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날란다 유적에서 무상(無常)을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 31. 15:42


날란다 유적에서 무상(無常)

(인도성지순례 13)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 합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주로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사진으로 또는 동영상으로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서울이야기를 했을 때 온갖 상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가서 봄만 못합니다. 보는 순간 다 알게 됩니다. 성지순례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정보의 홍수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정보통신과 인터넷시대에 온갖 정보를 접합니다. 요즘 TV에서는 먹방(먹거리 방송)’이 대세입니다. 공중파이건 케이블이건 온통 먹는 이야기입니다. 한상 거하게 차린 밥상에서 황제처럼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림의 떡입니다. 출연자들은 맛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표정을 짓습니다. 또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최고라 합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 입장에서 맛을 알 수 없습니다. 먹어 봐야 맛을 알 수 있습니다. 성지순례도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수 없이 인도성지에 대한 글과 사진과 동영상을 접했습니다. 그러나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여섯 감각기관 중에 오로지 눈으로만 때로 귀로만 접한 것입니다. 현지에 가 보아야 오감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먹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날란다(Nalanda) 가는 길

 

동방의 순례자들은 날란다로 향했습니다. 신왕사성터에 있던 벨루바나에서 라자가하로 이동한 것입니다. 그런데 금방 도착했습니다. 지도를 보지 않으면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더구나 평지에서는 어디가 동쪽인지 서쪽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럴 때는 지도를 보아야 합니다.

 

 


 

벨루바나(죽림정사)에서 날란다까지는 약 6키로미터의 거리로 15분 가량 걸립니다. 라즈기르 시내를 벗어나서 평원을 달렸습니다. 어느 인도 시골풍경과 다르지 않습니다. 대체로 빈궁하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주가 비하르주라 하는데 이를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입장료 차이가 13


날란다에 도착했습니다. 지금은 대학터만 남은 곳입니다. 그럼에도 옛날의 영화를 생각해서 날란다대학이라 합니다. 날란다대학 입구에는 관광지답게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즐비합니다. 그리고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을 팔려는 행상들이 달라 붙습니다.

 

 





 



 

날란다대학 정문은 초라합니다. 차한대가 들어갈 정도로 작은 문입니다. 표지판을 보니 ‘RUINS OF NALANDA’라 쓰여 있습니다. 날란다유적이라는 뜻입니다. 표지판을 자세히 보니 인도인들에게는 입장료가 15루피이고 외국인은 200루피입니다. 무려 13배 차이가 납니다. 15세 이하의 어린이는 무료입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 30분까지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먹는 물과 화장실 이용은 공짜입니다.

 

붉은 벽돌로 된 유적지

 

허름한 출입문을 지나 원담스님과 진주선원순례팀은 어느 성지에서와 마찬가지로 흰색가사를 수했습니다. 성지에 들어갈 때 마다 수하니 이제 자연스러워 진 것 같습니다. 햇볕을 염려하여 양산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건기는 우리나라 봄날씨와 같아서 따갑지 않습니다. 혹서기 때는 양산이 필수일 것입니다. 양산이 필요 없을 정도로 공기가 상쾌했습니다.

 

정문을 지나 들어가자 마자 벽돌로 된 유적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드넓은 평원에 이곳 저곳 붉은 벽돌무더기의 유적지가 흩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광활한 대학캠퍼스를 연상케 합니다.

 



 



 

 

진입로에는 야자수가 열지어 서 있습니다. 굵은 기둥의 야자수가 하늘로 치솟아 꼭대기에서 잎사귀가 사방으로 갈라지는 모양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낙락장송이 품격 있듯이, 인도에서는 호텔이나 관공서 등 공공장소에서 쭉 뻗은 야자수를 볼 수 있습니다.

 

날란다유적지에 들어가려면 벽돌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마치 벽돌로 된 성을 연상케 하는 문을 통과하면 긴 회랑이 나타납니다. 그 옛날 이곳이 출입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터널을 빠져 나오듯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날란다대학입니다. 지금은 폐허로서 유적만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대학이었습니다.

 

 








 

날란다는 인도 비하르 주에 있는 고대대학입니다. 마가다국의 신왕사성이 있었던 벨루바나에서 서쪽으로 6키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서기 427년부터 1197년까지 770년간 존속했던 세계 역사상 최초의 최고의 대학입니다.

