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담마(Dhamma)에 의한 정복만이 평화와 행복을, 난공불락의 철옹성 아그라성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8. 2. 20. 15:51


담마(Dhamma)에 의한 정복만이 평화와 행복을, 난공불락의 철옹성 아그라성을 보고

(인도성지순례 23)

 

 

아그라성 가는 길에

 

진주선원 인도성지 순례팀의 두 번째 관광일정은 아그라성입니다. 아그라성은 타지마할 서쪽 야무나 강변에 있습니다. 타지마할에서 아그라성까지는 약 2.7키로미터의 거리로 걸어서 30여분 걸립니다. 전동릭샤가 있어서 타고 갔습니다.

 




전동릭샤에 여섯 명 가량 탔습니다. 비좁은 공간에 밀착하여 앉으니 가능한 것입니다. 전동릭샤는 타자마자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렸습니다. 그때 물건을 파는 젊은이가 달려 들었습니다.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뛰었습니다.

 

 



난공불락의 철옹성

 

아그라성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붉은 색을 특징으로 하는 성입니다. 붉은 사암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성입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견고하게 생겼습니다. 입구를 보니 이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것 같습니다. 외적을 물리치기 위한 해자가 성의 둘레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것도 폭이 매우 넓은 것입니다. 옛날에는 악어를 풀어 놓았다고 합니다. 동쪽은 야무나 강이 있어서 함부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성문 입구에는 이중으로 되어 있어서 아무나 함부로 들어 갈 수 없는 철옹성입니다.

 

 











 아그라성은 16세기 말 무굴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기면서 건축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5대 왕인 샤자한이 타지마할을 건축하면서 더욱 발전 되었습니다. 그러나 샤자한은 타지마할을 건축하면서 너무 많은 재정을 낭비하는 바람에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서 폐위 되어 아그라성 한켠에 유폐되었습니다.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아그라성은 한눈에 보기에도 난공불락의 철옹성입니다. 어떤 외적도 함락시킬 수 없는 자연의 지형과 인공이 결합된 요새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철옹성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인도 밖에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인도의 정복왕조

 

인도의 역사를 보면 정복왕조가 많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이나 중앙아시아 등 척박한 환경에서 산 사람들이 풍요로운 인도평원을 정복한 것입니다. 마치 중국에서 북방유목기마민족들이 만리장성 이남의 농경을 하는 한족을 점령하여 통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도에서 정복왕조라 하면 이슬람왕조들을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가즈니왕조(963-1186), 구르왕조(1011-1215), 무굴제국(1526-1857) 순입니다. 구르왕조 이후 인도는 완전히 이슬람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무굴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 왔습니다.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풍요의 땅 인도평원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무굴제국의 초대황제 바브르는 부계로는 티무르의 후손이고, 모계로는 징기스칸의 후손이라 합니다. 무굴이라는 말은 몽골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바브르는 산악지대의 유목민을 이끌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었습니다. 1526년 중세인도를 지배했던 로디왕조와 일전을 겨루었습니다. 그런데 전투는 6시간 만에 끝났다고 합니다. 바브르는 인도정복을 위하여 19년 동안 준비했다고 합니다. 이후 인도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유목민족에 의하여 350년 동안 지배 받게 됩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는?

 

이슬람왕조 기간 동안 불교는 없었습니다. 구르왕조 당시 1203년 비크라마시라 사원이 파괴되면서 불교는 사라졌습니다. 이슬람에 의하여 모든 불교사원은 파괴되고 승려들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불교성지는 파괴되어 정글이 되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영국 커닝햄에 발굴될 때까지 팔백년 가량 잊혀진 채로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외적인 이유는 이슬람의 침략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요인도 있을 것입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내적 이유에 대하여 쯔까모토, 사카사하라 등 일본불교학자들의 공저 인도불교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습니다.

