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의 가르침이 악마의 가르침이라고?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윤회론은 악마 빠삐만의 이론이지 부처님의 이론이 아닙니다.” 이 말은 페이스북에서 K법우님이 한 말입니다.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업과 윤회의 가르침이 악마의 가르침으로 둔갑하는 순간입니다.
불자가 된다는 것은
불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상윳따니까야 ‘마하나마의 경(S55.37)’에서 재가신자 마하나마는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재가신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S55.37)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Yato kho mahānāma,
buddhaṃ saraṇaṃ gato hoti,
dhammaṃ saraṇaṃ gato hoti,
saṅghaṃ saraṇaṃ gato hoti,
ettāvatā kho mahānāma, upāsako hotīti.
“마하나마여,
부처님에게 귀의 하고
가르침에 귀의 하고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자가 됩니다.”(S55.37)
불자가 된다는 것은 삼보에 귀의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한국불자들은 대승보살계를 받으면 불자가 되는 것인 줄 알지만 초기경전에 따르면 불자가 되는 첫 번째 조건은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과 승가공동체(saṅgha)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가지 보물은 모두 부처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하고, 가르침은 부처님이 설법한 것을 말하고, 승가공동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승단에 들어가 상가의 일원으로서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빠알리니까야라 하여 오늘날 까지 잘 전승되어 왔습니다. 또 재가자가 부처님의 제자로서 재가신도가 된다는 것은 삼보에 귀의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됩니다. 출가자나 재가자나 모두 할 것 없이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 승가공동체를 믿고,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한국불교에서 존재감 없는 부처님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는 세 가지 보물 개념이 바뀌었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하지만 꼭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선종의 전통이 우세한 한국불교에서는 부처님 보다 조사(祖師)가 더 우선인 것 같습니다.
종파불교를 지향하는 일본불교에서 부처님 보다 개산조의 탄생일을 더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동아시아에서 부처님은 2위나 3위 정도로 밀려나 존재감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는 승보의 개념으로 ‘스님들’이라 했습니다. 스님을 승보로 격상시켜 놓은 것입니다. 사실상 부처님과 동격입니다.
스님들을 승보로 했을 때 사실상 승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승가공동체는 자자와 포살을 하며 학습계율을 준수하는 승가공동체입니다. 그럼에도 승보에 대하여 승가라 하지 않고 스님들이라 한 것은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님과 같은 반열에 올라 간다고 보아서일 것입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는데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이 법문하는 것을 보면 경전을 인용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깨달은 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경전을 근거로 이야기하면 덜 깨달은 자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각자 이야기 하는 것이 다릅니다. 이 스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저 스님은 정반대로 이야기 합니다. 한마디로 중구난방(衆口難防)입니다.
스님들이 경전을 무시하고 경전을 인용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을 때 어느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문제는 재가자들도 이런 스님들을 따라 간다는 사실입니다. 경전을 근거로 이야기하면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취급합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내야 깨달은 사람 취급합니다.
불자가 된다는 것은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함으로써 성립됩니다. 그러나 경전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이야기한다면 불자라고 볼 수 있을까요? 불자라면 가르침에 근거하여 이야기 해야 할 것입니다.
K법우님의 불교관을 보면 비불교적인 것으로 가득합니다. 가르침을 자신의 생각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이야기 해도 가르침과 비교하여 어긋난다면 사견(私見)에 지나지 않습니다. 빗나간 견해입니다.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누구나 견해를 말할 수 있습니다. 다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인이라면 가르침에 근거해서 말해야 합니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 따르면, 어느 수행승이 “이것이 가르침이고 이것이 계율이고 이것이 스승의 교시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동의할지 모릅니다. 반신반의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가장 좋은 것은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라며 경전을 열어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의 말에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이것은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D16)
초기경전에 답이 있습니다. 누군가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이 말에 동의하지도 배척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한 것을 잘 파악해서 법과 율에 맞는지 대조해 보라고 했습니다. 대조해서 맞으면 받아 들이고, 맞지 않으면 배척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명확하게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국불교는 대혼란기에 있습니다. 마치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숙명론을 말하는 것 같고, 또 어떤 이는 단멸론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영원주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중구난방이 된 것은 각자의 생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한국불교가 중구난방이 된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 때문으로 봅니다.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 있음에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보더라도 자신의 취향에 맞게 취사선택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외도들이 말하는 것과 다름 없게 되었습니다.
가르침에 대하여 반신반의 하거나 자신의 입맛대로 취사선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삼귀의 할 때는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순입니다.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으려거든 자신의 견해보다 가르침을 근거로 말해야 설득력 있습니다.
불자라면 경전에 근거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경전을 인용하여 말 했을 때 정견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의 견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견해는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름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법문과 대조해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D16) 한다고 했습니다. 가르침(Dhamma)과 계율(Vinaya)에 맞으면 가르침으로서 받아 들이면 됩니다. 우리나라에 빠알리 삼장이 번역 되어 유통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릅니다.
2017-11-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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