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없는 왕도 영화가 몰락했을 때, 권력무상 타지마할을 보고
(인도성지순례 22)
럭나우에서 하루밤 자고
원담스님과 함께 하는 진주선원 순례팀은 쉬라바스티에서 럭나우(Lucknow) 로 향했습니다. 럭나우까지는 177키로미터 거리인데 자동차로 4시간 가량 걸립니다. 럭나우 피카딜리(Piccadily)호텔까지 저녁식사시간 전까지는 도착해야 합니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은 인도에서 운전기사는 운전실력을 마음껏 과시했습니다. 만일 배낭여행을 했다면 짧은 기간 동안 이렇게 많은 곳을 돌아 다니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세버스가 있어서 마치 자가용처럼 활용할 수 있어서 가능했고 무엇보다 목적지에 제때 도착하게 하는 운전기사의 실력도 한몫 작용한 것입니다.
럭나우는 인구가 330만명 가량 되는 대도시입니다. UP(웃타르프라데시)주의 주도입니다. 가이드 샌디에 따르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도시라 합니다. 또한 무슬림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합니다. 그래서일까 하루밤 묵을 피카딜리호텔 서비스맨들도 무슬림이었습니다.
럭나우에서 아그라로
럭나우 피카딜리호텔에서 하루밤 숙박한 후 아그라(Agra)로 출발했습니다. 타지마할이 있는 곳입니다. 이제부터는 성지순례가 아닌 관광입니다. 그래서일까 순례팀 사람들은 부담 없는 것 같습니다. 2018년 1월 6일 토요일아침 순례자들은 여유 있고 느긋한 마음으로 첫번째 관광지 타지마할로 향했습니다.
럭나우에서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까지는 330키로 미터의 거리로 4시간 가량 걸립니다. 긴 거리임에도 시간이 짧게 걸리는 것은 도로사정이 좋기 때문입니다. 대도시와 대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는 고속화 되어 있어서 이전의 도로와는 비교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도로가 울퉁불퉁하지도 않고 승차감도 좋았습니다.
궁전 같은 자이피(Jaypee)호텔
점심시간 이전에 아그라 자이피(Jaypee)호텔에 도착했습니다. 미국대통령도 머물고 갔다는 고급호텔입니다. 그렇다고 럭셔리한 고층빌딩은 아닙니다. 붉은 사암대리석으로 치장 되어 있는데 저층구조입니다. 너른 대지에 미로형으로 되어 있어서 마치 궁전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일까 정식명칭도 ‘자이피펠리스호텔(Jaypee Palace Hotel)’입니다. 더구나 시원시원하게 하늘로 솟구쳐 있는 야자수가 품격을 높여 주는 것 같습니다.
인파로 가득한 타지마할
자이피호텔에서 점식식사를 한 후 타지마할과 아그라성 관람을 위해 출발했습니다. 호텔에서 타지마할까지는 3.8키로미터의 거리로 약 11분 가량 걸립니다. 그런 타지마할은 아그라시의 북쪽 야무나강변에 위치해 있습니다.
타지마할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인파입니다. 1월 6일은 토요일입니다. 주말이서인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한산한 불교성지와 매우 대조적입니다. 표를 사기 위한 긴 줄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외국인 특별히 줄이 다르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입장료가 10배 이상 비싼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신기루를 보는 듯한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인도를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습니다. 인도관광 안내에 꼭 등장하는 곳이 타지마할입니다. 늘 사진으로 접하던 타지마할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레이트 게이트라는 고건축물을 통과하자 앞에 전개 되어 있는 흰대리석 건축물은 사진이나 TV에서 본 모양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건축물이 무척 크다는 사실입니다. 건축물 앞의 사람들이 마치 개미처럼 작게 보입니다. 사진으로 본 것과 실물을 본 것과의 차이입니다.
터널을 빠져 나오면 전혀 다른 풍광이 전개됩니다. 타지마할을 처음 본 순간이 그랬습니다. 지금까지 인도평원에서 본 가난하고 궁핍한 삶만 보았습니다. 성지에서는 폐허가 된 붉은벽돌 무더기만 있었습니다. 차창 밖으로 본 집들은 부서진채 방치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아하고 아름다운 흰대리석의 거대한 건축물과 마주한 것입니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를 보는 듯합니다.
세상사람들은 타지마할을 세계칠대불가사의라 합니다.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한 경이로운 건축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건축물은 궁전이 아니라 무덤이라는 사실입니다. 무굴제국 5대 왕 사쟈한이 15번째 아이를 낳으려다 죽자 부인을 위한 무덤을 지어준 것이 타지마할입니다. 페르시아 등 세계적인 장인 2만명을 동원하여 22년만인 1653년에 완성했습니다.
