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게 하는 리우카니발
뉴스전문채널에서 리우카니발이 시작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흔히 삼바축제라고도 알려져 있는 리우카니발은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십여년전 위성 TV로 본 리우카니발은 화려 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계속 보게 됩니다. 중학교 시절 김찬삼의 세계여행 화보집에서 보던 리우카니발은 전혀 새로운 세계이었습니다. 반라의 무희들이 화려한 치장을 하고 환희하는 장면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유튜브로 본 리우카니발(Carnaval do Rio de Janeiro)
요즘은 유튜브시대입니다. 유튜브로 리우카니발(Carnaval do Rio de Janeiro)을 검색하자 곧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작년 것을 보니 화려하기 그지 없습니다. 삼바스쿨의 퍼레이드를 보면 이 지구의 세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온갖 상상력이 현실화 된 것 같습니다. 전설이나 신화에서나 나옴직한 것들이 하이테크놀로지와 결합하여 천상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올해 것중에 하나가 ‘Rio de Janeiro Carnival highlights’라 하여 2018년 2월 11일과 2월 12일에 열린 경연대회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화요일(2월 13일) 이전 토요일과 일요일에 열린 것입니다. 삼바스쿨의 특별행사입니다. 그런데 시간을 보니 “On both nights, the parade starts at 9 o'clock and ends at sunrise”라 되어 있습니다. 양일간 열리는 퍼레이드는 밤 9시에 시작하여 해뜰때까지 밤새도록 계속 되는 것입니다.
삼바스쿨 퍼레이드를 보면 화려함의 극치입니다. 비록 화면으로 보지만 현장의 열기와 분위기가 그대로 전달됩니다. 여기에 애잔하면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남성가수의 목소리와 독특한 삼바음악까지 곁들여집니다. 눈으로는 화려한 영상을 접하고 귀로는 영상에 적합한 음악이 계속 흘러 나옵니다. 이세상에 이보다 화려한 축제가 없는 듯 합니다.
카톨릭에서 사순절이 시작되면
카니발은 유럽이나 남북아메리카 등 카톨릭권의 국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매년 사순절의 전에 마지막 요란스런 의식을 부리는 것에서 유래합니다. 사순절이 되면 이마에 재를 바르는 등 죄를 통찰하는데 금욕의 시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부활 전인 40일(四旬) 동안 지켜집니다. 그런데 사순절기간동안 여섯 번째의 주일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재의 수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 주일을 제외하면 날수로 40일 됩니다.
카톨릭에서 사순절이 시작되면 금식 등 회개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런데 사순절이 시작 되기 전에 축제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카니발이라 하는데 이 말은 라틴어 ‘Carnelevamen’에서 유래합니다. 뜻은 ‘살코기를 끊는다’입니다. 카니발은 다가오는 사순절 금욕기간에 앞서 영양보충을 위해 마음껏 먹고 마시는 취지에서 시작된 축제임을 말합니다.
리우카니발은 혼합주의문화의 산물
사순절 축제에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리우카니발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리우카니발은 오늘날과 같이 이처럼 화려하고 거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리우카니발은 19030년대 초반까지는 일반적인 거리축제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연등축제가 제등행렬에서 발전된 것 같습니다.
리우카니발은 포르투갈에서 브라질로 건너온 사람들의 사순절 축제에 아프리카 노예들의 전통 타악기 연주와 춤이 합쳐져서 났습니다. 그래서일까 퍼레이드를 보면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이 실려 있습니다. 또 퍼레이드를 하는 무희들의 피부다 대부분 검고 참가자들 역시 검은 피부 빛이 많습니다.
