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인 아나타삔디까의 기원정사 건립이야기
(인도성지순례 21)
앙굴리말라 스투파 순례를 마친 진주선원 인도성지순례팀은 기원정사로 향했습니다. 8박 9일간의 인도성지순례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순례입니다. 앙굴리말라 스투파에서 불과 1.3키로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기원정사를 제따바나(Jetavana)라합니다. 초기경전에서 “한때 세존께서 제따바나에 계셨다.”라 되어 있는데 대개 기원정사를 말합니다. 기원정사는 부처님과 승가를 위한 두 번째 정사입니다. 첫 번째 정사는 라자가하 근교에 있는 죽림정사이고, 두 번째 정사는 사밧티에 있는 기원정사입니다.
기원정사는 불자들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한국불자들에게 있어서 교과서와 같은 금강경 법회인유분에 따르면 “일시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은 제따바나, 즉 기원정사를 말합니다.
기원정사 입구에서
늘 경전에서만 접하던 기원정사입니다. 그러나 입구는 생각했던 것 보다 초라했습니다. 불교성지라 하여 크고 장대한 것을 연상했으나 평원에 적벽돌 유적 무더기가 대부분입니다. 안내판을 보니 입장료가 인도인들에게는 15루피이고 외국인에게는 200루피입니다. 현지인 보다 무려 10배 이상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갑니다.
기원정사 입구에 ‘JETAVAN(SAHETH) DISTRICT-SHRAVASTI’라는 입간판이 있습니다. 인도현지에서는 제따바나를 제따반(JETAVAN)이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제따바나의 또 다른 이름 사헤트(SAHETH)입니다. 전체적으로 쉬라바스티(SHRAVASTI)라 합니다.
제따반구역을 보면 가장 핵심은 향실(香室)이라 불리는 간다꾸띠(gandhakuṭi)입니다. 부처님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간다꾸띠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유적지가 분포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곳 기원정사에서 45안거 중에 19안거를 보냈습니다.
아난다보리수 가는 길에
2018년 1월 5일 오후 기원정사의 날씨는 무척 맑았습니다. 늘 안개가 끼여 희뿌였던 대지가 이날 오후만큼은 청명했습니다. 순례팀은 중앙로를 따라 아난다보리수를 목적지로 하여 사뿐사뿐 유쾌하게 걸어 갔습니다. 드넓은 평원에 자리 잡은 기원정사는 잘 가꾸어진 공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렇게 숲이 우거진 아름다운 정원이었을 것입니다.
걸어 가는 도중에 간디꾸띠 구역을 보았습니다. 기원정사에서 가장 핵심이고 심장과도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한국에서 온 스님들과 불자들이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었습니다. 간다꾸띠 아래에는 중국불자들과 스님들이 있었는데 큰 소리로 경전을 독송하고 있었습니다. 중국불자들은 어디를 가나 경을 목소리 높여 읽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간다꾸띠 주변에는 일단의 승려들이 앉아 있습니다.행색을 보니 여법해 보이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성지주변의 가짜 승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접촉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아난다보리수로 가는 길에 한국에서 온 비구니 스님 두 명을 만났습니다. 회색승복을 입은 스님들을 보니 반가웠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물어 보니 정읍에서 왔다고 합니다. 개별적으로 인도성지 순례 온 것 같습니다. 아난다보리수로 가는 길에는 야자수와 보리수 등 큰 나무들이 순례팀을 반기듯이 서 있습니다.
율장소품 아나타삔디까이야기(Anāthapiṇḍikavatthu)
금강경에 기수급고독원이라 하여 기원정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한국불자들은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금강경을 설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을 해설하는 법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원정사 설립과 관계 되는 이야기입니다.
급고독장자, 즉 아나타삔디까 장자는 제따왕자의 원림을 샀습니다. 그 때 반드시 나오는 말이 ‘금으로 원림을 깔았다’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어떤 경전에 근거할까? 이번 기원정사 순례기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알았습니다. 율장소품에 실려있는 ‘아나타삔디까이야기(Anāthapiṇḍikavatthu, Vin.II.155)’가 그것입니다.