 

현장스님이 도착했을 때

 

불교학의 중심지 날란다는 승려들에게는 꿈의 대학이었습니다. 현장스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당서역기를 지은 바 있는 현장스님(602664)은 인도를 향했습니다. 목적지는 날란다대학입니다. 천산북로를 이용하여 3년 동안 걸어 날란다에 도착했습니다. 목숨을 건 구법(求法)여행이었습니다.

 

날란다는 현장스님의 기록으로 인하여 발굴 되었습니다. 이슬람의 침략으로 정글에 묻혀 잊혀져 있다가 현장스님이 쓴 대당서역기를 근거로 하여 찾아 냈기 때문입니다. 1861년 커닝햄 등 발굴단이 대당서역기의 세밀하고도 명확한 기록에 근거하여 발굴해 낸 것입니다.

 

현장스님이 날란다에 도착한 것은 631년입니다. 그 때 날란다는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당서 속고승전에 따르면 외도 이단자와 방계지파, 속세의 사람들까지 통틀어, 정파와 사파들의 인원수가 1만명을 넘었다.”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날란다 대학이 비록 불교의 학술중심지이긴 하지만, 극도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여 그때 당시 인도고대학문이라면 없는 것이 없을 정도이었습니다.

 

현장스님이 도착했을 때 날란다의 승려수는 4,000명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유학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중국승려가 많았는데 기록에 남아 있는 승려는 의정, 혜륜, 지홍, 무행, 도희, 도생, 대승등 과 같은 인물입니다. 신라에서도 혜초스님이 이곳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승려들의 숫자는 훨씬 더 많았습니다.

 

날란다에는 중국출신 승려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사원 중에 한군데에 중국인들만을 위한 절 한사(漢寺)가 있을 정도이었었다고 합니다. 이는 돈황에서 출토된 서천로진(西天路盡)이라는 고대사본이 출토 되었는데 그 책에 사원 동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한사가 있다. 한나라 출신 승려들이 여기에 거처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현장스님 구법(求法)여행 동기는?

 

현장스님 이전에도 200년 앞서서 법현스님도 날란다를 찾았습니다. 그렇다면 현장스님이 구법여행을 한 동기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하나의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중국에서 제작한 현장대사’ 3부작 동영상입니다. 이에 대하여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손에, 대당서역기와 현장대사(玄奘大師)(2013-06-2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현장스님이 구법여행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제작한 현장대사에따르면 그는 수 많은 불경을 섭렵하였다. 그리고 불법의 대의를 알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퍼즐 맞추기외 같은 문제에 봉착하였다. ‘현장법사전기’에 따르면 “어떤 경전은 내용이 누락 되어 있고, 번역 또한 혼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부정확하다. 어느 누구도 불교의 정수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보통사람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수행으로 성불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장스님은 구마라집 등이 번역한 수 많은 경전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초기불교초기부터 대승불교까지 동시에 들어 온 불교는 그때 당시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었을 것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 인도로 떠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선진국으로 유학 떠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

 

현장스님은 구법여행을 하면서 많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것이 대당서역기입니다. 소설 손오공의 모티브가 된 책입니다. 그런데 구전으로 전해진 것도 많습니다. 현장스님이 귀국하여 제자들에게 들려 준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이를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고 후대에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대자은삼장법사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 합니다. 기록해 놓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일도 잊혀집니다. 현장스님이 서역에서 고창국왕 국문태와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제자들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면 잊혀 졌을 것입니다.

 

대당서역기에는 없지만 대자은삼장법사전에 남아 있는 국왕 국문태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현장스님이 법문을 할 때 국왕 국문태가 등받이가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법상에 올라 갈 때 공손히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자신의 등을 딛고 올라앉게 한 것입니다. 현장스님에 대한 극진한 최상의 예를 갖춘 것입니다. 현장스님이 인도 날란다에서 만난 계현법사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현장스님 스승 계현법사(Silabhadra)


현장스님은 날란다에서 계현법사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계현법사는 산스크리트어로 실라바드라(Silabhadra)라 합니다. 그때 당시 날란다 사원의 주지를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나라 시절 속고승전에 따르면 그때 당시 계현법사 나이는 106였다고 합니다. 현장스님이 계현법사에게 배운 것은 유가사지론이라 합니다.