아들에게 쫓겨난 권력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영화의 상징입니다. 제국은 황제 개인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궁전 같은 거대한 무덤을 만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만들면서 재정이 파탄 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타지마할 건너편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또 하나의 타지마할을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안 아들은 아버지를 아그라성 한켠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흔히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이런 사실은 역사적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수하게 있었습니다. 현재에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재벌가에서 부자간의 소유권 다툼하는 것도 금력이라는 권력에 따른 것입니다.
무굴제국 5대 황제 샤자한은 아들에 의해 폐위 되어 유폐되었습니다. 유폐된 황제는 흰대리석의 타지마할을 보면서 권력무상과 인생무상을 느꼈을 것입니다. 황제로서의 영화가 몰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유폐되거나 버려진 경우가 매우 많다는 사실입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이 아들인 아자타삿뚜에게 쫓겨나 감옥에 갇혀 죽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데바닷따의 음모에 따른 것입니다. 데바닷따는 아자따삿뚜에게 “왕자여, 그대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십시오. 나는 세존을 죽이고 부처님이 되겠습니다.”(Vin.II.190)라며 교사했기 때문입니다. 꼬살라국의 빠세나디왕도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성문 밖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이 외에도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쓸쓸하게 죽어간 왕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인들에게 전륜왕이라고 추앙받고 있는 아소까대왕도 말년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Dhammavijaya)
불교인들에게 전륜왕이라고 추앙받고 있는 아소까대왕도 말년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소까대왕은 깔링가전투에서 참상을 본 후 무력에 의한 세계정복을 포기했습니다. 그대신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추진했습니다. 아소까대왕은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이 세상에 평화와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었습니다. 전인도에 팔만사천개의 사원을 건립하고 전세계에 담마사절단을 파견했습니다. 이와 같이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담마비자야(Dhammavijaya)’라 합니다.
아소까대왕의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은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승가에 과도한 보시가 문제 된 듯합니다. 아소까대왕은 전인도를 승가에 보시했기 때문입니다. 제국을 통째로 승가에 바친 것입니다. 이는 아함부 경전인 아육왕전에 “국가 재정을 제외하고 나는 바다로 둘러싸인 온 세상을 부처님의 제자들인 승가에 보시합니다.”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소까대왕이 온 세상을 승가에 보시한 것은 그때 당시의 관행입니다. 그런데 승가에 보시한 세상을 돈을 내고 다시 사오는 것도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왕은 승가에 보시하고 대신들이 돈을 내고 세상을 사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승가에 막대한 돈과 재물이 들어갔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아소까대왕은 불교를 부흥시켰습니다.
아소까대왕은 3차 결집을 후원했습니다. 그리고 전인도 마을 마다 8만 4천개의 승원을 건립했고 전세계를 대상으로 10개국에 담마사절단을 보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아소까대왕이 온 세상을 승가에 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소까말년에는 이런 방식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대신들이 왕을 유폐시켜 버린 것입니다. 아마 재정문제가 컸을 것입니다.
전인도를 통째로 보시했던 왕도
역사적으로 아소까대왕은 전륜성왕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소까의 말년은 비참했습니다. 재세시 전인도를 승가에 보시하였으나 말년에는 아무것도 보시 할 수 없었습니다.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아소까의 슬픈 말년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빠딸리뿟따의 꾹꾸따라마(Kukkutarama)승원에 큰 탑이 있는데 이름이 아말라까(amalaka)탑이라 하는데 아말라까란 인도의 약용과일 이름이다. 아소까 왕이 병이 들어 중태가 되었을 때 승가에 진귀한 보물을 공양하려 하였으나 가신들의 만류로 공양할 수가 없었다. 천하를 마음대로 통치했던 권력은 가버리고 이제는 오직 식사에 나온 아말라까만 뜻대로 될 뿐이라고 한탄하면서 아말라까를 먹지 않고 꾹꾸따라마 승원으로 보냈다. 그래서 승가대중들은 그 아말라까를 끈으로 묶어 국을 끓여 국물은 대중이 모두 먹고 아말라까를 꺼내어 탑을 세우고 탑 속에 모셨다 한다.”(아소까 75페이지))
유폐된 아소까는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전인도를 보시했던 대왕은 다만 식사 때 나온 아말라까 열매 하나만 보시가 가능했습니다. 아말라까 열매 하나를 보시 받아 세운 탑은 보드가야 대탑의 보리수 동쪽에 있는 승원에 있었다고 합니다. 승원에는 금동의 아말라까 놓여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아소까 왕은 신심이 두터워서 세 번이나 잠부주를 법승에게 보시한 다음 세 번 모두 진귀한 보물로써 사들였다.”라 합니다. 전인도를 통째로 보시했던 왕도 말년에는 고작 아말라까 한 개를 보시할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슬픔 없는 왕도 영화가 몰락했을 때