아나타삔다까는 금융업자
아나타삔디까 장자는 사밧티 시의 부호이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금융업을 해서 부를 축적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금융업이라 하면 오늘날 은행이나 보험회사와 같은 개념입니다. 부처님 당시 라자가하나 사밧티의 경우 상공업이 발달한 대도시였는데 무역이나 금융업을 부를 축적한 장자들도 많았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금융업자였습니다. 이는 “세존이시여, 여기 사왓티에서 금융업을 하던 어떤 장자가 죽었습니다.”(S3.19)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가 부처님에게 한 말입니다. 여기서 ‘금융업을 하던 어떤 장자 (seṭṭhigahapati)’라는 말은 아나타삔디까를 지칭합니다. 성전협에서는 ‘백만장자’로 번역했습니다.
빠알리어 셋티가하빠띠(seṭṭhigahapati)는 ‘seṭṭhi+gahapati’형태의 복합어입니다. 여기서 ‘seṭṭhi’는 ‘a millionaire’의 뜻으로 백만장자를 말합니다. 빠알리어 gahapati는 ‘master of a house’의 뜻입니다. 따라서 ‘seṭṭhigahapati’는 백만장자로 번역됩니다.
그렇다면 왜 아나타삔디까가 왜 금융업자인가? 이는 seṭṭhi의 뜻이 백만장자라는 말 이외에도 ‘treasurer, banker’라는 말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셋티(seṭṭhi)에 대하여 북인도의 큰 도시에 있었던 사채업자나 금융업자를 말한다고 하며, 이러한 셋티에 대하여 “대상이나 동업 조합의 수장들이 개인적으로 금융업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급고독 장자도 금융업자이었다.” (초불연 상윳따1권 412번 각주)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아나타삔디까는 금융업자임에 틀림 없습니다. 오늘날 은행과 보험과 같은 금융업이었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무역업자일 수도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간에 교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했을 수도 있습니다.
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부호
무역하는 자는 사막이나 바다 등 위험한 곳을 통과하여 교역함으로서 부를 축적합니다. 무역하는 대상들에게 돈을 빌려 주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위험지역을 통과한다면 빌려 준 돈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역이 성공하면 고수익이 보장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말하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나라간의 활발한 교역으로 인하여 상공업과 금융업이 발달하여 아나타삔디까와 같은 신흥부호가 많이 출현 하던 시기였습니다.
아나타삔디까가 금융업자였다는 것은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아들 없음의 경(S3.19)’에 따르면 “세존이시여, 그에게는 금이 팔백만냥이 이나 있는데 은은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S3.19)”라는 대목입니다. 금이 팔백만냥이라 합니다. 오금은 오늘날 현금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아나타삔디까는 엄청난 현금동원능력을 가진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나타삔디까가 무역업자였다는 것은 율장소품에서 확인 됩니다. 율장소품에 따르면 “장자 아나타삔디까는 라자가하 시에 무언가 볼 일을 보기위해 왔다.”(Vin.II.154)라는 대목입니다. 아나타삔디까는 꼬살라 사람인데 마가다 국에 볼일 보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 볼일 이라는 것이 무역임을 짐작케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아나타삔디까는 금융업과 무역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신흥부호이었다고 보여 집니다.
부처가 출현했다고?
율장소품 ‘아나타삔디까 이야기’는 오늘날 성지순례에서 볼 수 있는 기원정사 설립과 관계가 있습니다. 아난다삔디까는 꼬살라 출신입니다. 그가 어느 날 일이 있어서 마가다국 라자가하 시에 갔습니다. 그때 마가다의 부호인 처남이 마치 잔치라도 준비하는 듯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라자가하 부호인 아나타삔디까의 처남은 부처님을 비롯한 상가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려 했습니다. 마치 장자에게 장가들고 시집갈 일이나 큰 제사가 있는 것처럼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이런 광경을 보자 어떤 일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처남은 “내가 내일 부처님을 비롯한 참모임을 초대한 것입니다.”라며 대답했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처남인 장자에게 ‘부처님’이라는 말을 듣고 “장자여, 부처님이라고 그대가 말했습니까?”라며 매우 놀라워합니다. 율장소품에 따르면 세 번 물어 봅니다. 그리고 “장자여, 부처님이라는 그 명성은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입니다. 장자여, 이 시간에 세상에 존경받는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을 뵈러 갈 수 있겠습니까?”라며 물어 봅니다.
