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수행이 되다, 글쓰기도 수행이다
일상이 운동이 되다
“일상이 운동이 되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입구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문구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마다 늘 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문구가 늘 입가에 맴 돕니다. 자세히 읽어 보면 네 가지 권장사항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이용하기, 점심식사후 산책하기, 한정거장 미리 내려 걷기, 자가용보다는 대중교통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일상이 운동이 되는 것 네 가지를 보면 친환경적입니다. 어쩌면 자발적 가난과 자발적 불편을 감수하는 환경운동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운동이 되어서 좋다는 것입니다. 과연 얼마나 실천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근력(筋力)이 생기면
보통사람들에게 일상은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직장인이라면 일하는 것이 일상일 것입니다. 학교선생이라면 가르치는 것이 일상이고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물건 파는 것이 일상일 것입니다. 전업주부라면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돌 보는 것이 일상일 것입니다.
누구나 매일 하는 일이 일상입니다. 운동하는 것도 일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매일 꾸준히 해야만 일상이 될 것입니다. 기분 좋으면 하고 기분 나쁘면 하지 않는다면 일상이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꾸준히 하면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운동을 꾸준히 하면 근육에 힘이 붙을 것입니다. 근력(筋力)입니다. 십년 동안 운동한 사람의 근력은 운동과 담 쌓고 사는 자와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수행이 일상화 된 자의 힘과 전혀 수행을 하지 않는 자와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클 것입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보통불자의 글쓰기
보통불자에게 글쓰기는 일상입니다. 기분이 좋으면 쓰고 기분 나쁘면 그만 두는식이 아니라, 기분과 관계 없이 숙제하듯이 매일 쓰는 것입니다.‘일상이 운동이 되다’라는 구호처럼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밥벌이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의 하는 것이 일상인 교수라면 직업상 해야 되는 일이고, 장사하는 것이 일상인 사람이라면 생계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상입니다. 그러나 운동이나 글쓰기는 자신의 좋아서 하는 일이고 자신을 계발하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운동을 꾸준히 하면 근력이 붙듯이, 마찬가지로 글쓰기를 꾸준히 하며 ‘필력(筆力)’이 붙습니다.
근력이 붙으면 남보다 몇 배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근육질의 역사가 무거운 물건을 거뜬히 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상이 운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를 하여 필력이 붙으면 생각하는 것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서 역시 남과 차별화 됩니다. 일상이 글쓰기가 된 결과 일 것입니다.
게으른 자에게 일상은
게으른 자에게 일상은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것입니다. 식욕과 성욕 등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일상입니다. 게으른 자의 일상은 또한 오욕락(五慾樂)에 충실한 삶입니다. 눈이나 귀 등 다섯 가지 감각을 즐기는 오욕락을 말합니다. 오욕락을 즐기는데 있어서 게으른 자는 없습니다. 게으른 자는 오욕락을 즐기는데 바쁜 일상을 보냅니다.
게으른 자에게 일상이 운동이 될 수 없습니다. 또 게으른 자에게 있어서 글쓰기가 일상이 될 수 없습니다. 힘만 들고 귀찮은 것을 애써 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움직임이 없습니다. 움직임 없다는 것은 죽은 자와 같습니다.
법구경에서는 게으른 자에 대하여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Dhp.21)라 하여 사실상 죽은 자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반면 움직임이 있는 자, 즉 부지런 한자는 “방일하지 않은 사람은 죽지 않으며”(Dhp.21)라 하여 살아 있는 자라 했습니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자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식욕과 성욕 등 오욕락을 즐기는데는 부지런하지만 몸과 마음을 닦는데 게으르다면 죽은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반면 움직이는 자는 살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운동을 했을 때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글을 쓸 때 역시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글쓰기가 일상이 되다
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자판을 두들길 때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글이 완성되어서 인터넷에 올릴 때 일시적으로 강한 성취감을 느낍니다. 더구나 올린 글에 대하여 누군가가 공감 했을 때 강한 기분 좋습니다. 또한 누군가에 도움이 되었을 때 글 쓴 보람을 느낍니다. 서너시간 투자한 것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경험해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쾌감입니다.