 

현장스님은 날란다 사원 주지 계현법사를 알현했습니다. 이 장면에 대하여 현장 서유기에 따르면 땅바닥에 완전히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양 팔꿈치와 무릎만으로 스승 앞에 기어가서 계현법사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인사방식은 최고의 존경을 뜻하는 인도의 방식입니다.

 

초기경전에서도 부처님에게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였다.”라든가 오른쪽 무릎을 땅에 꾾은 채 세존께서 계신 곳을 향해 합장하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현장스님은 계현법사에게 최상의 예를 갖추며 날란다 대학에서 5년간 수학했습니다.

 

최전성기의 날란다

 

현장스님의 기록에 따르면 날란다의 사원경영관리 수준은 매우 높았습니다. 사찰안의 강좌수가 매일 100여개 씩 열렸다고 합니다. 전성기 때 만명의 학생과 이천명의 선생들이 살았던 날란다는 사원이 50군데 였다고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의 대학도시였습니다. 방대하고 웅장했던 날란다는 남아 있는 유적으로도 확인 됩니다.

 



 

3년 동안 구법을 목적으로 걸어 현장스님은 날란다에서 5년을 공부했습니다. 주로 대승에 대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주로 유가지사론을 공부했습니다. 그런 날란다는 으뜸 가는 불경의 소재지였습니다. 오늘날 종합도서관 같은 곳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대학이든지 중심지는 중앙도서관입니다. 날란다에도 중앙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이를 다르마 군즈(Dharma Gunj: Mountain of Truth, 진리의 산) 또는 다르마 간자(Dharmagañja :Treasury of Truth, 진리의 보물)라 합니다.

 

중앙도서관에는 수백만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도서관은 9층 높이로 세 개의 빌딩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를 라뜨나사가(Ratnasagara : Sea of Jewels)와 라뜨노다디Ratnodadhi : Ocean of Jewel)라 부릅니다.

 

도서관과 관련하여 첸원중의 현장서유기에서는 세 군데 장경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전당은 보채(寶彩), 두 번째 전당은 보해(寶海), 세 번째 전당은 보해(寶洋)이라 합니다. 이들 세 전당 안은 한 없이 너른 바다처럼 진귀한 불법의 보배로 가득 찬 곳임을 말합니다. 최전성기의 날란다는 마치 보드가야 대탑처럼 대지의 우뚝 솟아 있었을 것입니다.

 



 

 

날란다를 파괴한 박크티야르 킬지(Bakhtiyar Khilji)  

 

진리의 산, 진리의 바다라 불리우는 중앙도서관은 불에 타 버렸습니다. 오늘날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날란다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유적지를 보면 규모를 짐작하게 합니다. 마우리아 왕조 아소까대왕 시절에 건립되어 굽타시대에 전성기를 맞은 날란다 대학은 이슬람의 침략으로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래서일까 가이드 샌디는 유적지를 설명할 때 한국말로 이슬람놈들이라 합니다.

 

한때 휘황찬란했던 날란다 사원이 파괴된 것은 1193년입니다. 고르왕조(Ghor: 1186-1206)박크티야르 킬지(Bakhtiyar Khilji)’에 의해서입니다. 아프간 고원의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입니다. 이슬람 가즈니왕조(962-1187)를 뒤이어 인도에 들어 왔습니다.

 

모하메드 고리라고도 불리우는 박크티야르 킬지는 우상숭배자들에게 이슬람교를 전파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성전을 포고한 후 북인도를 평정했습니다. 고르왕조로 인하여 인도에서 이슬람정권수립의 기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세력은 날란다 사원을 공격했습니다. 마치 사원을 군대처럼 공격한 것입니다. 그들은 현지에서 대량학살을 감행했습니다. 삭발한 자를 포함하여 현지주민 대다수를 죽였습니다. 또한 무수한 진귀한 불교경전들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특히 중앙도서관은 수 개월 동안 불에 탔다고 합니다.

 




날란다 사원 등 몇 개 거점 사원이 이슬람 침략으로 파괴됨에 따라 인도에서 불교는 사라졌습니다. 그 사이에 인도에서 불교는 자취를 감추고 잊혀 졌습니다. 그렇게 수 세기가 흘렀습니다.