아나타삔디까는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말을 듣고 당장 만나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밤늦게 만나로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처남인 장자는 다음 날 아침에 뵈는 것이 나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아나타삔디까와 부처님과의 첫만남
율장소품에서는 아나타삔디까와 부처님과의 첫만남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의 설명은 니까야(經藏)에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스토리텔링하듯이 설명되어 있는 율장을 보면 아나타삔디까의 심리상태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다음 날 부처님을 뵈올 것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려 세 번이나 착각합니다. 잠을 자다가 아침인 줄 깨지만 한 밤중이었던 것입니다. 아나타삔디까는 부처님을 만날 생각에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기쁨으로 전율하기도 하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부처님 만날 생각에 거의 잠을 못이룬 아나타삔디까는 이른 아침 부처님이 계시는 씨따바나(sītavana) 숲으로 찾아 갔습니다. 부처님은 마침 새벽녁에 바깥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아나타삔디까가 오는 것을 보고서는 “쑤닷타여, 어서 오시오. (ehi sudattā)”라며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나타삔디까는 깜짝 놀랐습니다. 수탓타라는 이름은 자신의 아명(兒名)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은 알아도 자신의 아명을 아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첫 만남에서 부처님은 ‘수닷타여’라며 자신의 아명을 불러 준 것입니다.
아나타삔디까는 “세존께서 내 이름을 불러주셨다. (nāmena maṃ bhagavā ālapatīti)”라며 감동했습니다. 이렇게 감동한 이유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부처님의 전지(全知)에 대한 것이라 했습니다.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나타삔디까는 “누구든지 나의 이름이 아나타삔디까인 것을 안다. 그러나 아무도 나의 아명을 모른다. 만약 그가 부처님이라면 이 다른 이름을 알 것이다.”(Srp.I.315)라 했습니다.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은 아나타삔디까를 한번에 알아 보았습니다. 아나타삔디까도 자신의 아명을 부르는 것을 듣고 부처님인 것을 한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첫 만남에서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본 것입니다.
잠을 잘 자는 사람
아나타삔디까는 부처님에게 예경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두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스승이시여, 세존께서는 편히 주무셨습니까? (kacci, bhante, bhagavā sukhaṃ sayitthā)”라며 문안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문안인사 할 때 “안녕하십니까?” 또는 아침이라면 “안녕히 잘 주무셨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고대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렇게 게송으로 답합니다.
Sabbadā ve sukhaṃ seti,
brāhmaṇo parinibbuto;
Yo na limpati kāmesu,
sītibhūto nirūpadhi.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 성자는
언제나 참으로 편히 잠자네.
감각적 쾌락에 더럽혀지지 않은 님은
청량해서 번뇌가 없다.”
Sabbā āsattiyo chetvā,
vineyya hadaye daraṃ;
Upasanto sukhaṃ seti,
santiṃ pappuyya cetasā
“모든 집착을 자르고
마음의 근심을 제거하고
마음의 적멸을 얻어서
고요한 님은 안락하게 잠잔다.”(Vin.II.156)
위 게송은 앙굿따라니까야 ‘알라바까의 경(A3.35)’의 게송과도 병행합니다. 부처님은 초면의 아나타삔디까의 “편히 주무셨습니까?”라는 인사말에 “성자는 언제나 참으로 편히 잠자네”라 했습니다. 이는 알라바까의 경에서 알라바까왕자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잘 주무셨습니까?”라고 문안인사 했을 때 부처님이 “왕자여, 나는 잘 잤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A3.35)라고 말씀하신 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평범한 인사말에서도 깊은 가르침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달라이라마를 친견하기 위해 간 불자가 대뜸 “존자님은 깨달았습니까?”라며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이에 존자는 미소를 지으며 “나는 잠을 잘자는 사람중의 하나입니다.”라며 동문서답식으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마치 부처님이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A3.35)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나 달라이라마존자는 왜 잠을 잘 자는 사람이라 했을까?