오늘날 삼바드로메 거리에서 보는 리우카니발은 삼바스쿨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삼바스쿨은 카니발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설립된 학교입니다. 매년 리우카니발이 열리면 삼바스쿨은 경쟁적으로 퍼레이드를 합니다. 몇 일간의 공연을 위하여 일년 동안 주제를 정하여 연습하고 준비기간을 갖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상상을 초월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리우카니발의 출발은 단순하고 소박했습니다. 처음에는 사탕수수 경작 등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힘든 노동을 끝내고, 고향에서 즐겼던 노래와 춤을 추며 고통과 향수를 달랬습니다. 그랬던 것이 카톨릭의 사순절 축제와 맞물려 점차 발전했습니다. 20세기 초에 지금과 같은 카니발이 완성되었습니다. 카톨릭 지배문화와 아프리카 노예문화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리우카니발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혼합문화의 산물은 전세계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서세동점시대 식민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필리핀의 마리안축제(Marian Festival)와 잉카문화권의 동정녀 깐델라리아축제(Candelarian Festival)가 대표적입니다. 지배층의 가혹한 종교탄압으로 인하여 피지배자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제도종교로 습합된 것입니다. 살아 남기 전략으로 채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혼합주의를 ‘사니쿠라스(saniculas, Saint Nicholas)비스킷’이라 합니다. 리우카니발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민중들의 삶과 애환이
유튜브로 보는 리우카니발은 화려하기 그지 없습니다. 잠시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볼거리가 풍성하고 귀로는 반복적인 삼바리듬의 연속입니다. 반라의 검은 피부의 무희는 화려한 의상과 함께 환희로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참가자들 역시 화려한 의상과 함께 마치 이곳이 천국인 것처럼 마음껏 이순간을 즐기는 듯합니다.
리우카니발을 겉모습으로만 본다면 향락적이고 퇴폐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카니발이 생긴 역사를 보면 민중들의 삶과 애환이 서려 있습니다. 사순절축제라는 마당이 있어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이날만큼은 주인이 되어 마음껏 발산하는 축제의 장이 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전세계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어느 나라에서는 축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추석’도 일종의 축제입니다. 수확철에 열리는 축제는 고된 노동에 대한 보상의 성격이 짙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밤새도록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는 것과 같습니다. 또 막장에서 하루 일과를 끝낸 광부들이 하루를 결산하는 의미에서 목욕후에 삼겹살에 소주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축제는 민중의 삶과 한이 녹아 있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열리는 리우카니발은 민중들이 갖가지 분장을 하고 몇 일간의 천상의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축제가 끝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 비록 일상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하더라도 매년 몇 일 열리는 축제로 인하여 다시 천상과 같은 즐거움을 만끽 할 것입니다.
환희동산(nandana: 歡喜園)
지금 삶이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오래도록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괴로운 자는 어서 빨리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영원히 즐거움만 계속되는 천상을 생각해내게 되었을 것입니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욕계천상입니다. 그중에서도 삼십삼천에 환희동산(nandana: 歡喜園) 이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 환희동산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게송을 보면 “영예로운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늘사람이 살고 있는 환희의 동산을 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알지 못하네.”(S1.11)라 되어 있습니다. 맛을 보아야 맛을 알 수 있듯이, 환희동산도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환희동산은 환희로 가득한 곳입니다. 그 중에 앗차라(accharā)라 하는 천녀가 있습니다. 앙코르왓트 부조를 보면 압사라춤을 추는 천녀를 말합니다. 삼십삼천의 환희동산에서는 압사라 춤을 추는 천녀의 시중을 받으면 오욕락(五慾樂)을 즐긴다고 했습니다. 환희동산은 괴로움은 없고 오로지 즐거움만 가득한 곳입니다. 현실을 고통스럽게 살아 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곳입니다.
리우 카니발을 보면 삼십삼천의 환희동산을 그대로 묘사한 듯 합니다. 반라의 무희가 환희하는 모습을 보면 캄보디아에서 압살라 춤을 추는 무희들을 보는 듯합니다. 천녀의 시중을 받으며 오욕락을 즐기며 사는 환희 동산에 대하여 두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수행승에게 환희동산은 무명(無明)동산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숲에서 용맹정진 하던 어떤 수행승이 있었습니다. 수행을 너무 열심히 했던지 풍병(風病)에 걸려 죽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뇌졸증 같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깨어 보니 전혀 다른 곳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천녀(요정)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수행승은 풍병으로 갑자기 죽어 삼심삼천 환희동산에 화생했습니다. 이것은 전혀 바라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수행했는데 천녀들의 무리에 둘러 싸인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는 바로 이전 생에 승려였던 것을 생각하며 천녀들에 둘러 쌓여 있는 것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게송을 읊었습니다.