 

날란다대학이 파괴되고 난 후 6백년 후에 발굴이 시작 되었습니다. 현장스님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현재 발굴된 것을 보면 승원이 11동이고 사원이 5동입니다. 이외 거대한 탑과 많은 부도들로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총면적은 가로 11킬로미터, 세로 5킬로미터 넓이에 달합니다.

 

불상이 기적처럼 남아 있는 곳에서

 

순례팀은 거대한 중앙도서관 유적지를 돌아서 막다른 곳에 이르렀습니다. 옆에는 커다란 보리수가 있어서 오후 햇볕을 막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앞에는 불상이 있습니다. 유적지에 남아 있는 불상입니다. 이슬람의 침입으로 인하여 모든 불상이 파괴 되었지만 순례팀이 마주한 유적에는 불상이 기적처럼 남아 있습니다.

 

 



 

빠알리 예경을 했습니다. 그리고 날란다와 관련있는 초기경전을 독송했습니다. 그것은 상윳따니까야 도시의 경(S12.65)’입니다. 도시의 경은 어떤 사람이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다면” (S12.65)으로 시작됩니다. 주석에 따르면 라자가하 근교에 있는 날란다가 옛 도시로 묘사된 것이라 합니다.

 




초기경전에서 보는 날란다

 

날란다는 부처님 당시에도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디가니까야 께밧따의 경(D11)’에 따르면 장자의 아들 께밧따는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이 날란다 시는 번영하고 부유하고 인구가 많고 사람이 붐비고 세존께 깊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D11)라 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 날란다의 경(S35.126)’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날란다 시의 빠바리깜바 숲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날란다의 장자 우빨리가 부처님 계신 곳으로 와서 어떤 뭇삶들은 세상에서 현세에 완전한 열반에 들지 못하는데, 그것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을 조건으로 합니까?” (S35.126)라며 물어 봅니다. 이에 부처님은 시각과 청각 등 여섯 가지 감각적 욕망으로 인하여 현세에 완전한 열반에 들지 못한다고 설명해 줍니다.

 

상윳따니까야에 또 하나의 날란다의 경(S47.12)’이 있습니다. 사리뿟따존자가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에 대해 이와 같이 수행자나 성직자 가운데 올바른 깨달음에 관하여 세존보다도 탁월하고 더욱 초월적인 지혜를 가진 다른 자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고 지금도 없다.’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S47.12)라며 부처님을 찬탄합니다. 그런 날란다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가정이 패망하는 여덟 가지 이유

 

날란다와 관련하여 상윳따니까야에 가정의 경(S42.9)’이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그때 날란다 시에는 기근이 들어 식량을 구하기 어렵고 곡식은 백도열병에 걸려 지푸라기로 변해 버렸다.” (S42.9)라고 묘사 되어 있습니다. 인구가 많고 번영하던 날란다에 흉년이 든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수행승의 무리들과 탁발을 하는 부처님을 자이나교도 교주인 니간타가 비난했습니다.

 

니간타는 부처님이 재가의 가정을 단절시키기 위해 유행하고 재가의 가정을 불행하게 하여 파멸시키기 위해 유행한다고 모함했습니다. 장자의 이런 질문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떠한 가정이라도 예전에 요리된 음식을 단지 보시한다고 해서 피해를 본 것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한 가문들은 부유하고 재산이 많고 보물이 많고 곡물이 많게 되었습니다. 그들 모든 것들은 보시에서 생겨났고 진실에서 생겨났고 자제에서 생겨났습니다.” (S42.9)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을 때 유행하면 민폐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먹을 것을 보시한다고 하여 가정이 망하거나 파멸되지는 않습니다. 불교와 대척점에 있었던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 나타뿟따의 모함에 대하여 부처님은 오히려 보시하면 더 부유해질 것이라 말합니다. 부유한 가문들은 보시공덕으로 잘 살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가정이 패망하는 데는 여덟 가지 이유가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촌장이여, 가정이 패망하는 데는 여덟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정은 국왕 때문에 패망합니다. 가정은 도적 때문에 패망합니다. 가정은 불 때문에 패망합니다. 가정은 물 때문에 패망합니다. 혹은 감추어진 것을 얻지 못하거나 나태하여 일을 포기한다든가 가정에 그들 재보를 흩어지게 하고 파괴하고 낭비해 버리는 쓰레기가 생겨난다든가 마지막 여덟 번째로 무상하다는 사실 때문에 패망합니다.” (S42.9)