보통불자에게 글쓰기는 일상입니다. 2006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만 11년 되었습니다. 매일 쓰다 보니 3,700개 가량 되었습니다. 매일 서너시간씩 주로 정신이 맑은 오전에 글을 씁니다. 오후에는 생업과 관련된 일을 합니다. 하루 일과 중의 반은 글쓰기로 보냅니다.
11년 동안 쓰다 보니 이제 글쓰기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보통불자에게 글쓰기는 밥먹는 것과 같습니다. 게으른 자도 매일 밥 먹는 것이 일상이듯이, 글쓰기도 밥먹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하여 모니터의 하얀 여백을 마주하면 여전히 긴장 됩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 가야 할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구상을 합니다. 이전 날에 다음 날 쓸 글을 생각해 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품고 있으면 어느 순간 좋은 생각이 떠 오릅니다. 그럴 때는 스마트폰 메모에 키워드를 기록해 둡니다.
이른 아침 학의천을 걸어 일터로 갈 때 대강 그날 쓸 시나리오가 완성됩니다. 일터에 도착하자 마자 다른 일 제껴두고 오로지 글쓰기에 집중합니다. 이렇게 글쓰기 삼매에 빠지면 오전이 금방 지나갑니다.
글쓰기도 수행이다
매일 글 쓰지만 매일 새로운 글입니다. 매일 새로운 사유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강연에서 들은 것이라면 노트를 합니다. 노트를 보면서 글로 정리하면 강연의 내용은 나의 것이 됩니다. 경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전구절을 인용했을 때 주석뿐만 아니라 검색을 통해서도 보충하기 때문에 해당 경의 의미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글로서 붙들어 매 두는 것입니다.
글쓰기가 일상인 보통불자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하나의 수행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글을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많이 알게 됩니다. 또 많이 사유하게 됩니다. 특히 초기경전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에서는 경전에 실려 있는 가르침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언어나 문자로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하며 수행할 것을 점잖게 권유하기도 합니다.
진리는 문자와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직접 경험 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사과는 먹어 봐야 맛을 알고, 자전거는 타 보아야 운행할 수 있듯이, 아무리 교리적으로 많이 알아도 직접 체험한 것만 못함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데는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글을 쓰는 자에 대하여 수행은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일 것입니다. 또 하나는 글 쓰는 이에 대한 일종의 우월의식 또는 열등감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자는 많은 사유를 합니다. 글은 철저하게 논리이므로 논리가 서지 않으면 글이 되지 않습니다. 많이 사유하고 많이 알아야 훌륭한 글이 됩니다. 그럼에도 진리를 머리로 이해한다고 하여 백안시하기도 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고, 진리는 오로지 마음과 뜻으로만 아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글 쓰는 자는 수행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듯합니다.
글도 쓰면서 수행도 하면 금상첨화입니다. 매일매일 서너시간씩 글을 쓴다는 것은 매일매일 수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해서 마음을 계발하는 것도 수행입니다.
불교의 4대 수행
수행이라는 것이 반드시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정관(Asubhā bhāvetabbā), 자애관(mettā bhāvetabbā), 호흡관(ānāpānassati), 무상관(aniccasaññā bhāvetabbā)이 있습니다. 이를 불교 4대수행이라 합니다. 반드시 앉아서 호흡관찰만 하는 수행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불교 4대 수행중에 자애관이 있습니다. 자애관에 대하여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실천한다면, 그를 공허하지 않은 선정을 닦는 수행승이다.”(A1.53)이라 했습니다. 앉아서 호흡관찰하여 선정에 이르러도 자애의 마음이 없으면 공허한 수행이라 합니다. 나홀로 선정의 즐거움과 평온을 맛보지만 존재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자비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헛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 보다 더 수승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상에 대한 지각입니다. 이에 대하여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보다,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이라 했습니다. 불교 4대 수행중에서 무상관이 가장 수승함을 말합니다.
