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도란 니중연화(泥中蓮花)처럼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 갑니다. 회사를 수 없이 옮겼습니다. 지금은 일인사업자로서 12년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전에는 2년이 멀다 하고 옮겼습니다. 아니 옮겼다기 보다 옮기기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옮긴 것입니다. 자의반타의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것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회사를 옮겼을 때 내가 없어도 잘 돌아 갔습니다. 내가 있어야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있건 없건 잘 유지 되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키맨(Key man)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사 핵심인력이라 하더라도 빈자리는 금방 메꾸어집니다. 특히 인재풀이 풍부한 큰회사에서는 “네가 없어도 할 사람 많다.”라는 식이어서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도태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됩니다. 세상 속에서 태어나, 세상속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 세상은 끝이 없습니다. 육안으로 관측되는 세상은 저 먼 은하에 이릅니다. 아무리 초고속 항공수단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세상의 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팔계의 세상에서는 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다툼이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중생들이 살아가는 ‘중생계(Sattaloka)’에서는 싸움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자들은 싸우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상윳따니까야 ‘꽃의 경’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 (S22.94)
부처님은 세상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싸운다는 말은 빠알리어 ‘vivadati’를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로 ‘disputes; quarrels’의 뜻입니다. 논쟁하거나 다투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탐, 진, 치로 살아가는 중생들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현자들이 중생들과 싸운다면 이전투구가 되어 똑같은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현자들이 왜 싸우는 것처럼 보일까요?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아니다’ 라고 여기는 것은
나도 그것을 ‘아니다’ 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이
‘이다’ 라고 여기는 것은
나도 그것을 ‘이다’ 라고 말한다.” (S22.94)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자들은 진리를 설하기 때문입니다. 탐진치로 살아가는 중생계에서 탐진치를 거슬러 살아 갈 때 다툼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욕망을 부추기는 욕계에서 “탐욕을 소멸해야 진정한 행복이다.”라고 거꾸로 말 했을 때 싸움을 걸어 오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위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사는 역류도(逆流道)를 추구하는 현자들에게 중생들이 싸움을 걸어 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겁니다. 현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진리를 설했을 때 싸움을 걸어 오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 (S22.94)라 하여 세상과 다투지 않음을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싫다하여 심산유곡으로 꼭꼭 숨어 버릴 수 있지만 그곳도 세상사는 곳입니다. 세상을 떠나서 단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런 세상은 탐진치로 가득한 중생계입니다. 또 이미 형성된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역류도를 추구하는 현자들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상윳따니까야 ‘꽃의 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가
물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
물위로 솟아올라
물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
부처님은 세상에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산하대지 산천초목이 있는 기세간(器世間)을 말합니다. 빠알리어로 ‘Cakkavālaloka’라 하는데 한역으로 현상계(現象界)라 합니다.
부처님도 현상계에서 태어나 중생들과 함께 중생계를 살아 갔습니다. 현상계와 중생계는 욕망으로 형성된 욕계입니다. 욕계는 탐진치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런대 부처님은 욕망의 세계를 탈출하라고 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탐, 진, 치로 살아 갈 때 부처님은 불탐(不貪), 부진(不瞋), 불치(不癡)로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역류도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과 싸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 것을 ‘니중연화(泥中蓮花)’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역류도를 추구한다고 하여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심산유곡에서 숨어 살듯이 살아도 세상에서 사는 것입니다. 혼탁한 저잣거리에 살아도 현자들은 물들지 않습니다. 연화가 더러운 물속에서 성장했으나 오염되지 않듯이, 현자들은 혼탁한 세상속에서 살지만 오염되지 않고 살아갑니다. 현상계에서 탐진치로 찌든 중생들과 살아가지만 거기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중생들을 불탐, 부진, 불치의 세계로 이끌어 줍니다. 중생에 대한 자애와 연민의 발로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대승에서 말하는 보살도가 아닐까요?
2017-10-0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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