 

 

한편 인도에 있어서 불교의 멸망은 단순히 이 같은 외적 요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불교자체 내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고타마 붓다 시대 이래 불교는 세력이 가장 왕성하였을 때조차도 바라문교를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였으며, 바라문교가 힌두이즘으로 부흥함에 따라 불교는 점차 힌두화되어 마침내는 본질적으로 구분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융합한 금강승이 성립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불교가 멸망하는데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무슬림이지만 그 이전에 불교는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할 수 있다.”(인도불교사 166, 경서원)

 

 

일본불교학자들에 따르면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근본적인 이유로 불교의 힌두이즘화를 들고 있습니다. 불교가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대승불교에서 금강승불교로 발전했다고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불교의 퇴보입니다. 본래 부처님 가르침에서 한참 멀어진 것입니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변질되고 왜곡 되어서 전혀 다른 불교가 되었을 때 더 이상 불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본래 모습을 잃어 버리고 힌두이즘을 받아 들였을 때 힌두이즘과 구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불교는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라고 표현 했습니다. 불교는 이슬람 침입 이전에 망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을 저지한 인도대륙

 

인도대륙은 10세기 이후 이슬람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나 인도대륙 전체는 이슬람화 되지 않았습니다. 유일신을 믿으며 평등을 강조하는 이슬람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대륙의 인도인들은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버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슬람지배자들은 강제로 바꿀 수 없음을 알고 관용정책을 펼쳤습니다.

 

오늘날 인도대륙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에는 이슬람이고 동쪽은 불교입니다. 이슬람은 인도대륙을 넘어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인도 동쪽은 불교가 다수입니다. 오늘날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와 같은 테라와다 불교국가는 이슬람의 침략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도대륙이 방패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슬람의 동진은 인도대륙에서 멈추었습니다. 물론 방글라데시나 인도네시아 등 이슬람 국가들이 있긴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불교가 대세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가이드 샌디는 시크교도 역할을 들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침략으로 인하여 이슬람의 장점과 힌두교의 장점을 취하여 생겨난 것이 시크교라 합니다.

 

가이드 샌디는 한국말이 유창합니다. 독학으로 배웠다고 합니다. 아는 것도 많고 상식도 풍부합니다. 비하르주 출신인 샌디의 성과 이름은 선디프 굽타입니다. 굽타왕조의 똑 같은 이름입니다. 굽타왕조(320-550)는 갠지스평원에 있었던 인도인의 왕조입니다. 부처님 당시의 마가다와 아소까대왕의 마우리아 왕조를 계승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굽타왕조 시대에 대승불교가 꽃을 피웠습니다.


가이드 샌디는 이슬람 놈들은 우리에게 너무 나쁘게 했어요라고 말합니다.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인도로 들어 온 무슬림들이 인도의 전통과 문화를 파괴한 것에 대하여 좋지 않게 본 것입니다. 가이드 샌디에 따르면 인도가 이슬람화 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시크교도의 영향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시크교도에 대하여 이슬람의 천적이라 말하면서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기르고 칼을 찬 시크교도는 인도의 수호신과 같아요.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물리쳤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형 무늬를 보고

 

아그라성에는 볼거리로 넘쳐 납니다. 붉은 사암으로 된 건축물은 모두 예술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짝모양도 창살모양도 사암을 연마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슬람 특유의 기하학적 무늬와 꽃무늬가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하게 합니다. 그 중에는 만()자형 무늬도 눈에 띕니다. 일종의 문화관용 정책의 산물이라 합니다.

 

 


 












샤자한이 유폐된 백색궁전

 

아그라성에서 가장 주목 받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5대 왕인 샤자한이 유폐된 곳입니다. 타지마할을 짓는 과정에서 막대한 재정을 지출한 바 있는데 건너편에 타지마할 못지 않은 무덤을 짓겠다고 하자 아들이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샤자한이 유폐된 곳은 백색 대리석으로 된 궁전입니다. 아그라성 전체가 붉은 사암으로 되어 있는 것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그것도 타지마할이 가장 잘 보이는 야무나 강변입니다.

 



 


 




 

볼썽 사나운 영국지배자 무덤

 

중앙아시아에서 넘어 온 유목민족들은 인도대륙을 정복했습니다. 아프카니스탄 고원에서 넘어 온 유목민족들도 인도평원을 점령하여 세금을 거두어 갔습니다. 그 세금으로 지어진 것이 오늘날 보는 철옹성입니다. 그러나 철옹성은 바다 건너 작은 섬나라 영국인들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 흔적이 성안에 있는 작은 무덤으로 남아 있습니다. 궁전 마당 한가운데 매장을 한 것입니다.

