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나 자신이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 역류도(逆流道)의 삶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1. 3. 11:08


나 자신이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역류도(逆流道)의 삶에 대하여

 

 

나 자신을 변화하면 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박병기 교수가 한 말입니다. 박교수는 정의평화불교연대 눈부처학교세 번째 강좌에서 탐욕의 인류문명과 불교윤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습니다. 교원대학에서 윤리학을 가르치는 윤리학자 박병기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불교윤리에 대하여 강연 했습니다. 탐욕으로 이룩된 인류문명에 대하여 불교적 해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매주 목요일은 정평불 눈부처학교 강좌가 있는 날입니다. 한양대 인문관 311호실에서 저녁 7시에 시작됩니다. 이번에 참석함으로써 세 번째 입니다. 개근을 하고 있는 법우님들을 여럿 볼 수 있습니다. 11강좌가 있는데 끝나는 날은 12 28일 목요일입니다. 가급적 완주를 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로서 정리할까 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일상은

 

박병기교수는 강연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강의를 하는 것은 일상이라 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직업으로서 교단에 서는 사람들은 말을 잘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이년도 아니고 수십년 교단에 섰다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말을 조리 있게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실제로 박병기 교수는 달변입니다. 강연 내내 청중을 휘어 잡으며 끌어 가는 것이 남달랐습니다. 준비한 프린트가 14페이지에 달하지만 말로서 설명했습니다. 말하는 것을 잘 듣고 노트해 두었습니다.

 

아직까지 한번도 대중 앞에 서 본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직업과 관련 있을 것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입사해서 개발자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도 20년간 입니다. 전공에 맞게 회로설계를 하고, 회로설계한 것을 바탕으로 인쇄회로기판 설계를 합니다. 또 기판에 부품을 삽입하여 납땜하고 특성검토를 합니다. 시제품을 만들어 이상이 없으면 양산합니다. 이런 세월을 보내다 보니 사람들 앞에 설 기회가 없었습니다. 직장 생활 대부분을 기계 앞에서 보낸 것입니다.

 

개발자로서 셋톱박스를 20년간 개발 했습니다. 이후 12년은 일인사업자로서 삶을영위하고 있습니다. 인쇄회로기판설계(PCB)업입니다. 동시에 블로거로서 삶도 살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11년 동안 매일 글을 쓰고 있는데 이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선생이 교단에 서는 것이 일상이듯이, 블로거에게 있어서 일상은 글쓰기입니다.

 

중산층의 삶에 대하여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그날이 그날처럼 보입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같고, 내일이 어제 같은 삶입니다. 이런 말은 어법에 맞지 않지만 큰 변화없이 사는대로 살아 가는 자들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이런 삶에 대하여 박병기교수는  생각없이 살면 사는대로 산다.”라 했습니다. 특히 모든 것이 구족해 보이는 중산층의 삶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교사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박병기교수는 교사들의 연수에 강사로 자주 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사들은 매우 안정된 직장이라 합니다. 더구나 부부가 교사인 경우 재벌 부럽지 않은 삶을 산다고 합니다. 방학 때가 되면 해외로 여행가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고 모든 것이 풍족하여 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직업이 교사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사생활 사오년만 하면 눈빛이 달라지고 나태한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공무원들은 고용은 보장 되어 있고 은퇴후에는 연금이 보장 되어 있습니다. 공무원처럼 중산층의 삶을 사는 자일수록 삶의 의미를 잃은 채 끌려 가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사는 거다.”라든가, “살다보면 살아진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아무생각 없이 일상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하여 시원찮게 산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요?

 

욕망의 바벨탑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불과 삼사십년만 하여도 현재와 같은 풍요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시골에 살 때 호롱불 키고 살았습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원시시대를 산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렇게 밤에도 대낮 같은 삶을 살게 된 것은 화석연료를 사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화석연료도 언젠가는 바닥이 나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미래 자원이 고갈되든 말든 흥청망청 소비하며 즐기며 살아갑니다. 이런 풍요에서일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자원은 점차 고갈되어가며 환경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자원이 고갈되어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 전쟁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더구나 지구를 여러 번 파괴하고도 남을 핵폭탄으로 인하여 인류가 전멸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한세대가 지나면 과연 인류가 생존가능할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경이를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인류가 이룩해 놓은 문명에 대하여 경이롭게 생각합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 하늘을 날아 다니는 거대한 비행기, 길고 긴 다리와 터널 등을 보면 작고 보잘것   없는 인간이 만든 것들입니다. 그런데 모든 물질문명은 사실상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좀더 편리하게, 좀더 빠르게, 좀더 안락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정신문명도 동시에 발전한 것이 아닙니다.

