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쇠망치로 쳐서 나온 불꽃처럼

담마다사 이병욱 2018. 2. 10. 23:17


쇠망치로 쳐서 나온 불꽃처럼

 


2월 정평법회에 참석 했는데

 

2월 정평법회에 참석했습니다. 원래 2월 셋째 주 토요일이나 설연휴 관계로 일주일 당겨서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 실시할 것이라 합니다. 넷째 주 토요일은 실천법회 하는 날로서 현장을 찾아 가는 모임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이번 2월 정평법회는 그다지 많이 모이지 못했습니다. 법회를 준비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많이 모여야 힘을 받을 것입니다. 포스터를 만들어 배포 하는 등 광고를 하고 공지를 했음에도 저조한 숫자는 바빠서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회는 계속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꾸준히 계속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위기를 많이 겪습니다. 매출이 급감하고 이윤이 떨어질 때 폐업을 고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버티고 있다 보면 기회가 옵니다. 특히 제조업 같은 경우 이른바 한방이 있어서 수주만 받으면 매출이 지수곡선으로 상승합니다.

 

생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지 않고 살아만 있으면 기회가 옵니다. 그러나 죽어 버리면 아예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벤쳐회사 생존율이 5%도 되지 않지만 문닫지 않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으면 살아 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와중에도 근면하게 준비 해 놓고 있으면 반드시 기회가 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큰 것 한방을 노리는 것처럼

 

여법한 예불의식과 함께 시작한 2월 정평법회는 한양여대 김광수 교수의 십회향품법문과 동국대 박경준 교수의 입보리행론 강좌가 있었습니다.

 

김광수교수는 십회향품 법문을 하면서 한국불교의 깨달음 지상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선종에서는 오로지 깨달음만을 이야기하는데, 모든 것이 깨달음 위주로 되었을 때 육바라밀과 보살행을 막아 버린다는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육바라밀과 보살행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런데 화두를 들어 깨달음만을 추구했을 때 더 이상 대승불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 마치 큰 것 한방을 노리는 것처럼 깨달음에 올인 한다면 대승불교의 가장 핵심인 육바라밀과 보살행을 놓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 지상주의가 한국불교의 병폐라고 지적했습니다.

 

감옥이 감옥인줄 모르고

 

박경준교수의 입보리행론 강좌는 매월 계속 됩니다. 이번 법회에서 여러 개의 게송을 소개 했는데 그 중에 9송이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윤회의 감옥에 갇혀 있는 불쌍한 분들도

보리심을 일으키는 순간

부처님의 아들, (보살)이 되어

인간과 신들에게 예경의 대상이 됩니다.”(9)

 

 

윤회를 감옥으로 비유했습니다. 감옥이 감옥인줄 모르고 감옥에서 빠져 나올 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게송에 따르면 감옥에서 빠져 나오려면 보리심을 일으켜 깨달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깨달은 자가 되면 인간과 신들의 예경 대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윤회의 감옥과 관련하여 박경준 교수는 안등(岸藤)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한 나그네가 광야를 거닐다가 코끼리를 만나 도망치다가 우물로 숨은 이야기를 말합니다.

 

나그네는 등나무 뿌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우물아래에는 독룡이 있어서 내려 갈 수 없습니다. 위에는 미친 코끼리가 버티고 있습니다. 오로지 줄에 매달려 있는데 흰 쥐와 검은 쥐가 줄을 갉아 먹고 있습니다. 위로 올라갈 수도 없고 아래로 내려 갈 수도 없어서 진퇴양난입니다. 그때 달콤한 꿀이 똑,, , , 똑 떨어졌습니다. 달콤한 꿀맛에 잠시 괴로움을 잊어 버렸습니다. 나그네는 어떻게 해야 위기를 탈출할 수 있을까?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문제는 문제도 아닙니다. 감기에 걸려 몸과 마음이 괴롭지만 시간 지나면 깨끗이 낫습니다. 이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흔히 말하는 사고팔고(四苦八苦)가 그것입니다.

 

안등의 비유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난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물안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입니다. 이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문수스님과 정원스님 소신공양과 관련된 강좌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작년 한양대 인문관에서 열린 눈부처 학교 강좌입니다. 이를 정원스님과 문수스님을 추모하며, 정의로운 삶을 위한 대자대비의 소신공양(燒身供養)(2017-12-2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박경준 교수는 불의 비유로 생사윤회를 설명했습니다. 또 손뼉치기로 설명했습니다. 손뼉을 치면 탁하고 소리가 납니다. 이에 대하여 “소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가?”라 합니다. 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를 사람에게 적용한다면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가?”라며 묻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단지 인연화합에 따라 붙여진 명칭으로만 존재함을 말합니다.