“요정들의 노래가 메아리치고
유령들이 출몰하는 숲은
무명의 숲이라 불리는데
어떻게 그곳에서 벗어나랴?”(S1.46)
누구나 꿈꾸는 천상입니다. 지계하고 보시하면 그 보상으로 천상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전 생에서 수행승이었던 자는 천녀들의 무리에 둘러 싸여 시중받고 있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곳에서 벗어나랴?”라며 고민합니다. 천상의 즐거움에 취해서 살면 해탈과 열반은 요원한 것이 되어 버리기 떄문입니다. 삼십삼천의 환희동산을 무명(無明)의 동산으로 본 것입니다.
부처님 목소리에 충만한 개구리 만두까(maṇḍūka)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홀로 숲에서 용맹정진하는 수행승이 갑작스럽게 죽어서 삼십삼천 황금궁전에 태어났을 때 전혀 반갑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축생이 죽어서 환희동산에 태어났다면 축복일 것입니다. 청정도론에서 보는 개구리 만두까(maṇḍūka)이야기가 그것일 것입니다.
빠알리어 만두까(maṇḍūka)라는 말은 개구리(frog)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개구리가 어떻게 삼심삼천의 신이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 불수념에서 ‘인간과 신들의 스승(sattha devamanussa)’에 대한 해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기도 하지만 축생들에게도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부처님이 각가라 연못이 있는 언덕에서 짬빠에 사는 주민들에게 법문을 했습니다. 그때 한 개구리가 부처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개구리의 입장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알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부처님의 목소리가 아름다워서 충만(充滿)해 있었습니다. 그때 한 목동이 막대기에 의지하여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막대기가 개구리를 짓눌렀습니다.
개구리는 목동의 막대기에 짓눌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자마자 곧바로 삼심삼천 천상에 화생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떠 보니 천녀들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만두까는 “오! 내가 여기에 태어나다니. 내가 어떠한 업을 지었는가?” (Vism.7.51)라며 이전 생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부처님 목소리에 인상을 파악한 것 외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부처님 목소리가 좋아서 충만해 있던 것 외에 기억 나지 않은 것입니다.
전생에 개구리였던 만두까는 부처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찾아 보니 부처님은 “신통과 명성으로 빛나고, 아주 탁월한 용모로 일체의 방향을 비추니, 나의 두 발에 예배하는 자가 누구인가?” (Vism.7.51)라며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습니다. 삼십삼천 환희동산에 화생한 만두까는 신의 용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만두까는 “저는 전생에 개구리였고 뭍에서 헤엄쳐 다녔습니다. 설법을 듣고 있었는데, 목우자가 저를 죽였습니다.”(Vism.7.51)라고 말했습니다.
개구리 만두까 이야기를 보면 부처님을 늘 생각하다 죽으면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설령 설법을 알아 듣지 못하는 축생이라도 부처님의 목소리에 인상을 취하여 충만해 있다면 천상에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여래십호 중에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라는 별칭은 축생에게도 해당됨을 알 수 있습니다.
힘겨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하늘아들 만두까는 삼십삼천에 태어난 것을 만족했습니다. 더구나 황금궁전에 태어나 천녀들의 시중에 감격해 했습니다. 이런 태도는 수행승이 갑작스럽게 죽어서 환희동산에 태어난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는 것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하는 자에게 있어서 환희동산은 무명동산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축생처럼 사는 자에게 또는 힘겹게 사는 자에게는 천상은 꿈과 같은 곳입니다.
리오카니발을 보고서 전설속의 이야기와 신화속의 이야기를 첨단 테크놀로지로 구현한 것을 보고서 천상의 삶을 묘사한 것처럼 보입니다. 반라의 무희의 환희로운 모습은 환희동산의 앗차라 천녀들 같아 보입니다. 퍼레이드에 참가한 삼바스쿨 사람들이 펼치는 퍼포먼스는 힘겨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줍니다. 설령 내일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지라도 퍼레이드에 참가한 자들의 얼굴에는 천상의 환희에 넘쳐 있는 것 같습니다.
2018-02-1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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