 

 

가정이 망하는 이유가 기근 때 유행승들에게 보시해서 망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가정이 망하는 이유가 도적, 게으름 등 여덟 가지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특히 여덟 번째 무상하다는 사실 때문에 패망합니다.”라 했습니다. 이는 어느 가정이든지 단체이든지 나라이든지 망할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번영을 누리던 날란다 대학도 망했습니다. 이교도의 침략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법이 변질되고 훼손되어서 망한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날란다대학의 영고성쇠를 보면 가정의 경에서와 같이 어느 것 하나 무상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고성쇠의 유적지에서

 

순례자들은 도시의 경을 함께 독송한 후에 10분간 입정에 들어 갔습니다. 거대한 보리수가 햇볕을 막아 주어 그늘을 제공했습니다. 바람이 얼굴에 스쳤지만 부드러웠습니다. 모두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했습니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영고성쇠의 유적지에서 느낌을 이렇게 적어 보았습니다.

 

 

이 상쾌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봄 날씨 같은 따스함,

온통 초록의 대지;

그리고 살랑이는 바람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담마의 향기,

부처님의 향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곳에 현장스님도

혜초스님도 있었습니다.

이름모를 수 많은

수행승들이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날란다는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폐허만 남았습니다.

잊혀진 고대도시에

순례자들이 찾아 왔습니다.

폐허속의 도시를 다시 세우려는 것처럼.

 

잠시 입정에 들었습니다.

보리수 잎파리가 바람에

차르르하며 시원한 소리를 냅니다.

담마의 향기는 시공을 초월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어느 교차점에

번영하던 고대도시가 있었습니다.

올바로 깨달은 님들이

거닐었던 옛성과 옛거리입니다.

 

폐허의 도시를 순례자들이 찾아 옵니다.

마치 이전에 이곳에서 살았던 것처럼.”

 

 





이전에 이곳에서 살았던 것처럼

 

오후의 날란다는 한가하고 여유롭습니다. 붉은 가사의 티벳승려들은 유적지 잔디 밭에 삼삼오오 앉아 감미로운 바람과 따스한 햇살을 즐깁니다. 어떤 이는 그 옛날 거기에서 살았던 것처럼 사원터에서 승방터에서 명상합니다.

 









승방터를 지나다 벽돌을 만져 보았습니다. 그 때 당시 벽돌이 수 천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한켠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는 돌유적이 방치 되어 있습니다.

 

 










날란다는 계속 발굴 중에 있습니다. 너른 터 이곳 저곳에 붉은 벽돌 유적지가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거대한 보리수와 인도에서만 볼 수 있는 나무들은 겨울철임에도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공적인 것들은 무상하여 무너지고 파괴되지만, 생명이 있는 것들은 거꾸로 성장해 갑니다.

 



 





 

현장스님이 방문했을 때 날란다는 번영을 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밀교로 옷을 바꾸어 입고 난 후에 이슬람의 침략으로 초토화 되었습니다. 폐허 위에 날란다는 이제 불교도들의 성지순례 코스가 되었습니다.

 

날란다 유적에서 무상(無常)

 

날란다 유적에서 무상을 봅니다. 어느 것 하나 영원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오늘의 번영도 영원히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언젠가 날란다처럼 폐허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역시 영원히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초기경전에 과거칠불이야기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과거부처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연기법으로 깨닫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행적이 동일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정법이 오래 가지 않음을 말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법은 변질 되고 훼손 되어서 결국 사라지고 말 것임을 말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불교는 발전해 가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불교는 퇴보의 역사입니다. 부처님 재세시가 정점이었습니다. 이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질되고 훼손되었습니다. 나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부처가 출현할 때까지 아득한 세월 동안 암흑시대가 될 것입니다.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정법도 변질되어 사라집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법시대입니다. 빠알리경전이 전승되어 내려오고, 팔정도의 수행이 있고,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에서 성자가 출현한다면 정법시대로 보는 것입니다.

 




날란다에서 무상을 보았습니다. 영원히 번영할 것 같았던 날란다도 이교도의 출현에 따라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번영의 현장과 비극의 현장이 날란다입니다. 날란다는 순례자들에게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2018-01-3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