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은 상호의존과 조건발생에 대한 것입니다. 또 조건 소멸에 대한 것입니다. 조건발생 조건소멸입니다. 다음으로 무아의 가르침입니다. 발생과 소멸의 원리를 알면 흐름에 들어간 자이기 때문에 견도입니다. 무아의 가르침을 알면 무학도가 됩니다. 중간 단계가 수행도입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가르침을 아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가르침을 이해 했을 때 믿음이 생겨납니다. 부처님 당시 제자들은 모여서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수행은 개별적으로 하지만 법문은 모두 모여서 들었습니다. 들은 법문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겨들었습니다. 그리고 기억하고 사유했습니다. 사유한 것을 실천코져 했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띠하라고 했을 때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구전 되어서 전승되어 왔습니다. 오늘날에는 각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 분은 계시지 않지만 말씀으로 남겨 놓았기 때문에 현전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가르침이 없는 삶은 공허합니다. 가르침을 모르면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했다하더라도 가르침에 근거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하나의 경험일 뿐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가르침과 수행을 병행하는 것입니다. 늘 사띠하라고 했을 때 단지 마음챙김이나 알아차림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는 것입니다.

 

 

2017-08-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