교학승과 수행승이 다투었는데
새는 좌우 양날개로 날아 갑니다. 부처님 가르침 역시 교학과 수행이라는 양날개를 필요로 합니다. 한쪽 날개로 날 수 없듯이, 오로지 교학이나 오로지 수행만으로는 가르침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마하쭌다의 경’에 따르면 교학승과 수행승이 다투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단점을 말하면서 비난합니다. 교학승은 수행승에게 “이들은 도대체 무슨 선정에 든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선정에 든단 말인가?”(A6.46) 라며 헐뜯고 비난했습니다. 반면 수행승들은 교학승들을 향해 “들뜨고 오만하고 동요하고 수다스럽고 쓸데없이 지껄이고 새김을 잃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만하고 마음이 혼란되고 감관이 거칠다.” (A6.46) 라며 헐뜯고 비난했습니다.
교학승과 수행승들은 서로 단점만 보면서 비난했습니다. 이에 마하쭌다 존자는 두 수행승에게 ‘장점’을 보라고 했습니다. 단점만 보면 비난 하지만 장점을 보면 존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하쭌다는 수행승의 장점으로 “세상에 이러한 불사의 세계를 몸으로 접촉하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A6.46)라 하여 열반을 체득할 수 있음을 들었습니다. 반면 교학승의 장점으로는 “세상에 이러한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A6.46)라 하여 통찰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수행승은 교학승이 얻을 수 없는 열반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고, 교학승은 수행승이 얻을 수 없는 위빠사나 통찰지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가르침은 잘 전승되어 왔다
부처님이 설한 8만 4천 법문은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처님 원음이라 합니다. 구전 되어 온 것을 문자화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언어와 문자로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진리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승된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대승경전 능가경에서는 “어느 날 저녁 정각 이룬 때부터 어느 날 저녁 열반에 들 때까지 이 사이에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 자증과 본주의 법인 까닭에 이 밀어를 한 것이니 나와 모든 여래 조금도 차별이 없다네.”(능가경 7권, 楞伽經之四)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법해 놓고서 ‘나는 한 자도 설한 바 없네.(我都無所說)’라 한 것은 아마도 진리는 언어나 문자로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잘 전승되어 왔습니다.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법한 것은 그대로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깨달은 자는 마음으로 뜻으로 알려 주기도 하지만 언어로도 알려 줍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말로 부처님은 가르침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가르침을 접하지 못한 자들은 언어와 문자로는 알 수 없고 마음과 뜻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체험만을 강조합니다.
교학을 알고 체험하면 금상첨화입니다. 가르침만 알고 실천이 없다면 반쪽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 체험만 있고 가르침에 대하여 모른다면 역시 반쪽에 지나지 않습니다. 새는 양날개로 날아 가듯이 가르침을 배워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수행을 하여 닦아야 할 것을 닦았을 때 가르침은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초기경전, 즉 빠알리니까야를 접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8만 4천 법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It.121)
수행이 일상이 되어야
부처님은 45년동안 설법한 것을 모두 말로서 남김 없이 알려 주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밀이 없습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에 들 때 “아난다여,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D16) 라 했습니다.
일상이 운동이 되듯이 수행이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수행방법이 있는데 그 중에 자신에게 맞는 것을 골라 일상이 되게 해야 합니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붙어서 큰 힘을 발휘하듯이, 수행을 하면 수행의 힘이 붙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 안에 있습니다.
2017-11-07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회의 가르침이 악마의 가르침이라고?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0) | 2017.11.13 |
---|---|
전쟁이 터지면 지옥 된다, 지옥으로부터 두 발자국(Two Steps From Hell) (0) | 2017.11.09 |
고통을 초래하는 탐욕의 식사와 분노의 식사는 멈추어야 (0) | 2017.10.24 |
성시화(聖市化) 흔적인가, 십자가형상 안양시로고는 원점에서 재검토되어야 (0) | 2017.10.23 |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늙음의 저편으로 (0) | 2017.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