앙굿따라니까야 알라바까의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탐욕으로 인한 고뇌가 생겨나면, 그 탐욕으로 인한 고뇌로 불타면서 괴롭게 잠을 자지 않겠습니까?”라 했습니다. 범부들은 욕망으로, 분노로, 어리석음으로 잠을 잘 못 이루지만, 번뇌가 소멸한 성자는 북풍한설의 나무아래에서도 잠을 자도 잠을 잘 잔다고 했습니다.
아나타삔디까가 이른 아침에 부처님을 찾아 뵙고 “스승이시여, 세존께서는 편히 주무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씨따바나라는 숲에서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숲에서 자고 숲에서 아침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음의 적멸을 얻어서 고요한 님은 안락하게 잠잔다. (Upasanto sukhaṃ seti, santiṃ pappuyya cetasā)”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에 대하여 리스 데이비스 여사는 “아나타삔디까의 평범한 인사말을 이용하여 부처님께서 얼마나 깊은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Krs.I.273)라고 말했습니다.
차제설법(次第說法)으로
아나타삔디까와 부처님은 상견례에서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보았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스승이여(bhante)” 라며 부처님에게 배움을 청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아나타삔디까에게 차례로 설법했습니다.
부처님은 가장 먼저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과 멀리 여읨의 공덕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처음부터 어려운 가르침을 말하지 않고 쉬운 가르침부터 설했습니다. 이를 ‘차제설법(次第說法)’이라 합니다. 그러자 아나타삔디까의 마음이 유연해지고 장애가 없어 졌습니다. 이를 알게 된 부처님은 괴로움과 그 발생, 그 소멸, 그리고 소멸에 이르는 길의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꼬살라의 대부호이자 금융업자인 아나타삔디까는 부처님의 차제설법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어떠한 것이든 생겨난 모든 것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티끌 없이 청정한 진리의 눈이 생겨났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성자의 흐름에 든 것입니다.
제따왕자를 찾아가서
부처님의 재가의 제자가 된 아나타삔디까는 큰 식사 준비를 하여 부처님과 상가를 위하여 공양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싸밧티 시에서 수행승들의 무리와 함께 안거를 지내는 것을 허용해 주십시오.”라며 자신이 살고 있는 꼬살라로 초대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장자여, 여래는 빈집을 즐깁니다.”라며 허락했습니다.
부처님 당시 코살라의 대부호 아나타삔디까는 부처님과 상가를 위하여 승원건립을 추진했습니다. 문제는 땅이었습니다. 승원건립 조건이 되는 땅은 사밧티 시에서 “너무 멀거나 가깝지 않고, 원하는 사람들마다 모두 오기 쉽고, 낮에는 붐비지 앉고 밤에는 시끄럽지 않고, 인적이 드물고, 사람들을 떠나 고요하고, 홀로 명상하기에 알맞은 곳”(Vin.II.158)이어야 했습니다. 바로 그런 장소가 제따 왕자가 소유하고 있는 원림이었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제따왕자를 찾아 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왕자여, 저에게 정원을 주시면, 승원을 만들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왕자는 “장자여, 억만금을 깔아도 승원을 줄 수 없습니다. (Adeyyo, gahapati, ārāmo api koṭisantharenā)”라 했습니다. 사실 이 말로 거래가 성사가 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아나타삔디까가 “왕자여, 승원으로 팔렸습니다. (Gahito, ayyaputta, ārāmo)”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제따왕자는 원림의 가격에 대하여 ‘억만금’이라 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백천까하빠나(satasahassakahāpaṇa)’입니다. 고대 인도에서 네모난 황금주화로 황소 한마리가 12까하빠나의 값어치였습니다. 왕자는 백천까하빠나를 준다고 해도 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 제따왕자는 빠알리원문에 따르면 ‘jetassa kumārassa’로 표기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kumāra는 ‘a boy; a youngster’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제따왕자는 ‘어린 아이 같은 왕자’ 또는 ‘철부지 왕자’라는 뜻도 됩니다.