 



 

 

무덤을 보면 볼썽 사납습니다. 대영제국의 오만함이 그대로 엿보입니다. 그렇다고 무덤을 치울 수도 없다고 합니다. 영국침략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인도인들에게 역사의 산교육이 될지도 모릅니다.

 

아그라성은 원숭이궁전

 

티무르와 몽골제국의 후예 무굴제국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그대신 거대한 건축물을 남겼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와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철옹성을 지었으나 역시 외부인 영국인들에게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그때 그 당시 외부사람들은 가고 없습니다. 그대신 궁전에는 원숭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아그라성은 원숭이들이 사는 원숭이궁전이 된 듯합니다.

 

 




 

초기경전에서 본 야무나강

 

아그라성에서 동쪽을 보면 저 편에 타지마할이 보입니다. 5대왕 샤자한이 흰대리석 궁전에 유폐 된 곳이 가장 잘 보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타지마할과 아그라성 모두 야무나강을 끼고 있습니다.

 

아그라성은 야무나강 바로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 북쪽에서 온 유목민족은 인도 본토 사람들 보다 같은 북쪽 유목민족을 두려워 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야무나 강을 배수진으로 하여 철옹성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 야무나강은 초기경전에서 많이 등장합니다.

 

 



 

야무나(Yamunā)강은 오하 중의 하나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빠하라다의 경에따르면 세존이시여, 또한 어떠한 커다란 강이든 갠지스, 야무나, 아찌라바띠, 싸라부, 마히 와 같은 커다란 강이 커다란 바다에 이르면 이전의 각각의 이름을 버리고 커다란 바다라 불립니다.”(A8.19)라 했습니다. 다섯 개의 큰 강중에서 야무나 강은 갠지스 다음으로 큰 강입니다.

 

야무나강이 말라 버릴 때도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일곱개의 태양의 출현에 대한 경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세 번째의 태양이 나타나면, 강가 강이나 야무나 강이나 싸라부 강이나  마히 강과 같은 커다란 강들이 있더라도, 그것들은 말라서 고갈되어 존재하지 않게 된다.”(A7.66)라 했습니다.

 

야무나 강은 동쪽으로 흐릅니다. 이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야무나 강은 동쪽으로 향하고 동쪽으로 나아가고 동쪽으로 들어간다.”(S48.72)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커다란 강이든 갠지스 강, 야무나 강, 아찌라바띠 강, 싸라부 강, 마히 강이든 그들 모든 강은 동쪽으로 향하고 동쪽으로 나아가고 동쪽으로 들어간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들어가는 다섯 가지 능력을 닦는다.”(S48.76)

 

 

북인도 평원에서 모든 강은 동쪽으로 흐릅니다. 갠지스강이나 야무나강과 같은 크고 작은 강은 모두 하나가 되어 만나서 바다로 들어 가게 됩니다. 부처님은 바다를 열반으로 비유했습니다. 열반으로 들어 가기 위해서는 믿음, 정진, 새김, 집중, 지혜라는 다섯 가지 능력(五根)’을 닦아야 함을 말합니다. 다섯 가지 능력에 대하여 다섯 개의 강으로 비유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담마(Dhamma)에 의한 정복만이

 

북방 유목민족은 타지마할과 아그라성을 남겼습니다. 인도에 수 많은 정복왕조가 있었지만 인도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왕은 아소까대왕이 아닐까 합니다. 아소까대왕의 사자상 석주에 있는 법륜이 인도 국기에 채택되었기 때문입니다.

 

인도에는 중세이후 근대까지 천년 동안 북방유목 이슬람민족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정체성을 잃지 않은 것은 역사와 문화와 전통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불교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은 인도인에게는 친숙한 것이라 봅니다.

 

북방 무슬림들이 한손에 칼을 들고 한손에 코란을 들고 들어 왔지만 인도대륙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소까대왕은 칼과 몽둥이를 포기하고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추진했습니다. 이슬람이나 힌두교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부처님 가르침만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소까대왕은 담마(Dhamma)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 행복을 가져온다.”라고 말했습니다.

 









 

2018-02-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