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전쟁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0. 20. 11:04


전쟁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

 

 

감각적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사이버세상에서도 눈길을 끄는 콘텐츠에 눈길이 머뭅니다. 대개 사진이나 동영상 등 감각을 자극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표현은 매우 짧습니다. 사진 한장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듯합니다.

 

긴 글은 그다지 인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경전을 근거로 한 이야기 등 교훈적인 내용은 쳐다 보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대신 매혹적이고 자극적이고 짜릿한 콘텐츠에 대중들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감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문학강좌 안내를 보았습니다. 정평불, 즉 정의평화불교연대에서 주관하는 문명의 지속과 불교의 지혜라는 대주제의 강좌입니다. 안내문에 따르면 정평불 6기 눈부처라 하여 11개의 강좌가 소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눈부처라는 말은 눈높이 부처를 말합니다. 마치 사섭법 동사(同事)에서 동등한 배려를 연상케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시대에 맞게 설명하자는 취지라 볼 수 있습니다.

 

정평불 불교인문학 강좌를 보면

 

정평불에서 주관하는 문명의 지속과 불교의 지혜강좌는 불교적 해법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강좌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0 19, 전쟁과 폭력의 증대와 평화의길, 이병욱 고려대 강사

2, 10 26, 문명의 지속과 사멸에 대한 불교적 성찰과 대안, 이도흠 한양대 교수

3, 11 2, 탐욕 극대화와 도덕성 위기 시대의 불교윤리, 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4, 11 9, 빈곤의 실상과 원인 그리고 대책, 장성우 동국대 강사

5, 11 16, 식량  음식문화의 위기와 채식사찰음식, 김현진 마지아카데미 대표

6, 11 23, 4 산업혁명과 문명의 지속 문제, 이도흠 한양대 교수

7, 11 30, 생명에 대한 간섭과 불교의 지혜, 유상호 한양대 교수

8, 12 7, 교육 문제의 불교적 해석과 대안, 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9, 12 14, 생태계 위기에 대한 불교적 대안,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10, 12 21, 사회적 소통의 위기와 불교적 대안, 유승무 중앙승가대 교수

11, 12 28, 문명의 지속과 정토구현의 -패러다임의 대전환과 깨달음의 사회화, 박경준 동국대 교수

 



 

대주제는 문명의 지속에 대한 것입니다. 전쟁이나 환경파괴 등 문명을 파괴하는 것들에 대한 불교적 해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강좌라 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불교인문학강좌라 볼 수 있는데 각분야의 전문가들이 어떤 해법을 제시할 것인지 매우 흥미롭습니다.

 

대학 캠퍼스에 와 보니

 

10 19일 열리는 1강에 참석했습니다. 장소는 한양대학교 인문관 311호실입니다. 오후 7시에 강좌가 시작 되기 때문에 명학역에서 4시 반에 전철을 탔습니다. 한양대역에 도착하니 막 어둠이 내려 앉고 있습니다. 지하철 출구를 나오자 마자 한양대 본관과 마주 하는 것이 색다른 풍경입니다. 지하철 출입구가 대학교 교정 바로 앞에 있는 곳은 아마 이곳뿐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대학 캠퍼스에 와 봤습니다. 주변을 보니 온통 젊은 사람들뿐입니다. 머리가 반백인 자가 서 있으니 마치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듭니다. 글로벌 시대이서일까 외국인 학생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역 근처 우동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니 금새 어두워 졌습니다. 인문관은 산 꼭대기에 있는 듯 합니다. 한양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마치 정상에 오르듯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마침에 정상에 서니 저 아래 세상이 펼쳐집니다. 도시의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의 교수가 있는데

 

1강은 이병욱 교수의 전쟁과 폭력의 증대와 평화의길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강사의 이름과 동명(同名)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과 이름이 똑같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름이 같아서 사람들이 헷갈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병욱 교수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봄 어느 비구비구니스님부터 개인카톡을 하나 받았습니다. 요즘은 카톡시대라 이곳 저곳 카톡방에 초대 받고 있습니다. 스님은 자료 잘 받았습니다라 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잘못 보내는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스님에게 동명임을 설명하고 이것도 인연인데 동명의 교수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과 몇 차례 통화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강좌를 통해서 동명의 교수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불교의 전쟁관에 대하여

 

한시간 강의에 사오십분 질의응답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배포된 유인물 내용을 보면 경전을 근거로 하여 불교의 평화관과 불교의 전쟁관을 설명하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관심 있게 본 것은 불교의 전쟁관입니다.

 

불교의 전쟁관은 어떤 것일까? 매우 궁금합니다. 이에 대하여 이병욱교수는 대살차니건자소설경을 근거로 불교의 전쟁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주를 보니 대정장 9, 338라 되어 있습니다. 일본 신수대장경에 실려 있는 대승경전입니다.

 

대살차니건자소설경을 보면 마치 병법서(兵法書)’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급적 전쟁을 피하는 방향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특히 방어적 개념에 대한 것입니다. 외교나 무력의 과시를 통해서 전쟁을 예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전쟁만은 피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급적 전쟁을 하지 않고 이기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러나 피치 못하게 전쟁을 해야 할 경우에는 이겨야 합니다. 경에 따르면 승리하기 위한 보병전술까지 소개 되어 있습니다. 상품의 병사를 전진 배치하여 두려움을 내지 않고 용감히 전쟁에 임해야 함을 말합니다.