 

삶은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다

 

안등의 비유를 접한 것은 중학교시절입니다. 종립중학교 불교시간에 불교선생님, 즉 교법사가 안등의 비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처음 이 비유를 들었을 때 몹시 답답했습니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어서 절망적입니다. ‘삶은 절망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실제로 십이연기 정형구를 보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고 되어 있어서 삶은 절망으로 끝납니다.

 

진퇴양난의 안등의 비유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절망적 상황으로 변합니다. 그것은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라는 복합어로 나타나는데, 태어난 모든 존재는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어떻게 해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십이연기는 유전문과 환멸문이 있습니다. 유전문으로 본다면 인생은 절망입니다. 우물에서 등나무 뿌리 줄기에 매달린 존재와 같습니다. 그런데 십이연기는 유전문만 있는 것이 환멸문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속된 말로 빠져 나갈 구멍이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절망적 상황이 조건발생적이라면, 조건을 소멸하면 절망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 환멸문에서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S12.2)라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근심을 해서 근심이 없어진다면

 

조건 발생하고 조건 소멸하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조건 소멸과 조건 발생을 간단히 말하면 생멸입니다. 지금 슬프다고 하여 울고만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Sn3.8)’에서는 비탄해 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명한 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Stn.583)라 했습니다.

 

여기 근심이 많은 자가 있습니다. 그가 근심을 해서 근심이 없어진다면 근심이 없어져서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죽도록 미워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미운 마음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읨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라 했습니다.

 

근심 한다고 해서 근심이 해결되지 않고 미워한다고 해서 미움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근심해서 근심이 없어지고, 미워해서 미움이 없어진다면 현명한 사람들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근심을 내려 놓아야만 근심이 없어지고, 미움을 내려 놓아야만 미움이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근심이라는 번뇌의 화살, 미움이라는 번뇌의 화살을 뽑아 버려야 함을 말합니다.

 

근심이나 미움은 실체가 없습니다. 조건 발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건이 소멸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번뇌는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합니다. 그럼에도 실체가 있는 것처럼 붙잡고 있다면 근심함으로써 근심을 일어나지 않으려 하는 것과 같고 우는 것으로 슬픔을 해결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건만 소멸시키면

 

우물에 빠진 자는 절망적입니다. 그가 살아 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수명만 단축될 것입니다. 남은 것은 십이연기 정형구에서처럼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만 남았습니다. 그렇다고 슬퍼한다고 하여, 근심한다고 하여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조건만 소멸시키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로 시작되는 십이연기 환멸문입니다.

 

결국 무명입니다. 무명 때문에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 긓렇다면 무명은 무엇일까? 상윳따니까야 분석의 경에서는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S12.2)라고 정의해 놓았습니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사성제는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무명을 모른다는 것은 연기법을 모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연기법을 모르는 자는 윤회의 감옥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윤회의 감옥에 사는 자는 우물에 빠진 자가 줄에 의지하고 있는 것과 같아서 결국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귀결됩니다.

 

감옥이 감옥인 줄 모르고

 

오온을 내 것이라고 보는 자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있습니다. 슬픔의 감정이 일어났을 때 슬퍼하고 걱정되면 근심합니다. 마치 몸을 내것이라 여기듯이, 슬픔과 근심도 나의 느낌이나 감정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슬퍼하고 근심합니다. 그러나 현자들이 보았을 때는 매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에 대하여 울고 슬퍼하는 것으로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더욱 더 괴로움이 생겨나고 몸만 여읠 따름입니다.”(Stn.584)라 했습니다.

 

슬퍼하고 근심하고 미워해 보았자 자신만 손해입니다. 실체도 없는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지금 절망에 빠져 있는 자는 절망의 느낌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느낌은 손뼉치기와 같고 쇠망치로 쳐서 나온 불꽃과 같습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렸을 때 윤회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옥이 감옥인 줄 모르고 감옥이 좋다고 살아 갑니다. 우물에 빠진 자가 썩은 동아줄에 의지하여 달콤한 꿀맛을 들기는 것과 같습니다.

 


쇠망치로 쳐서

튕겨나와 반짝이는 불꽃이

차츰 사라져 가니,

행방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처럼 올바로 해탈한 님

감각적 쾌락의 속박의 거센 흐름을 건넌 님,

동요를 여의고 지복에 도달한 님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는다.”(Ud.93)

 

 

2018-02-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