아나타삔디까가 세상에 존귀한 부처님과 상가를 위하여 원림을 달라고 했습니다. 적정한 가격에 사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철 없어 보이는 왕자는 그 땅에 금으로 도배를 하면 주겠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금융업자라도 원림에 금으로 도배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땅에 금으로 깔 수 없음을 전제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타삔디까는 원림을 파는 것으로 받아 들이고 “왕자여, 승원으로 팔렸습니다.”라며 기정사실화 합니다. 이에 왕자는 당황해 하며 “장자여, 승원으로 팔린 것이 아닙니다.”라며 부정합니다. 왕자의 우유부단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나타삔디까와 왕자는 팔았는니 안팔았느니하며 서로 옥신각신 했습니다. 그때함께 경청하고 있었던 대신들에게 물어 봅니다. 대신들은 “왕자여, 그대가 가격을 정했으므로, 승원으로 팔린 것입니다.”라며 아나타삔디까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기원정사를 건립한 아나타삔디까
아나타삔디까는 약속대로 원림에 금을 깔기 시작합니다. 이는 율장소품에서 “그래서 장자 아나타삔디까는 수레에 황금을 싣고 제따바나 숲을 억만금으로 깔았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 채우지 못했습니다. 작은 땅에 깔 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아나타삔디까는 금을 더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이를 지켜 보고 있던 제따왕자는 “장자가 이렇게 많은 황금을 희생하다니 보통일이 아니다.”라며 생각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내지른 말이었는데 실행에 옮긴 것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마치 철부지 같고 어리숙하고 우유부단한 것처럼 보이는 제따왕자는 자신이 한말의 무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대부호가 부처님과 상가를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바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투리 땅 마저 황금을 깔기 위하여 수레를 보내려 하자 왕자는 이를 제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장자여, 그만하십시오, 이 빈 땅에 깔지 마십시오, 나에게 빈 땅을 그대로 주십시오, 이 빈 땅을 제가 보시하겠습니다.”라 했습니다. 자투리 빈 땅에 황금을 깔게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아나타삔디까는 제따왕자 소유의 원림에 황금을 깔고 원림을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자투리 빈 땅은 마침 수레에 황금이 다 떨어져서 깔지 못했습니다. 제따왕자는 그 빈 땅을 승가에 보시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나타삔디까의 아낌 없는 보시에 감동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타삔디까는 빈 땅을 다시 왕자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왕자에게 청정한 믿음이 일어난 것을 확인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왕자는 그 빈 땅에 승원의 출입구에 해당되는 ‘현관(koṭṭhaka)’을 세웠습니다. 서로 상대방에게 주려고 마치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듯이 핑퐁 치는 것 같습니다.
아나타삔디까는 제따원림에 황금을 깔고 원림을 구입했습니다. 구입하고 난 다음에 본격적으로 승원을 건립했습니다. 율장소품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Atha kho anāthapiṇḍiko gahapati jetavane vihāre kārāpesi, pariveṇāni kārāpesi, koṭṭhake kārāpesi, upaṭṭhānasālāyo kārāpesi, aggisālāyo kārāpesi, kappiyakuṭiyo kārāpesi, vaccakuṭiyo kārāpesi, caṅkame kārāpesi, caṅkamanasālāyo kārāpesi, udapāne kārāpesi, udapānasālāyo kārāpesi, jantāghare kārāpesi, jantāgharasālāyo kārāpesi, pokkharaṇiyo kārāpesi, maṇḍape kārāpesi.