 

전쟁하다 죽으면 지옥간다

 

불교와 전쟁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비의 종교에서 전쟁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승경전 대살차니건자소설경에서는 전쟁하는 방법까지 상세히 소개 되어 있지만 초기경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상윳따니까야 전사의 경(S42.3)’이 있습니다. 왕년에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촌장은 부처님에게 전쟁터에서 죽은 자는 전사자의 하늘이라는 천상에 태어나는지 물어 봅니다. 예전부터 그렇게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촌장이여, 전사가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운다면 그의 마음은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 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미 저열해졌고 불우해졌고 사악해졌습니다. 그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 자를 적들이 살해하여 죽인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지옥이 있는데 그곳에서 태어납니다.(S42.3, 전재성님역)

 

 

한마디로 전쟁하다 죽으면 지옥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뜻밖의 말을 들은 촌장은 몹시 당황해 합니다. 예로부터 전승되어 온 스승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전쟁터에서 죽으면 전사자들만이 간다는 천상에 태어난다고 알고 있었는데, 부처님이 긴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던진 말이 충격으로 다가 왔던 것입니다. 전쟁하다 죽은 자는 ‘지옥’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입니다.

 

증오심없이 전쟁할 수 없다

 

전쟁은 증오심 없이는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옆에서 전우가 쓰러져 갈 때 극도로 흥분하여 적을 살상하는 장면을 영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전쟁광(戰爭狂)들은 병사들에게 끊임없이 증오심을 부추깁니다. 병사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쟁광들의 희생양이 됩니다.

 

전쟁터에서는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적을 발견했을 때 먼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습니다. 전쟁터에서는 살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증오심에 가득 차서 살인을 하고 증오심으로 죽어갑니다. 이렇게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 자들이 전사의 천상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증오하는 마음에서 서로 죽이고 죽기 때문에 전쟁하다 죽으면 전사자의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 했습니다.

 

전사자의 경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보면 우리의 상식을 초월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불살생(不殺生)’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살생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불살생의 가르침은 전쟁터라고 해서 예외는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이 한몸 바치라라며 전쟁터로 향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어긋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전쟁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불자들은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가르침을 따르자니 국방의 의무를 할 수 없고, 국방의 의무를 따르자니 가르침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일까 신라시대 원광법사는 살생유택이라 살생도 가려서 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계율은 그때 당시 시대가 요청한 산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떤 경우라도 살생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전쟁없는 평화의 시대는 가능할까요?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분노

 

지구촌 곳곳에서는 끊임 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0세기에는 큰 전쟁이 전세계적으로 두 번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전쟁이라는 큰 전쟁이 일어나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수 많은 것들이 파괴 되었습니다.

 

전쟁은 파괴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분노도 파괴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분노를 하면 인간관계가 끊어집니다. 친구한테 화를 내면 다시는 만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객과 싸우면 다시는 오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나라를 책임 지고 있는 자가 분노했을 때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지도자가 잘못된 길로 가기 때문에 모두가 잘못된 길을 따르네. (A4.70) 라 했습니다.

 

칼이나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전쟁 없는 평화의 시대는 인간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소멸되어야 가능합니다. 개인이든 국가이든 이익을 취하려는 순간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싸움은 증오심 없이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증오심으로 싸우고, 증오심으로 전쟁을 하면 남는 것은 폐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쟁 없는 평화의 시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는 큰 바다에 이르기까지 폭력이 없고 약탈이 없고 가시덤불이 없는, 번영하고 풍요하고 안온하고 평온하고 위해가 없는 대륙을 다스리되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칼을 사용하지 않고 정법을 사용한다.”(D30)

 

 

디가니까야 위대한 사람의 특징의 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입니다. 칼이나 몽둥이 등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가르침으로 다스리는 세상이 전쟁 없는 평화의 시대임을 말합니다. 이렇게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에 대하여 담마위자야(Dhammavijaya)’라 합니다. 가르침의 승리 또는 가르침의 정복을 뜻합니다.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

 

담마위자야는 오로지 정법으로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기원전 3세기 전인도를통일한 아소까대왕은 담마위자야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말합니다. 아소까대왕은 이 세상을 불국토로 만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천명했습니다.

 

 

첫째, 온 세상을 전쟁없는 극락세계로 만들기 위해

둘째, 전쟁에 의한 정복이 아닌 담마에 의한 정복을 이루기 위해

셋째. 이웃나라와 서로 평화롭게 살기 위해

넷째, 세상의 평화는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아소까, 일아스님)

 

 

아소까대왕은 정복왕으로서 무력에 의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깔링가전투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후에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으로 목표를 바꾸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오로지 행복과 평화를 가져 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리랑카 역사서 디빠왕사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온전한 84,000가지의 가장 소중한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에 나는 매 가르침을 존경하여 한 가지의 가르침에 하나의 승원을 즉 84,000개의 승원을 세우겠다.”라고 발원한 것입니다.

 

전쟁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아소까대왕은 담마에 의한 정복을 추진하기 위하여 전세계에 담마사절단을 보냈습니다. 오늘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까지 파견했습니다. 이렇게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한 것은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전쟁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야 합니다.

 

아소까대왕은 8 4천개의 마을에 8 4천개의 승원을 짓고 곳곳에 바위칙령을 세우고 전세계로 담마사절단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바위칙령에  13호에 써 있는 것처럼 “담마에 의한 정복을 가장 훌륭한 정복이라고 생각한다.”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가져온다”라 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널리 널리 세계구석구석까지 빈틈 없이 퍼졌을 때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찾아 올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담마위자야(Dhammavijaya) 즉,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입니다.


 

2017-10-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