 



 

과학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화려한 물질문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물질문명은 욕망의 바벨탑이기 쉽습니다. 욕망이 투영된 물질문명은 자본주의로 정착되었습니다. 물질문명이 발전되면 될수록 자본주의 역시 더욱 더 강화 되어 마침내 1%가 대부분을 가져 가는 1 99사회가 되었습니다. 만약 자본주의의 폭주를 막지 못하면 인공지능으로 대표 되는 4차 산업혁명시대가 되면 0.1% 99.9%의 세상이 될 것이라 합니다. 미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정반대로 디스토피아가 될 것입니다. 욕망의 바벨탑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불교에 해법이 있다!

 

물질문명은 발달했지만 정신문명은 이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종교나 사상은 더 이상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미래학자들은 동양의 종교와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80년대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프리쵸프 카프라는 동양사상이 미래의 패러다임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구동성으로 동서양의 석학들 역시 21세기에는 불교가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라 합니다. 이제까지 수 많은 사상과 종교가 출현 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장 큰 기대를 건다는 것입니다.

 

탐욕으로 이루어진 물질문명 사회는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와 같습니다. 내버려 두면 자멸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마구 달리는 탐욕의 기관차를 멈추게 하려면 지금까지 방식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철학이나 사상, 종교도 답이 되지 않습니다. 불교만이 유일한 대안처럼 보여집니다. 그래서일까 박병기 교수는 철학으로서 불교의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이에 대하여 일상으로부터 거리두기  멈춤()과 통찰()수행으로 세계관을 재구성하자는 것입니다.

 

불교가 21세기의 대안이 될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대안이 없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윤리에 대한 것입니다. 이 시대 최고의 윤리학자라 불리우는 피터싱어는 선호공리주의제창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남에게 피해주면 안된다.’라는 소극적 원칙이 아니라 이익동등고려의 원칙에 따른 적극적 원칙을 말합니다.

 

피터 싱어에 대하여 위키백과에서는 실용 윤리의 전문가이며 선호 공리주의와 무신론의 관점을 가지고 윤리적 문제에 접근한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최대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는 자본주의 논리를 윤리화 한 것이라 하는데,   피터 싱어의 선호 공리주의는 좀 더 보완된 것이고 좀더 진보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1 99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점차 자본주의가 강화 되는 시점에서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해법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상으로부터 거리두기와 멈춤과 통찰수행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으로서 불교

 

박병기교수는 현재사회와 미래사회의 대안으로서 불교철학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멀리 떠나 몸과 마음을 충전하여 더욱 더 열심히 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미친 듯이 달려 갈 것이 아니라 옆도 볼 줄 알고 멈추어서 뒤도 돌아 볼 줄 알아야 함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가 멈춘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폭주하는 듯한 앙굴리말라에게 “앙굴리말라여,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M86)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앙굴리말라여,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M86)라며 폭력을 멈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폭력대신 욕망이나 분노등을 넣어도 됩니다. 그런데 멈추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벽만 바라보고 앉아 있는 자에게 자신이 이전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가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멈추면 보입니다. 이것이 사마타입니다. 또 멈추어서 관찰하면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위빠사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멈춤과 통찰을 말씀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수행입니다.

 

수행은 먼저 그 자리에서 멈추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일을 위한 충전이라기 보다 욕망을 내려 놓기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욕망으로 이루어진 욕계를 탈출하려면 욕망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멈추고 통찰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일상으로부터 거리두기와 멈춤과 통찰수행이 일상에 파고 들었을 때 인류의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박병기교수는 철학으로서 불교라 했습니다.

