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초래하는 탐욕의 식사와 분노의 식사는 멈추어야
탐욕의 끝은 어디일까? 하늘에서 황금비가 쏟아져도 인간의 탐욕은 그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를 가지고 있으면 둘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아흔아홉을 가지고 있으면 백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무실이 마치 화원처럼 책상과 탁자를 중심으로 사방에 식물로 장엄되어 있습니다. 행운목을 비롯하여 홍콩대엽야자, 쿠루시아, 돈나무 등 열대식물과 난 등으로 모두 합하면 20개 가량 됩니다. 작은 사무실이 꽉 찰 정도로 푸르름을 자랑하지만 화원 앞을 지날 때 마다 새로운 식물을 보면 사고 싶은 욕심이 납니다. 욕심대로 하자면 화원을 하나 차려야 할 것입니다.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한 사람
탐욕, 욕망, 욕심, 탐착, 갈애, 애착, 이런 말은 비슷하면서도 같은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두 탐욕을 뿌리로 하는 마음 입니다. 그렇다면 탐욕이란 무엇일까요? 즐거운 대상에 대하여 거머 쥐려는 마음을 탐욕이라 합니다. 반대로 싫은 대상에 대하여 밀쳐 내려는 마음이 성냄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대상 있어야 일어나고, 한순간에 두 개의 마음이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한순간에 탐욕과 성냄이라는 두 개의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은 대상에 따라 순간순간 바뀝니다. 마치 아이가 울었다 웃었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대상에 따라 자꾸 바뀌에 거기에 휩쓸려 가는 사람에 대하여 “변덕이 죽 끓듯 하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은 탐욕과 분노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좋으면 “죽어라 좋아”라 하고, 싫으면 “죽도록 싫은”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한 사람은 한번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독불장군처럼 무엇이든지 자기위주로 살아 갑니다. 결국 ‘내 뜻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도 내 뜻대로 되야 하고 당연히 자식도 내 뜻대로 되어야 합니다. 돈도 내 뜻대로 벌려야 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내 뜻대로 되어야 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분노합니다.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분노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지만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어떻게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일까요?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 내 뜻대로 되기를 바리는 사람은 탐욕과 성냄에 지배 받은 사람입니다. 문제는 ‘내 뜻대로’ 하고자 했을 때 인간관계가 파괴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관계를 단절하려 거든 내 뜻대로 하면 될 것입니다. 이처럼 탐욕과 분노로 사는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 합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어리석게 살아 갑니다.
분노는 확실히 파괴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탐욕도 역시 파괴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까지 성냄이나 분노와 같은 밀쳐 내는 마음만이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화를 내면 그 순간 단절 됩니다. 내가 거래처의 고객과 다투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조직폭력배가 분노하면 길거리 전쟁으로 전개됩니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격분하면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분노, 성냄, 화는 인간관계를 단절시키고 파괴적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탐욕도 파괴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탐욕도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일요일 강원도 춘천에 있는 K대 Y교수와 작업했습니다. Y교수는 서울에 가족이 있는 주말부부입니다. 주중 평일에 학교 부근 숙소에서 머문다고 합니다. 일요일 Y교수가 사무실로 찾아 온 것은 일요일에도 사무실에 나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월요일 홀가분한 마음으로 직장으로 가기 위해서 일요일 늦은 오후에 온 것입니다.
Y교수와 약 한시간 가량 작업했습니다. 저녁 먹을 시간도 되고 해서 Y교수는 저녁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날 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밥 생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거절 해야 했습니다. Y교수가 체면치레로 툭 던진 말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진지하고 모범생 스타일이어서 말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서 식사에 응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먹은 음식이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니 본인의 탐욕이 발동해서 고기집으로 간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Y교수가 식사하자고 했을 때 물리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차선은 간단히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하다 보니 고기집에 갔었고 더구나 음주까지 하게 되어 다음날 최악의 상황을 맞이 하게 되었습니다. 전날 먹은 음식으로 컨디션 난조를 불러 왔고 생산성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습니다. 그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몸의 상태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결국 탐욕의 문제이었습니다. 좀더 맛 있는 것, 좀 근사한 것을 찾다가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 것입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탐욕도 파괴적으로 작용함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신체의 부조화로 인한 ‘고통’으로 나타났습니다.
탐욕의 식사, 분노의 식사
일요일 저녁 먹은 후 이틀이 지난 현재 컨디션은 회복되었습니다. 어제와 비교하면 천지차이입니다. 몸이 편안하니 마음도 평안합니다. 몸의 컨디션이 난조를 부릴 때 정신마저 혼미한 듯 합니다. 결국 탐욕이 문제였습니다. 분노도 개입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대단히 어리석은 행위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얼마나 욕망이 남아 있는가를 보려면 식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젓가락 놀리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에게 남아 있는 탐욕을 짐작케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이 탐욕으로 식사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들 상당수가 분노로 식사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탐욕의 식사, 분노의 식사를 하다 보니 몸의 부조화로 인하여 고통받습니다.
고통을 초래하는 탐욕의 식사, 분노의 식사는 멈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빠알리 공양게에서는 ‘청정한 식사’를 요청합니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라고 이치에 맞게 성찰해서 음식을 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치료가 될 때까지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 또한 예를 들어 짐을 옮길 수 있도록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라고 이치에 맞게 성찰해서 음식을 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안다.” (S35:239)
2017-10-2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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