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그 많던 사리는 다 어디 갔을까? 베살리 릿차비스투파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8. 2. 2. 15:08


그 많던 사리는 다 어디 갔을까? 베살리 릿차비스투파에서

(인도성지순례 14)

 

 

날란다 유적지 순례를 마치고 베살리를 향해 떠났습니다. 날란다에서 베살리 까지는 110키로미터 거리로 자동차로 3시간 가량 걸립니다. 지도를 보니 베살리는 파트나를 지나 갠지스강 건너에 있습니다. 초기경전에는 베살리라 하지만 현재 지명은 바이샬리(Vaishali)입니다.

 

 



 

지평선 위에 해가 서서히 지고

 

늦은 오후 베살리를 향해 전세버스가 달렸습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끝없는 인도평원입니다. 인도인구가 13억명이라 하지만 차창 밖에는 너른 들판만 보입니다. 사시사철 푸른 인도에서 1월 초에 노랑 유채꽃이 피었습니다. 지평선 위에는 해가 서서히 지고 있습니다. 한가롭고 평화롭고 풍요로운 대지입니다.

 









 

도중에 파트나(Patna)를 지났습니다. 파트나는 180만명으로 대도시입니다. 갠지스 남쪽 제방에 있는데, 비하르 주에서는 가장 현대화 된 도시라 볼 수 있습니다. 파트나는 마가다국의 수도이었습니다. 마가다국의 수도는 기립바자라 불리우는 산곡성에서부터 시작하여, 산곡을 나와 평야지대에 자리 잡은 신왕사성이 있었습니다. 파트나는 아자타삿투 왕이 세운 도시로서 마가다국 말기의 수도였습니다.

 

파트나는 마우리야 왕조의 수도이기도 했습니다.아소까 대왕 당시에 제3차 결집(기원전 251)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4세기에는 굽타왕조의 수도였습니다. 굽타왕조의 쇠퇴에 따라 7세기에 황폐해졌습니다.

 

바다 같이 넓은 갠지스 강을 건너 어둑할 무렵 바이샬리 프레지던시(Presidency)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바이샬리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라 합니다. 늦게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하는데 자주 정전이 되었습니다. 전기 사정이 좋지 않은 낙후된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샤워를 하려 하는데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대로 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이샬리는 부처님 당시 가장 번영하던 도시였습니다.

 

풍요로웠던 베살리에 기근이

 

바이샬리는 초기경전에서 베살리라 불립니다. 베살리는 릿차비(Licchavi)족의 수도였습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시고 난 후 15년 후에 방문해서 안거를 난 도시입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주석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법구경 290번과 관련된 인연담 갠지스강 오르기 이야기(Gangārohanavavatthu)’가 있습니다. 인연담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한때 베쌀리 시는 번영하고 풍요하고 사람이 많고 거리는 활기찼고 돌아가며 지배하는 칠천칠백명의 왕족들이 살았다. 그런데 기근의 결과로 먼저 가난한 주민들이 죽었고 시체들이 여기저기 버려지자 악취가 수많은 악령들을 불렀다. 악령의 영향을 받아 수많은 주민들이 또한 죽었다. 또한 시체의 악취가 지독해서 주민들은 질병에 걸렸다.”(DhpA.III.436-449)

 

 

풍요로웠던 베살리에 기근이 들고 역병이 생긴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릿차비 사람들은 법다운 왕의 통치가 부재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왕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릿차비족 사람들은 의례와 의식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으나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방법은 단 한가지가 있었습니다. 마가다국 벨루바나에 머물고 있던 부처님을 초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갠지스강을 건넜을 때

 

릿차비 사람들은 마가다국왕 빔비사라에게 요청했습니다. 빔비사라왕은 흔쾌히 수락하고 바다와 같이 넓은 갠지스 강을 잘 건너 가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인연담에서는 빔바싸라 왕이 손수 갠지스 강까지 마중나와 부처님 일행을 배에 태워 보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갠지스강이 마가다와 릿차비의 국경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갠지스강을 건너 베살리 땅을 밟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른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진 것입니다. 폭우로 인하여 모든 시체들이 갠지스강으로 떠 내려가서 모든 지역이 깨끗하고 청정해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귀신들은 사방으로 도망쳤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숫따니빠따 보배의 경(Ratana sutta, Sn2.1)인연담에도 실려 있습니다.