 

종교로서 불교

 

철학으로서 불교가 있다면 종교로서 불교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업의 과보로 설명되고 더 나아가 내세윤회의 가르침으로도 설명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종교로서 불교를 말합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업의 가르침이 대부분입니다. 외도와 논쟁을 하여 연기법으로 논파하는데 바탕에는 행위와 행위에 대한 과보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이다.(M135)라 했고, “수행승들이여,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도 “착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사람이 업을 지으면, 어떠한 업을 짓든 간에, 그는 그 상속자이다.”(Thag.144)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업의 가르침을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 : kammassakata-sammādiṭṭhi”’이라 합니다.

 

업자성정견을 세간적 정견이라 합니다. 반면에 멈춤과 통찰에 따라 욕계를 벗어나기 위한 수행은 출세간적 정견에 해당될 것입니다. 출세간적 정견은 철학의 범주로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것은 내세와 윤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세간적 정견에 대한 것으로 종교로서 불교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정견이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도 말씀 하신 것입니다. 맛지마니까야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견해는 어떤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가 있고,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가 있다.(M117)

 

 

두 가지 정견이 있는데 하나는 번뇌가 있지만 공덕행을 하는 정견이 있고, 또 하나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정견이 있음을 말합니다. 전자는 업자성이 정견이라는 세간적 정견이고, 후자는 사성제를 아는 것이 정견이라는 출세간적 정견을 말합니다.

 

세간을 살아 가는 자들에게는 세간적 정견이라 일컬어지는 업자성정견이 요청됩니다. 그것은 보시를 하면 과보가 따른다는 등의 ‘공덕행’으로 요약됩니다. 일반적으로 보시하고 지계하면 생천(生天)한다고 말합니다. 비록 세세생생 윤회하는 삶을 살지만 가급적 선업공덕을 짓고자 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것이 종교로서 불교에 해당되는 내용이라 봅니다.

 

역류도(逆流道: paisotagāmī)

 

욕망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욕망의 바벨탑을 쌓을 것입니다. 욕계의 중생은 욕망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전법하는 것을 포기하려 한 것도 욕망과 정반대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흐름을 거슬로 올라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를 어둠에 덮이고 탐욕에 불붙은 자들은 보지 못하네.”(S6.1)라 하여 전법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게송에서 흐름을 거슬로 올라가는라는 말은 역류(逆流)’를 말합니다. 욕계에서는 모두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욕망에 역행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역류도(逆流道: paisotagāmī)’라 합니다.

 

물질문명이 극대화되면 될수록 인류는 위기를 느낍니다. 한정된 자원을 마구 써 버렸을 때 후대에 남겨 줄 유산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금 살아 있을 때 최대한 즐기는 살고자 합니다. 그 결과 자연은 파괴되고 자원은 고갈되고 환경은 자꾸만 오염되어 갑니다. 이제 여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 멈추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서양의 성장일변도의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는 바이블 창세기에 실려 있는 더 생육하고 번식하라! 땅을 차지하라! 다스리라!” 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바이블 창세기에 따르면 인구가 많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인구가 폭발해서 발디딜 틈 없이 늘어난다고 해도 창세기 명령대로라면 인구는 계속 늘어나야 합니다. 인구가 늘어난 만큼 자연은 파괴되고 자원은 고갈됩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땅을 차지하라! 다스리라!”라 하여 성장과 소비를 부추기는 듯 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욕망을 부추기는 삶입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식의 패러다임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대안으로서 식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주목한 것입니다. 그것은 역류도의 삶입니다.

 

행위에 대한 두려움을 알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철학적 범주에 넣는다면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근본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멈춤과 통찰이라는 명상수행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나 선근공덕이 있는 소수에 해당된다고 봅니다. 대다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의 소극적 삶을 살아 갑니다. 명상수행과 같은 적극적 삶의 방식을 살아 가는 사람들은 드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라는 업자성정견이라는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행위에 대한 과보의 가르침입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습니다. 설령 이 생에서 못받는다해도 다음생에서 받습니다. 다음생에서 못받으면 후생에서 받습니다. 한번 지은 행위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행위에 대한 두려움을 알면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명상수행을 통하여 세계관을 재구성할 수도 있지만 업의 가르침으로도 가능합니다. 출세간적 정견과 세간적 정견, 그리고 철학으로서의 불교와 종교로서의 불교 모두 자신과 주변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나 자신이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라는 사실입니다.

 

 

 

2017-11-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