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늙음의 저편으로
바쁘게 살아 가는 자들에게 세월은 화살처럼 흘러갑니다. 월요일인가 싶으면 금요일이고, 봄인가 싶으면 가을입니다. 연초가 엊그제 같은데 연말이 머지 않았습니다. 세월은 인정사정이 없어서 부자나 가난한자, 귀한자나 천한자 할 것없이 늙음의 저편으로 실어 날아 줍니다.
흘러 가는 세월을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최고 갑부도 마구 흘러 가는 세월을 멈출 수 없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호걸도 세월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이 세상에서 세월을 막을 자 그 누구도 없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무심하게 흘러 가는 세월입니다.
자기조직화 하는 생명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심리적인 것입니다. 세월은 흐르지 않습니다. 다만 나와 주변이 변해갈 뿐입니다. 자연현상적으로 따지자면 ‘엔트로피(Entopy)’가 증대되는 방향으로 진행될 뿐입니다. 닫혀진 계 내에서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것이 엔트로피입니다. 그런데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생명(生命)’입니다.
생명만이 엔트로피에 저항합니다. 엔트로피는 닫혀진 계 내에서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지만, 생명은 정반대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합니다.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것은 생명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 역시 엔트로피에 저항합니다. 생명이 있건 없건 ‘자기조직화(自己組織化)’ 하는 모든 것들은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네겐트로피(Negentropy)’입니다.
생명이 엔트로피에 저항하여 개체를 유지한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생명에는 수명이 있기 때문에 딱 살아 있는 동안만 엔트로피에 역행합니다. 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회사, 모임, 단체, 조직 등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시스템은 관리 될 때만이 엔트로피에 저항합니다. 만약 모임이나 조직, 단체를 관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회사를 관리 하지 않으면 부도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모임이나 조직, 심지어 정부도 관리하지 않으면 붕괴되게 되어 있습니다.
39년된 아파트에서 사는데
생명이 있을 때 엔트로피에 저항합니다. 태어나서 폭발적인 성장을 하는 것도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아니 수태 순간에 세포분열이 일어나는 것이 마치 ‘빅뱅(Big Bang)’처럼 보이는데 가장 극적인 자기조직화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삼라만상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은 지 오래된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1978년에 지었다고 하니 올해로 만 39년이 됩니다. 주변이 온통 재건축되고 재개발되어서 이제 아파트단지가 섬처럼 남아 있습니다. 10년 전부터 재건축 추진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추진위와 비대위의 갈등으로 인하여 수 년째 표류해 왔습니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엘리베이터 게시판을 보면 서로 고발과 고소로 얼룩져 있습니다.
재건축과 재개발로 인하여 사방에 새로 지은 아파트단지가 산뜻합니다. 요즘에는 옛날과 달리 ‘타워형’이 대세입니다.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를 보면 ‘낙락장송 소나무’가 눈길을 끕니다. 아열대지방에 가면 거리나 관공서에 우람한 야자수를 볼 수 있는데 요즘 아파트단지에서는 경쟁적으로 심산유곡에서나 자라는 소나무를 식재하고 있습니다.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도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 낡아져 갑니다. 그런데 식재된 낙락장송 소나무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욱 푸르러지고 모양을 갖추어 갑니다. 생명이 없는 아파트구조물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는데 비하여 생명이 있는 나무는 더욱 더 푸르러져 가는 것이 요즘 아파트 단지에서 보는 풍경입니다.
느티나무 밑둥에서 본 세월의 무게
현재 아파트에서 10년 째 살고 있습니다. 낡고 오래된 아파트이지만 그 때 당시워낙 튼튼하게 지어서일까 앞으로 100년은 갈 듯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멀쩡한 아파트를 단지 세월이 오래 되었다고 해서 허물어 보리고 그 자리에 타워형으로 된 멋진 아파트를 새로 짓고자 합니다.
지은지 39년된 아파트 단지는 갈수록 낡아져 갑니다. 그런데 아파트 입주 당시 심어 놓았을 나무는 이제 거목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엔트로피 영향으로 질서에서 무질서로 낡아져 가지만, 정반대로 생명이 있는 느티나무 등 갖가지 수종은 점차 두터워져 갑니다.