 

부처님은 베살리에서 보배경을 설했습니다. 오늘날 보배경은 남방 테라와다불교의 예불문이자 수호경입니다. 보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이 두 개의 게송이 그때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 모여든 모든 존재들은

지상에 있는 것이건 공중에 있는 것이건,

그 모든 존재들은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고 내 말을 들으십시오.”(Stn.222)

 

모든 존재들은 귀를 기울이십시오.

밤낮으로 제물을 바치는

인간의 자손들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방일하지 말고 그들을 수호하십시오.” (Stn.223)

 

 

부처님은 릿차비사람들 뿐만 아니라 하늘사람들과 귀신들 모두에게 보배경을 설했습니다. 마치 법화경에서 영산회상을 연상케 합니다. 보배경은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한 예경과 찬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릿차비 사리탑으로

 

인도성지순례 5일차 되는 날 2018 1 4일 일정은 릿차비사리탑과 대림정사 순례하는 날입니다. 먼저 릿차비사리탑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사리탑이나 탑묘나 스투파는 같은 용어입니다.

 

호텔에서 사리탑이 있었던 스투파까지 거리는 차로 5분 이내입니다. 위성지도를 보니 호텔도 들판 가운데 있고 사리탑 터도 들판 가운데 있습니다.

 

 



 

 

릿차비족이 만들었다는 스투파는 오늘날 ‘Buddha Reclic Stupa’라 불립니다. 부처님 사리가 모셔져 있던 탑이 있었던 곳입니다. 원담스님과 진주선원 불자들로 이루어진 순례팀은 이른 아침 호텔을 나서 스투파로 향했습니다.

 











너무 일찍 와서일까 스투파에는 우리 일행 이외 다른 순례자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적하고 너른 지역에 자리한 곳은 공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둥근 돔 모양의 지붕이 있는 곳을 향하여 백미터 이상 걸어 갔습니다.

 


흔적만 남은 사리탑

 

스투파는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중앙에 네모난 모양과 주변의 벽돌만 남아 있을뿐입니다. 릿차비스투파와 관련하여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난 다음 사리를 수습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열반후 사리를 모셨을 때는 여법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마하빠리닙바나경에 따르면, 릿차비족들은 세존께서도 왕족이고 우리도 왕족입니다. 우리도 세존의 사리를 분배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도 세존의 사리를 보존하기 위해 큰 탑묘를 세울 것입니다.”(D16)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그때 당시 가장 강성했던 마가다 국왕 아자따삿투가 먼저 똑같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싸끼야족들도, 불리족들도, 꼴리야족들도 심지어 바라문들 조차도 탑묘를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사리를 가져가서 탑묘를 세우겠다고 말하자, 서로 싸우려는 듯 분쟁의 조짐이 보였습니다. 이에 바라문 도나가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존자들이여, 내 한 말씀 들어보시오.

우리 부처님은 인욕을 설하는 님입니다.

최상의 참사람이신 분의 사리분배에

다툼이 생겨나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존자들이여, 모두 함께 화합하여

기뻐하며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

사방에 탑묘를 널리 세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눈 있는 님에게 청정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D16)

 

 

중재자의 이름은 도나(Dona)입니다. 오늘날 영어 도너(Nonor)와 같은 의미입니다. 도너는 기증자, 증여자, 제공자를 말합니다. 사리를 팔등분하여 각국의 왕들에게 분배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초창기에 스투파라 불리우는 사리탑은 여덟 개였습니다. 마가다, 베살리, 까필라밧투, 알라깝빠, 라마가마, 베타디빠, 빠바, 꾸씨나라에 세워진 여덟 개의 탑묘입니다. 여기에 두 개가 더 추가 되었습니다. 중재자 도나의 탑묘와 삡빨라바나 탑묘입니다. 특히 삡빨라바나 탑묘의 경우 잿더미로 세웠습니다. 늦게 오는 바람에 분배 받을 사리가 없었는데 타다 만 재를 이용하여 탑묘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따르면 총 10개의 탑묘가 조성되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베살리에 있는 릿차비스투파입니다.

 

진신사리가 묻혀 있었던 곳

 

순례자들은 스투파 터에서 빠알리 예경했습니다. 먼저 둥그렇게 되어 있는 스투파 터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았습니다. 이어서 예경문과 오계, 삼보예찬을 했습니다.