아소까대왕의 말년과 관련하여 스리랑카 역사서 ‘디빠왕사’가 있습니다. 디빠왕사에 따르면 “이 사건이 있은 지(띳사락카의 보리수 파괴) 4년 후에 매우 훌륭한 정법왕 아소까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힘에 굴복하였다. 이로써 37년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소까 대왕이 37년 통치하다가 유폐되어 아무 힘도 쓰지 못한 채 쓸쓸히 죽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소까대왕은 영화와 몰락을 모두 겪었습니다. 이런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에게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타지마할을 건립한 샤자한도 아들에게 유폐되어 쓸쓸하게 죽어갔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영화의 몰락입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죽음에 대한 새김(Maranasati)’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의 융성은 쇠락이 그것을 정복하지 못하는 한 빛난다.”라 했습니다. 몰락이 영화를 덥쳐 버리기 전까지는 영화는 빛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모든 부귀영화는 몰락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에 대하여 극적인 삶을 살다간 아소까대왕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Sakalaṃ mediniṃ bhutvā,
datvā koṭisataṃ sukhī;
Aḍḍhāmalakamattassa,
ante issarataṃ gato.
“모든 땅을 정복하여
십억 금을 보시하고 행복한 자라도
최후에는 반 아말라까를
자유롭게 얻을 뿐이다.
Teneva dehabandhena,
puññamhi khayamāgate;
Maraṇābhimukho sopi,
asoko sokamāgato
몸에 공덕이 다하면
그 슬픔을 여읜 왕도
죽음에 당면하여
마침내 슬픔에 이른 것이다.”(Vism.8.14)
아소까대왕을 무우왕(無憂王)이라고도 합니다. 무우왕은 ‘근심 없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빠알리어 아소까(asoka)가 ‘free from sorrow’의 뜻이기 때문에 무우(無憂)로 한역된 것입니다. 그런데 근심 없고 슬픔없는 아소까(asoka)는 말년에 슬픔(soka)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슬픔을 여읜 왕도 슬픔에 이른 것이다(asoko sokamagato)’라 했습니다.
무굴제국 샤자한도 아소까대왕처럼 슬픔없는 왕이었습니다. 그의 재세시에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죽은 아내를 위한 궁전 같은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룩한 업적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슬픔 없는 왕은 말년에 슬픔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념의 소산물은 역사적 건축물로 남아서 오늘날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 경탄해 마지 않습니다.
인도국기에서 보는 법륜문양
오늘날 인도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타지마할입니다. 그러나 인도를 대표하는 국기에 들어 가는 문양은 아소까대왕의 석주에 있는 수레바퀴입니다. 타지마할이 인도를 대표하는 건축물이긴 하지만 인도의 정신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샤자한의 무굴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도에 들어온 정복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소까대왕의 마우리야 왕조는 인도인에 의한 인도 최초의 통일왕조입니다.
아소까대왕은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하고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렸습니다. 그런데 인도가 독립한 후에 새로 국기를 만들 때 아소까대왕의 석주에 있는 바퀴문양을 넣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도정체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마우리야왕조 이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들어온 수 많은 정복왕조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근대에는 거의 삼백년간 영국지배를 받았습니다. 인도역사에서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대는 인도최초의 통일왕조인 마우리야왕조시대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소까대왕시대입니다.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천명한 아소까대왕의 법륜이 인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인도에서 불교가 크게 부활할 것으로 봅니다.
타지마할에서 권력무상을
무굴제국의 위대한 유산 타지마할을 보면서 아름다운 건축미에 감탄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권력무상과 인생무상을 느낍니다. 슬픔없는(asoka)왕이 영화가 몰락되었을 때는 슬픔(soka)을 느낀 것입니다. 모든 권력자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모든 뭇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40가지 명상주제 중의 하나인 사수념(死隨念: maranasati)에 대한 것을 보면 이렇게 새기라고 했습니다.
“일체의 건강도 최후에는 질병으로 끝나고,
일체의 젊음도 최후에는 늙음으로 끝나고,
일체의 목숨도 최후에는 죽음으로 끝난다.
일체 세상의 존재도 태어남에 따르고
늙음에 시달리고 질병에 정복되고 죽음에 공격받는다.”(Vism.8.14)
2018-02-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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