아파트 단지에서 39년 세월을 보낸 느티나무, 벗나무, 단풍나무가 있습니다. 이제 지은지 얼마 안되는 아파트 단지에서는 조경이 볼 것 없지만 39년의 세월이 축적된 오래 된 아파트단지에는 볼 것이 많습니다. 봄이 되면 벗꽃이 구름을 이루는데 따로 벗꽃놀이 하러 가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가을이 되면 거목이 된 느티나무 단풍이 절정을 이루기 때문에 단풍놀이를 따로 가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일터로 향하는 길에 오래된 느티나무 밑둥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10년 째 늘 지켜 보는 나무이었지만 그날 눈에 띈 것은 느티나무 밑둥의 세월의 흔적이었습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쇠로 된 작은 울타리가 밑둥을 침범한 것입니다. 아니 철책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느티나무 밑둥이 커지면서 철책을 침범한 것입니다. 마치 철책을 집어 삼키는 듯한 모습을 보았을 때 ‘세월의 무게’를 보았습니다.
도처에서 세월의 무게를 볼 수 있습니다. 종종 산사에 가면 오래된 느티나무가 바위를 집어 삼키는 듯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합니다. 가는 세월 막을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습니다. 세월을 거꾸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세월에 저항하는 것은 생명입니다. 철책을 집어 삼키고 바위를 먹는 듯한 느티나무 밑동을 보면, 세월은 생명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보입니다.
볼품 없는 노인에 대하여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세월에 저항합니다. 그러나 결국 세월에 항복하고 맙니다. 엔트로피에 저항하여 일시적으로 자기조직화 하지만 생명이 다하면 모두 붕괴되고 맙니다. 나이가 들어 늙어 지고 병이 나면 더 이상 엔트로피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나무는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밑동이 점점 커져서 바위도 삼켜 버리지만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늙어져서 왜소해지고 축소됩니다. 세월에 따라 나무는 우람해지지만 인간은 늙고 병들어서 볼품 없어집니다. 이렇듯 볼품 없는 노인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Acaritvā brahmacariyaṃ
aladdhā yobbane dhanaṃ
senti cāpārikhīnāva
purāṇāni anutthunaṃ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누워서 옛날을 애도한다.”(Dhp.156)
게송에서 핵심은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라는 구절입니다. 이 비유는 바로 이전 게송 “고기 없는 연못에 사는 늙은 백로처럼 죽어간다.”(Dhp.155)와 함께 페어로 사용됩니다. 나이 들어 병들고 늙어 버린 자에게 대하여 ‘쏘아 버려진 화살’과 ‘늙은 백로’로 표현한 것입니다. 모두 쓸모 없는 노인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런데 ‘쏘아져 버려진 화살’로 비유한 것이 가장 가슴에 와 닿습니다.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노인이 되면 할 일이 없습니다. 나이만 차곡차곡 쌓였을 뿐 가족과 사회를 위하여 아무런 역할을 못했을 때 마치 ‘늙은 좀비’와 같은 처량한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이에 대하여 날개가 꺽인 늙은 백로나 쏘아져 버려진 화살로 비유합니다. 특히 ‘쏘아져 버려진 화살’의 비유에 대해서는 주석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원래는 ‘활로부터 발사되어 놓아진 것처럼 옛날을 애도하며’라는 문장이다. 화살이 활에서 쏘아지면, 순간적으로 날아 간 뒤에, 바닥에 떨어져 무한의 먹이가 된다. 그것을 다시 주어서 활에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경우도 목숨이 다한 뒤에 죽음을 만나서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고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놀고 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이와 같이 먹었고, 이와 같이 마셨다.’라고 통곡하고 애통해하며 회상하고 후회하며 누워있게 된다.”(DhpA.III.132-133, 전재성님역)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환승역에서 광고판을 보았습니다. 일종의 공익광고입니다. 사진과 함께 간단한 문구가 적혀 있었는데 “젊은이여! 지금을 즐겨라. 먼 훗날 후회한다.”라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보고서 부처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내용이 공익광고 형식으로 지하철역 환승장에 붙어 있음을 확인 했습니다.