“그리고 장자 아나타삔디까는 정사를 만들고, 방사를 만들고, 문을 만들고, 집회당을 만들고, 화당을 만들고, 허용된 물품의 보관창고를 만들고, 대변소를 만들고, 소변소를 만들고, 욕실을 만들고, 욕실홀을 만들고, 연못을 만들고, 천막당을 만들었다.”(Vin.II.159)
아나타삔디까는 부처님과 상가를 위하여 아낌 없는 보시를 했습니다. 제따원림에 네모난 조각의 황금으로 도배 하듯이 깔았습니다. 그리고 원림을 확보한 후에는 갖가지 시설의 건물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성지순례 가면 볼 수 있는 붉은 벽돌 유적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아나타삔디까에 대하여 ‘보시하는 님 가운데 제일(dāyakānaṃ aggaṃ)’이라 합니다. 부처님 당시 대부호였던 수닷따장자에게 붙여준 칭호가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입니다. 이 말은 ‘anātha+piṇḍika’의 합성어입니다. 아나타(anātha)는 ‘miserable; helpless’의 뜻이고 한역으로는 ‘無怙的, 孤獨的’입니다. 의지할 곳이 없는 불쌍한 사람을 뜻합니다. 또 삔디까(piṇḍika)는 ‘piṇḍaka’의 형태로 ‘a lump of food’의 뜻으로 음식한덩어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나타삔디까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도움을 주는 자’를 뜻합니다.
바루후트(Bharhut)부조에서 보는 황금 까는 작업
아나타삔디까의 아낌 없는 보시는 후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대승불교에서 법사들이 금강경을 설할 때 급고독장자의 황금으로 까는 이야기를 빼 놓지 않습니다. 그런데 황금으로 까는 이야기는 오랜 옛날부터 부조로도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꼴까따 박물관에 있는 바루후트(Bharhut) 돌난간 부조가 유명합니다.
사진을 보면 오른쪽에 네모난 황금조각을 깔고 있습니다. 마치 목욕탕에 타일을붙인 것 같고, 인도에 보도블럭을 까는 것처럼 네모난 황금을 까는 작업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왼쪽을 보면 두 개의 꾸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는 간다꾸띠이고 또 하나는 꼬삼비꾸띠입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처소는 두 군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난다보리수에서 예경을
순례팀은 제따바나 끝자락에 있는 아난다보리수가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아난다 보리수는 보드가야에 있는 보리수에서 유래한 것이라 합니다.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 보리수에 경배함으로써 대신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보드가야에 있는 어린 보리수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천년도 넘게 보이는 거대한 보리수가 그때 당시 것이라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부처님당시부터 현재까지 보리수는 예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아난다보리수라 칭하는 보리수아래에서 예경했습니다. 빠알리어로 예경문과 삼귀의, 오계, 삼보예찬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따바나와 적합한 경인 ‘한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M131)’을 독송했습니다.
시간은 다르지만 같은 공간에
제따바나, 기원정사는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 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제따바나가 사대성지에 속하지는 않지만 팔대성지 중의 하나로서 인도성지순례에 가면 빠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경전에서 수 없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불교에서는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금강경을 설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시간에 쫓겨 두루두루 다 살펴 보지 못했습니다. 정문에서 끝자락에 있는 아난다보리수까지 중앙길을 따라 왕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수 많은 순례자들이 다녀 간 곳으로 경건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 보다 남겨진 유적을 통하여 부처님과 제자들의 체취도 느낄 수 있습니다. 상큼한 공기를 통하여, 시원하게 부는 한줄기 바람을 통하여, 건기의 따스한 햇살을 통하여 접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다르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것입니다.
2018-02-15
진흙속의연꽃
'외국성지순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담마(Dhamma)에 의한 정복만이 평화와 행복을, 난공불락의 철옹성 아그라성을 보고 (0) | 2018.02.20 |
---|---|
슬픔 없는 왕도 영화가 몰락했을 때, 권력무상 타지마할을 보고 (0) | 2018.02.18 |
성자로 거듭 태어난 흉적 앙굴리말라 (0) | 2018.02.14 |
나이가 많다고 다 어른일까? 부처님이 최상자인 이유 (0) | 2018.02.11 |
룸비니 가는 길에 (0) | 2018.02.08 |