 







 

사리탑이라 불리우는 스투파는 기단만 남아 있습니다. 둥근 양철지붕으로 덮혀 있어서 터를 보호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묻혀 있었던 곳, 부처님의 신체 일부가 있었던 곳에서 순례자들은 잠시 예경했습니다.

 

그 많던 사리는 다 어디 갔을까?

 

근본 8개의 사리탑 중에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릿차비사리탑입니다. 그렇다면 그 많던 사리는 다 어디 갔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스리랑카 역사서 디빠왕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일아스님이 지은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에 따르면 마우리야왕조 아소까대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온전한 84,000가지의 가장 소중한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에 나는 매 가르침을 존경하여 한 가지의 가르침에 하나의 승원을 즉 84,000개의 승원을 전국에 세우리라.”(아소까, 디빠왕사)

 

 

전륜성왕이라 칭송받는 아소까대왕은 인도전역을 통일하고 인도전역에 팔만사천개의 사원을 세웠습니다. 사원을 세웠다는 것은 탑묘를 세웠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아소까대왕은 매 도시마다 한 개의 탑묘를 세웠고 3년안에 승원의 건축을 마친 후에 7일간의 봉헌 축제를 열었다고 합니다.

 

7세기 현장스님이 인도를 방문했을 때 인도전역에는 탑묘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일아스님이 지은 아소까에 실려 있는 현장스님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큰 탑 좌우에 작은 탑이 고기바늘과 같이 1백여 개 있다. …성 동쪽에 탑이 있다. 아소까왕이 세운 것이다. …가람 쪽에 높이 수백척의 탑이 있다. …북쪽에 높이 2백여척의 돌탑이 있다. 아소까왕이 세운 것으로 조각은 진귀한데 가끔 불가사의한 빛을 내는 일이 있다. 작은 탑과 석감은 백을 셀 정도이다.”(현장스님)

 

 

현장스님 기록에 따르면 아소까 탑은 돌로 만들어졌고, 아름다운 조각을 했으며, 신앙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소까대왕은 인도전역에 마을마다 84천개의 사원과 탑묘를 세웠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한 후에 탑묘는 예경과 신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탑묘를 중심으로 사원이 형성되었습니다. 고대인도에서 신앙의 중심은 탑묘이었습니다.

 

탑묘를 스투파라 합니다. 부처님 사리를 넣기 위한 무덤을 말합니다. 보통 반구형태입니다. 산치대탑이 원형입니다. 스리랑카에서 볼 수 있는 다고라도 탑묘형태입니디. 미얀마에서 볼 수 있는 파고다 역시 탑묘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절의 마당에 삼층 또는 오층 등의 석탑 또는 목탁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불상시대의 모든 신앙의 중심지는 탑묘이었습니다. 탑묘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도 전역에 84천개의 탑묘가 있었다는 것은 근본 사리탑에서 분배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오늘날 근본 8개의 사리탑 중에서 베살리에 있는 릿차비사리탑 터가 확인 됩니다. 아마 아소까대왕 당시 인도전역에 탑묘를 만드는데 사리가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이 시대의 진신사리탑은?

 

전세계 어느 불교사원이든지 스투파가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 다고바나 미얀마의 쉐다곤 파고다는 외경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탑묘 형태의 탑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 듯합니다. 법당에 있는 불상이 중심지입니다.

 

절에 가면 법당 앞에 탑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식용처럼 서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스리랑카, 미얀마 등 남방불교국가에 가져 왔다는 진신사리가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부처님 진신사리를 말합니다. 요즘 왠만한 규모를 갖춘 절에서 진신사리탑을 볼 수 있습니다.

 

진신사리의 진위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진신사리탑은 신앙의 대상으로서 예경되고 있습니다. 신심 있는 불자들은 진신사리탑을 세 번 돌며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기원합니다.

 

여기 진정한 진신사리탑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기경전입니다.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삼장을 말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한국에서는 두 종류의 번역서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리탑에 진신사리가 들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책장에 꼽혀 있는 니까야만 못합니다. 빠알리삼장이야말로 진신사리탑입니다. 빠알리니까야를 열어 보면 매일 부처님 그분을 만납니다. 빠알리 니까야를 읽어 보면 부처님 그분이 현전(現前)합니다.

 

 




2018-02-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