누구나 즐기며 살자고 합니다. 은퇴하면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을 가지고 세계여행이나 다니며 남은 여생을 즐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나이들어 후회하며 “껄껄껄”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참을껄, 즐길껄, 베풀껄” 이렇게 세 가지라 합니다. 여기서 주목하는 말이 “즐길껄”이라는 말입니다.
지하철 공익광고판에는 “젊은이여! 지금을 즐겨라. 먼 훗날 후회한다.”라 되어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사는 사회분위기를 잘 나타난 말이라 생각됩니다. 어쩌면 욕망으로 사는 욕계에서 욕망에 충실한 삶을 잘 나타낸 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늙어 보기 전에는 모를 것입니다.
젊은 사람에게는 젊음의 교만과 건강의 교만이 있기 때문에, 이 젊음과 건강이 천년만년 갈 것처럼 마구 남용하고 즐기는 삶에 바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세월을 이길 장사가 없습니다. 젊었을 때 즐기는 삶을 산 자에게 있어서 노년은 비참하기 그지 없습니다. 게송에서는 ‘쏘아져 버려진 화살’로 노년을 묘사 했는데,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버려진 화살을 다시 사용하지 않듯이, 사람들은 늙어 빠진 노인을 아무도 쳐다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 노인은 비애를 느낄 것입니다. 다만 기억은 남아 있어서 지나간 시절에 대한 회환이나 후회, 추억을 먹고 살아 갑니다. 그 지나간 시절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이었습니다. 즐기기만 했을 뿐 나이 들어 지금 이 비참한 상황에 이를지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안 노인은 단지 죽을 날만 기다리며 옛날 즐거웠던 날이나 슬펐던 일 등을 회상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결국 절망으로
병들기 전에는 몸의 건강을 모릅니다. 나이 먹기 전에는 젊음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월은 우리들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스쳐지나감의 경’을 보면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S1.4)라 했습니다. 세월이 청춘을 버리듯이, 세월은 중년을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노년이 되었을 때 쏘아져 버려진 화살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쏘아져 버려진 화살이 되었을 때 부처님 가르침이 구구절절 다가올지 모릅니다. 십이연기 정형구에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가 있습니다. 십이연기에서 노사에 대한 것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한역에서 단지 노사(老死)로 끝나는 것과 달리 매우 구체적으로 되어 있어서 심금을 울립니다. 특히 늙은 좀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을지 모르는 말입니다.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는 말은 빠일리어로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라는 긴 복합어입니다. 여기서 소까(Soka)는 슬픔으로, 빠리데와(parideva)는 비탄, 둑카(dukkha)는 고통, 도마낫사(domanassa)는 근심, 우빠야사(upāyāsā)는 절망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복합에서 가장 마지막 말이 절망입니다. 무명으로 시작해서 결국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최후입니다. 쏘아 버려진 화살이 된 자에게 느끼는 비애는 다름 아닌 절망일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을 즐겨라?
세월은 인정사정없이 무지막지하게 오늘도 내일도 흘러 갑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생명이 있는 것들은 자기조직화 하여 엔트로피에 맞서지만 결국 굴복하고 맙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나무 밑둥은 점점 커져 철책을 삼키고 바위를 먹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를 먹어 갈수록 마른 호숫가의 날개 꺽인 백로 신세와 같고 아무도 찾지 않는 쏘아 버려진 화살과도 같습니다.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나이만 차곡차곡 쌓여 갑니다. 해 놓은 것이라고는 먹고 마시고 즐긴 것 외 없습니다. 하나 있다면 자손을 남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자손을 남긴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나 크게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도 자손을 남깁니다. 식욕과 성욕이라는 기본적인 욕망으로 사는 동물은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갑니다. 사람도 오로지 식욕과 성욕 등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면 동물의 삶과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지금 이순간을 즐겨라’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젊은 사람들은 즐기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젊음의 교만과 건강의 교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월은 이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세월은 청춘을 버리고, 중년을 버리고 노년마져 버릴 것입니다. 오직 즐기는 삶만 살아 온 자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할 것은 없습니다. 남은 것은 절망뿐입니다.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는 말은 심금을 울립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순간 즐기는 삶을 살 것인가 알아차리는 삶을 살 것인가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오늘 밤까지만 사는 것입니다. 하루를 일생처럼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M131)라 했습니다.
2017-10-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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